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분노
이별에 대해 대처하는 방법을 적은 책과 시가 많이 있는 것으로 안다. 주로 감성적인 방법이 많은데 여기서는 실질적인 얘기를 해보고 싶다. 우선 우리는 이별에 대해 의연하고 당당하게 맞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이별의 아픔 따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고 의례 겪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개인의 아픔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이들이 가장 싫다)
하지만 아픈 것을 아프게만 받아들이기보다 내가 번데기를 찢고 나와 나비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견디기 힘든 이 아픔이 끝나고 나면 당신에게선 아름답고 탐스러운 날개가 돋아나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위로도 되지 않는 말이냐고? 천천히 내 얘기를 듣다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겪지 않고 첫사랑에 성공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면 그것이 가장 최선일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랑에 이의는 없다. 다른 어떤 훌륭한 사랑도 이보다는 못하다. 아픔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지금이 최선이라고 믿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
동화는 항상 “왕자와 공주가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대요.” 하며 끝나지만 현실 속에서 그런 무난한 사랑은 없다. 그게 바람직하지도 않다.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위기가 찾아오고 그것 때문에 사랑이 깨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둬야 한다.
아픔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단 한 번의 아픔에도 무너질 수 있다. 사랑 때문에 자살이나 자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별의 아픔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무너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유연하게 넘기기 위해서라도 아픔에 관해 생각해보고 이야기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장은 그런 의미가 있다. 사랑에 관해서 말하는 이 책이 아픔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기나 다름없다.
동전의 앞면에는 사랑이 뒷면에는 아픔이 새겨져 있다. 둘은 서로 다른 얼굴이지만 같은 동전 속에 있다. 사랑이 끝날 때쯤 아픔이 오고 아픔을 잊을 때쯤 사랑이 온다. 사랑이 곧 아픔이란 말은 선인들의 말만이 아니라 그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맞는 말이다.
인간의 감정은 영원하지 않고 예측도 안되며 심지어 극단적이기까지 하다. 큰 사랑은 큰 미움으로 변할 수 있다. 실연의 과정에서 후유증으로 남는 것 중에 가장 오래 남는 것이 분노이다. 분노는 실연을 준 사람이 아닌 당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감정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다 사그라져도 분노는 잊히지 않는다.
분노는 그것만으로 한 장의 토론 주제가 될 만큼 큰 감정의 카테고리이다. 사랑과 분노는 그 에너지양으로만 얘기하자면 서로 비슷할 정도로 크다. 음과 양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두 가지는 이란성쌍둥이나 같다. 사랑의 3요소가 사람, 신뢰, 애정이라면 분노의 3요소는 사람, 불신, 미움이다.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무너질 때 그 앞에 무기력하기만 한 당사자는 분노를 느낀다. 사랑에 실패하면 화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분노는 아픔을 잊게 해주는 역할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방어기제로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분노는 그렇게 이별에 대처하는 좋은 방법처럼 보인다. 상대방의 책임과 복수만을 떠올리게 되므로 이별의 상처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길게 보면 분노라는 것이 임시처방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분노는 그 자체로 나를 버티는 힘이 되어준다. 사랑이 사라진 빈 공간을 순식간에 채울 수 있는 게 분노이다. 분노의 에너지는 사랑의 그것에 못지않다. 특히나 사랑의 변질로 생긴 분노는 사랑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가져간다.
그 에너지로 실연의 시기를 견뎌내려는 것은 좋지 못한 선택이다. 아픔은 아픔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려는 자세가 필요한데 분노로 자기를 채우고 버텨내려 한다면 나중에 마음의 안정을 찾더라도 그 속에 분노라는 통제 못할 놈이 몸을 웅크리고 도사리게 된다.
얘기하다 보니 분노와 사랑이 참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통제할 수 없고 에너지도 크며 둘 다 어떤 대상을 향해 있다. 그래도 둘 간의 명백한 차이가 있는데 사랑은 샘물처럼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것이라 아무리 품고 있어도 나쁠 게 없지만 분노는 그렇지 않다.
분노는 마음속에 담아두면 서서히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다. 분노라는 것은 어떤 감정이 전이되어 생기는 감정이지만 그 독성 때문에 점차 우리의 정신세계를 피폐하게 만든다.
