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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개의 달 Dec 16. 2018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관계

 밖에서 막 활기차고 신나는 사람은 외향적이라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 사람들을 내향적이라 하고. 나는 늘 이 분류가 마음에 안 들었다. 밖에서 막 활기차고 혼자 있는 시간도 왕창인 사람은 그럼 어쩌지? 밖은 좋은데 딱 한 순간만 찍고 다시 들어오는 사람은? 대표적으로 나는 대형견 같은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사람을 왕창 좋아하는 래브라도 리트리버. 사람을 만나는 것이 마냥 좋고, 같이 이야기하고 시간을 나누는 것이 그저 행복한 사람. 근데 나에게는 꼭 이것만 있는 건 아니다. 혼자 책 읽고 고민하는 시간도 못지않게 좋아하니까!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을 선호하고. 그래서 고민 끝에 혼자 단어를 하나 만들었다. (혹시 이미 있는 단어라면 아직 내가 못 찾아낸 것이리라. 아시는 분 있으면 가르쳐 주시길.)     


관계체력 (關係體力) :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유지하는데 드는 힘.

예) A : 너 요즘 왜 연락이 안 돼?

    B : 아 요즘 관계체력 떨어져서 연락도 힘들고 만나기도 싫고 그래.     


 그러니까 관계체력은 사람마다 총량이 다르고, 채워지는데 걸리는 시간도 다 다르다. 관계 유지에 필요한 활동을 무엇으로 하냐에 따라서도 깎이는 속도가 다르다. 대표적으로 나의 지인 S는 카톡은 무난하게 줄줄 하는데 전화만 하면 그렇게 관계체력이 훅훅 떨어져서 금방 끊고 싶어진다고 한다. 바로 대화를 줄줄 이어가야 하는 것도, 대화 주제를 계속 가져와야 하는 것도 힘이 든다고 한다. 또 다른 친구 A는 평소에는 사람을 안 만나고 잠수를 쭉 타다가 관계체력이 좀 준비된 날 밖에 나가면 약속을 줄줄이 비엔나처럼 잡는다. 연예인처럼 이 약속 저 약속으로 넘어가며 사람만나고 일 보기를 마치고서는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고, 다시 관계체력이 찰 때까지 잠수를 탄다.

 세상은 자꾸 사람들 보고 관계체력이 넘쳐나야 한다고, 막 밖에도 나가서 자꾸 사람도 만나고 모임도 갖고 해야 한다고 부추기는데 애초에 총량 자체가 다르니 모두가 다 그럴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누구도 나를 보고 헐크처럼 힘이 세지 않다고 혼내지 않는걸. 사실 이런 당연한 것들을 오랜 시간 나도, 내 친구들도 몰랐다. 아끼는 친구 K와 나는 서로 오해 속에 살다가 솔직한 고백 이후 편한 사이가 되었다. K는 소위 ‘외향적’인 나를 보고 나와 함께할 때는 항상 그런 밖으로 나오는 활동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금세 지쳐버리는 K를 보면서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마냥 지루한 것은 아닐까하고 혼자 굴을 파고 있었다. 신나게 쌓여가는 오해 속에 서로 예민해졌을 때,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대화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랑 있는 게 그렇게 힘들어?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좀 더 부드러운 말이면 좋았을 텐데. 더 잘하고 싶고 더 만나고 싶은 친구인데 왜 그렇게 어긋나는지 혼자 서러워했던 것 같다. 그 말을 시작으로 우리는 서로 좋은 것과 힘든 것들을 이야기했고, 여러 가지 룰을 정했다. 힘들 때 솔직하게 여기까지라고 버겁다고 말하기. 같은 것을 하지 못하더라도 그게 싫어서가 아님을 인정하기. 그런 것까지 하나하나 정해야 하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솔직한 룰이 암묵적인 오해보다 훨씬 나은 것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대화를 나눴다.

  K와의 대화 끝에 나는 관계체력이라는 단어를 만들었고 주위의 말 못할 관계 고민을 가득 가진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파하고 다녔다. 쫄지 말고 솔직히 말하라고, 서로 좀 알아야 덜 힘들지 않겠냐고. 물론 이런 것이 통하지 않는 관계도 가득 있을 것이다. 강제로 만들어지는 상하관계, 억지로 나가야 하는 자리. 버텨야 하는 관계들. 그런 자리에서까지 이 규칙을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런 곳에서 ‘나만 힘든가?’라는 생각이 들면 꼭 기억하자. 나는 헐크가 아니다. 암. 그렇고 말고.

 맞춰준다는 말에 겁을 먹던 시간들이 있었다. 맞춰주는 것은 마냥 나쁜 것 같고. 맞춰주는 사이라고 하면 늘 불편한 것 같고. 그래서 혼자 ‘으레 그 사람은 이럴 것이다‘를 상상하면서 행동했다가 어긋나버린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는 모든 순간들은 다 결국 서로에게 맞춰가는 걸 텐데. 애초에 다르니까 맞추는 게 당연할 텐데. 어느 한 쪽만 노력해가는 관계가 좋지 않을 뿐 맞추는 것 자체는 나쁠 게 없는데 말이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관계라는 것은 결국 환상이다. 물론 현실에도 환상들이 여럿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 관계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나는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니 솔직하게 물어보고, 말해보고. 못한다고 하고. 할 수 있다고 하고. 그게 서로 다른 관계체력을 알고 같이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고, 알던 사람들과 관계가 깊어지고 하는 것들이 마냥 좋은 나는 오늘도 사람에 대해 조금씩 알아간다. 혼자 프로파일을 만들듯이 이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알게 된 것. 관계체력 등을 열심히 머릿속에 채워 넣는다. 책이 두툼해지고, 서로에게 서로를 소개시켜주고. 함께 있는 순간이 뿌듯하고 행복해서 또 만나고 싶고. 그런 순간들이 늘어가는 것이 좋다.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열심히 체력을 쏟아내기도 하고, 큰 서점에 가서 각자 다른 코너에 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서로 추천을 하기도 한다.

  똑같이 노래방에 가도 사람마다 다르다. 같이 질러보는 사람, 내가 파닥거리는 것을 보기만 해도 즐거운 사람. 발라드만 가득 부르는 사람. 다 다르면 다른 만큼 재미있는 것을. 흥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제대로 흥 내는 사람이 아니다. 조용한 사람이 재미없다고 대체 누가 그랬나. 친구가 서점가서 골라오는 책은 하나같이 다 발칙하고 짜릿한 것들뿐인데.


함께 만나면 무엇을 할 지 같이 이야기하고 시간을 고르는 순간들이 당연해졌으면 좋겠다. 이야기하기 전에, 약속 잡기 전에. 서로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즐겁고 신날 테니까.      


당신의 관계체력은 어떠십니까?

어떻든 솔직합시다.      


말하지 않으면 영영 모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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