분노는 건강한 우리 '정신'의 나무에 자라는 덩굴식물 같은 것이다. 뿌리부터 점점 휘감아 올라와 양분을 빼앗고 더 자라지 못하게 하고 결국 나무를 죽게 만든다. 나무가 죽으면 분노는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해 우리의 온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분노가 지배하는 사람은 네거티브한 기운을 뿜기 때문에 누구도 가까이 가려하지 않는다. 아마도 주위에서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항상 화낼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천사라도 이 사람들 곁에서는 온전한 대화가 힘들다. 매사가 부정적이고 타인을 통해 분풀이를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돼서는 안 된다. 한 번 이별할 수 있지만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
물론 이별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도 아팠을 것이고 힘도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또 사랑해야 한다. 보란 듯이 더 좋은 사랑을 해야 한다. 당신의 인생은 길고 이어지기 때문이다.(Life goes on with or without you)
분노는 잘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괴롭다. 분노의 에너지를 억누르는 것은 사랑의 에너지를 자제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 분노는 또 하나 효과가 있는데 기억을 지울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분노하고 있는 동안 그 기억은 절대로 잊을 수 없다. 무언가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분노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용서라는 것을 아는가?”
"알지. 누가 용서하기 싫어서 못하나.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이야?"
분명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말을 것이다. 그렇다 용서는 어렵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분노의 기억 때문에 미래의 기회를 놓치고 있으며 미래가 과거에 의해 지배당하는 어리석은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과거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미래는 새로운 것이지 과거의 연속이 아니다. 새롭게 주어지는 24시간, 1년의 시간을 지나온 과거 때문에 포기하거나 엉뚱한 일에 투자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건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1분 1초라도 당신의 새로운 행복을 위해 사용하는 게 맞다.
분노로 밤을 지새우고 복수를 위해 칼을 가는 건 어리석은 행위이다. 이미 끝나버린 사랑에 대해 무엇으로 복수를 하며 분노를 안고 있다고 해서 어떤 일이 해결되는가?
용서가 죽기보다 어렵다는 걸 안다. 밤에 자다가도 이불 킥을 할 정도로 분할 때가 있다.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울분을 삭일 때도 있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가슴을 치던 일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용서하라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두고 내가 안정을 찾고 사소한 것들이 망각으로 사라질 때쯤 용서를 시도해보라는 것이다. 용서란 "너를 이해해. 넌 아무 잘못 없어"가 아니다. "네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그래 너의 입장에서 그럴 수 있겠지. 그러나 난 거기에 동의하지 않아. 네가 선택한 길에서 잘 살아봐. 난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네가 선택한 길에 만족하길 바란다." 이 정도면 된다.
“모든 걸 용서할 테니 다시 돌아와”, “다 잊었어. 우리 다시 친구처럼 지내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쿨하게 하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 없다. 인간은 쇠붙이처럼 쿨(Cool)할 수 없다. 그게 당연하다. 용서는 쿨하게 하는 게 아니라 따뜻하게 하는 것이다. 따뜻하게 나를 감싸고 위로하는 게 용서이다.
용서를 하는 쉬운 방법은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추정이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본인한테서 대답을 듣기는 힘들 테니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서 추리소설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에 가능하면 최악보다는 최고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별로 이어지는 과정 자체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면 용서는 훨씬 쉬워진다.
물론 그것 때문에 분노도 있을 수 있지만 이별의 원인을 몰라 분노만 치미는 상황보다는 낫다. 상황 자체를 냉정히 파악해야 그 상황을 일단락시킬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그 사람 입장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가미해 그의 행동을 이해해보자. 여기서 이해는 행동을 수긍한다(Accept)는 뜻이 아니라 행동의 이유를 안다(Know)라는 뜻이다.
용서는 이해해서 하는 게 아니라 앎으로서 하는 것이다. "아. 네가 그래서 이랬구나. 나는 동의할 수 없지만,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일단 알겠어."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다. 전에 유명 연예인이 연인에게 폭행을 가해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왜 때리고 싶을까? 그것은 사랑의 에너지가 분노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분노를 지워야만 다시 새로운 미래를 살아갈 수 있다. 억지로 용서하려고 서둘 필요는 없고 천천히 시간을 가지면서 내상을 치료한 뒤 여유가 생길 때 해도 늦지 않는다. 분노의 에너지는 워낙 커서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 사랑도 그렇듯이 분노도 어느 시점이 되면 한계치에 달하고 내려오기 시작한다. 문제는 사랑은 줄곧 내려와 0이 될 때까지 가지만 분노는 상대방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 에너지의 힘은 이런 것이다. 왜 사랑은 식는데 분노는 유지되는 걸까? 나도 조물주가 아닌 이상 이것까지는 모르겠다. 자기 부인과 바람을 피워 도망친 친구를 10년 뒤에 우연히 만나서 살해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10년이 지나도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너지는 양(+)의 방향으로 갈 때는 뭔가 넣어줘야 한다. 그러나 음(-)의 방향으로 내려갈 때는 아무것도 안 해도 저절로 내려간다. 분노는 음(-)의 에너지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유지될 수 있다.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기 때문에 유지된다. 용서를 하지 못한 것이다. 잊지도 못하고 용서도 못한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은 절대 그럴 일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랑의 배신감은 사랑만큼 지독하다.
그러나 10년 뒤 복수를 했다는 사람에게 해주고픈 말은 10년간 복수를 준비하거나 그것을 성공시켰다고 해서 당신의 인생은 무엇이 달라졌나?
정말로 잊을 수 없게 된 것은 이제부터이다. 과거에 묻혀 망각으로 사라질 수 있었던 일을 현재에 불러냈으니 다시 잊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당신은 피해자이다. 그래서 억울하다. 분통하다. 그렇지만 인생이 내일 끝나지는 않는다. 만약 내일까지만 산다면 그렇게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내일도 모레도 인생은 계속되고 거짓말처럼 새로운 사람도 만나게 된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백년해로 하란 보장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이해(know)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인생에서 이해하기 힘들지만 인내하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 한두 가지인가? 타인의 어떤 행동으로 인해 당신이 상처 받는 것은 막기 힘들다. 그러나 당신 자신이 스스로 상처 주거나 인생을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상식적으로 행동할 것이란 기대를 버려야 한다. 우리가 가진 상식이 서로 다를 수도 있고 상식에 얽매이는 정도도 각자 다르다. 내가 당연하다고 기대했던 사랑이 처참하게 배신당해 돌아왔을 때도 충격(Shock)이 아닌 사건(Event)으로 받아 들일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상대방에 대해 가진 기대치가 클수록 상처는 커지고 분노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잘난 척하지만 수준 이하인 경우가 아주 많다. 문자 한 통으로 이별을 통보하고 자기가 편할 때 아무렇게나 다른 이성을 만나고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에게만 충실할 거란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미리 걸러낼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처도 받지만 우리는 이별이라는 과정을 통해 더 큰 불행을 방지하고 원하는 삶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한 가지 이야기를 예로 들겠다. 한 커플(A, B)이 있었는데 남자 A와 친한 친구인 C가 여자 B를 몰래 만나다가 결국 가로채서 커플이 되었다. A는 심한 배신감에 휩싸였는데 시간이 한참 흐른 뒤 B와 C는 정작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이 사건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보통 이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B와 C를 나쁜 사람이라고 욕하고 왜 저렇게 살까? 도대체 얼마나 행복하려고? 이런 생각을 한다. 인간을 도덕적으로 안정된 존재로 보면 이런 일에 해석할 방도가 없다. 인간은 유혹에 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나마 인간 중에서 도덕적 우위에 있다는 성직자들도 성추문에 휩싸일 때가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너무 비하할 필요도 없지만 너무 큰 기대를 해도 안된다. 우리는 그런 불완전한 존재이다.
우리가 원래 불완전하니 이런 일에 잘잘못을 따질 필요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그런 인간의 그런 본성을 이해하고 나면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사건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해하면 용서할 수 있다. 그래서 다음에는 더 높은 인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사람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인간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다. 짐승보다 못한 사람도 많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숨는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좋은 상대를 찾아야 한다. 이것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같다. 적극적으로 찾는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 보일 것이다. 100% 찾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숨는 것보다는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
1. 사건을 이해하자.
용서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일단 사건을 제대로 이해(Know)하는 게 중요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고 상대방은 어떤 입장이었을까? 그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2. 원인을 나한테서 찾자.
사건을 이해하고 나면 사건의 원인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원인들 중 내가 제공한 것들을 먼저 집중해야 한다. 화를 내는 것은 무언가 내가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분노의 발단이 된다. 그래서 분노의 제거를 위해 이 부분을 고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보다는 나의 책임을 먼저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자책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라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내가 상황을 바꿀 수 있었던 요소는 없었는지 보라는 것이다.
쉽게 힐링하는 책들에서는 사랑의 실패에 당신은 어떤 책임이 없고 오로지 좋은 미래를 꿈꾸라고 쉽게 얘기한다. 그러나 이래 가지고는 절대로 분노와 상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상대가 있는 일에서는 일방적으로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바람을 피웠다고 해도 과연 나는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랑을 주었는지 되물어야 한다.
오해하지 말 것은 그 사람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상황을 내가 주도하는 관점에서 원인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잘못을 찾아낼수록 분노만 커질 뿐 이제 와서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원인을 내게서 찾는 것도 아픈 과정이지만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빠르고 이해가 쉽다.
과도하게 자책하지 않는 선에서 객관적인 내 실수들을 모아서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그렇게 이해할 수 없던 그 사람의 변심도 어떤 이유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이유에 나도 어느 정도는 기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왜? 인간은 불완전하니까. 그 사람이 하듯이 나도 실수할 수 있다. 나는 완전한데 그 사람만 나쁜 짓을 한 것으로 생각하면 영원히 상처 받게 될 것이다.
내 잘못에 집중해 사건의 진행과정을 분석해보면 분노의 절반은 사라지게 된다. 내 잘못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직 사건을 다각도로 보지 않은 탓이다. 나의 관점이 아니라 타인의 관점에서 또 다른 관점에서 계속 분석하면서 여러 측면의 개연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내 경험이기도 한데 나는 절대적으로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떠난 사람을 원망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얼마나 사랑에 서툴렀는지 얼마나 많은 실수들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실수와 잘못은 이제 와서 집중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나의 실수들은 잘 곱씹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데 쓸 수 있다.
3. 상대방을 평범한 인간으로 보자.
상대방을 평범한 인간으로 보자. 내가 한창 빠져있던 매력적인 상대가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보면 그 사람의 이별 결심은 충분히 이해할 대목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내가 기대하는 어떤 인간형에 끼워 맞추다 보니 그 사람의 이별 결정을 이해 못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의 면모를 평범한 사람으로 인식했을 때 남은 분노의 상당 부분이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4. 나를 소중히 하라.
어떤 아픔, 배신, 눈물도 나를 위한 한 가지 경험이 될 순 있어도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도 허무하게 끝나 버렸을 때 우리는 후유증을 넘어서 파괴의 충동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나에 대한 파괴이다. 결말을 잘 이뤄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허탈감에 이런 생각을 하기 쉬운데 이별도 사랑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이 시작과 끝이 있다. 어떤 것도 영원할 수는 없다. 그 끝이 온 것일 뿐이다.
사람은 끝이 아름다우면 다 아름다운 것처럼 기억한다. 학창 시절이나 젊은 시절의 방황도 지나고 나면 다 아름답다고 느낀다. 터무니없게 끝나버린 사랑이라 할지라도 아직 당신에게 마무리할 기회가 남아있다.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어떤 아픔에도 굴복하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바로 서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너무 어려운 시험문제 같은 것이다. 운이 좋아한 번에 맞출 수도 있지만 여러 번 틀릴 수도 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사랑이 이뤄질 확률이 우주에서 인간과 같은 생명체를 만날 확률과 비슷하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 낮게 표현했느냐 하면 그만큼 사랑이 마음처럼 되지 않고 완전한 형태로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평생 동안 완전한 사랑을 꿈꾸지만 죽을 때까지 그것을 찾았다고 답하지는 못한다.
과정이라는 것은 물 흐르듯이 지나가는 것이고 지금 견디기 힘든 무게도 긴 인생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잠깐의 시련에 불과하다.(실연과 시련이 발음이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픔이라는 것은 적응되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경험할수록 조금 더 나은 탈출구를 찾게 된다. 어느샌가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 고통을 잊는 방법, 추억을 접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이 사람의 성장의 과정이고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것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 누구나 처음은 어려운 법이고 자기만의 사랑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사랑 이상향 속에서 이별의 모습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아픔을 두려워하거나 아픔에 파묻히면 안 된다. 재밌는 것은 정말 죽을 것처럼 아프다가도 다른 사랑을 만나면 너무도 완벽하게 그 사랑에 다시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도 세상에는 수천수만의 또 다른 ‘그 사람’이 존재한다.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되면 그전 기억은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다시 사랑하게 된다. 때로는 그렇게 아팠던 자신이 부끄럽고 우습게 느껴지기도 한다.
본질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두 사람의 인간이 만나서 완전성을 추구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 좋은 파트너를 만났을 때 더 높은 완전성을 얻을 수 있다. 완전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서로의 불완전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더 잘 커버해주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헤어진 사람보다 나은 상대를 만날 수 없다는 착각에 빠져 자신을 자책해서는 안된다. 어려운 문제를 한번 틀렸다고 내가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다.
올바른 이별의 방법
설마 우리가 이별할까? 혹은 이별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조금 달리 생각해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사랑의 시작만큼 이별도 중요하다. 당신의 이별 방식에 따라 한 사람은 그 사랑을 아름답게 기억할 수도 있고 절망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이별이라는 것이 어떻게 하든 좋은 것일 수는 없는데 그래도 이것을 조금이라도 적은 상처를 서로 주면서 할 수 있을까는 고민해볼 수 있다. 요즘에는 연락을 끊거나 문자만 남기거나 심지어 다른 자기만 이별을 준비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랑을 어떻게 배웠든 누구와 사랑을 했건 두 사람의 만남은 항상 서로를 배려하는 게 필요하다.
왜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감정이 이미 사라졌고 그 감정에 솔직한 이상 다시 볼 것도 아닌 상대방에게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느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별하는 방식에 따라 지나간 사랑이 가치없이 되어버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나는 본의 아니게 더 예리한 칼로 상대방의 심장을 찌르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당신과의 이별이 손끝을 살짝 베인 정도가 될지 심장 깊숙이 뚫고 들어온 치명상이 될지는 당신의 이별 방식에 달려있다. 다시 안 보더라도 당신이 칼로 찌르고 떠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진실로 사랑했다면 이별만큼 그 방식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상대방의 기억에 사랑했던 추억이라도 온전히 주고 떠나야 한다. 그것마저 보잘것없는 쓰레기로 만들어버린다면 사랑했다고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별의 방식은 이별을 통보하는 자에게 선택권이 있다. 당신은 이별을 할 때 아주 힘든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할 수도 있고 아주 부드러운 방식으로 할 수도 있다. 아름다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깔끔하고 기억에 남는 방식으로 할 수 있다.
아주 부드러운 방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몇 가지 원칙만 지킨다면 할 수 있다. 우선 솔직해야 하고 이별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예상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해야 한다. 솔직함은 마지막에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이별 치료제이다. 그 사람에게 당신을 비난할 수 있는 권리라도 주어야 한다. 실컷 욕하고 잊을 수 있게 말이다. 당신이 거짓말로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데만 신경을 쓴다면 상대방은 비난조차 할 수 없어 자책하거나 상처에서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이별 타이밍은 매우 중요한데 가급적 상대방이 가장 힘든 시기는 피하는 게 좋다. 매너라고 부르긴 그렇지만 사랑에도 예의가 있다면 최소한 상대방이 힘든 상황을 벗어나 한숨 돌릴 때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최악의 상황에서 무너져가는 상대방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랑했던 사람인데 어려운 상황에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없다면 상황을 악화시키지는 말아야 한다.
이별을 예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이별이라는 것이 때로는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지만 뚜렷한 징조를 보이며 찾아올 때도 있다. 관계가 식어가는 것을 표현할 필요도 있고 완전히 끝낼 작정이라면 빨리 통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쓸데없는 상대방의 노력을 줄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기울인 노력만큼 상대방은 더 큰 애착을 가지고 그래서 이별의 충격도 커진다. 내 불만을 표현하고 그것에 반응할 기회를 줘야 한다. 뜻밖의 방향 전환이 이뤄질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확실하게 마음을 정할 수 있는 기회도 된다. 무엇이든 상대방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고 서서히 연착륙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가야 한다.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보다 헤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나는 것은 서로 잘하려고 노력하고 무엇이든 잘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 기술적, 경험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별하는 것은 사랑 경험이 많은 사람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유아적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성숙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성숙한 이별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내가 어떻게 기억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이별을 주었는지가 내가 그런 인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중요하다. 이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