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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르히아이스 Oct 09. 2018

8. 실연의 과정 2

실연의 과정 2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는 상대방이 없이 견딜 수 있는 기간이 있는 것 같다. 이별 후 이 기간을 넘어서면 곧바로 통증이 시작된다. 이것은 마음의 통증인데 여러 가지 증상을 동반한다. 식사를 못한다던가 잠을 못 자는 게 일반적이다. 좀 더 심하면 공격적으로 변하거나 자기 일을 못하게 되는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오는 것은 물론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해진다. 이런 고통의 나날이 며칠간 혹은 몇 달간 계속되다가 차츰 정상으로 돌아온다. 이별 경험이 많은 사람은 이런 아픔을 덜 격고 빠르게 지나갈 수 있다.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이라 한번 경험했던 과정에 대해서는 공포가 적다.


 경험이 없으면 이별 후가 어떻게 될지,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지, 어떻게 극복하면 되는지 몰라서 정신적인 충격이 크다. 특히 일방적 통보에 의한 실연이거나 다 식어버린 사랑을 뒤늦게 알아챈 경우 그 아픔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자유연애가 드물었던 과거에는 관계가 깨어지면 더 고통을 받았다. 정적인 관계 속에 만나면 결혼이고 백년해로라고 믿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유연애가 일반화된 현대사회에서 순정의 사랑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애절함도 그만큼 희귀한 시대가 되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는 샤롯테에게 대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자살하게 되는데 지금 이런 사람이 있다면 신문에 날 일이다.

주는 사랑의 허상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그 유명한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 에히리프롬이 살던 시절만 하더라도 그런 사랑이 보기 좋은 사랑이었고 일반적인 모습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랑에 관해 서술한 많은 책들이 도덕적인 사랑을 강조하다 보니 이런 함정에 빠진다. 과거에는 그나마 덜했을지 모르지만 현대 사랑에서 이런 태도는 ‘호구’되기 딱 좋다.


 지금은 ‘주는 사랑’만으로는 사랑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다.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것의 주기가 빨라졌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만나고 절정에 이르고 헤어지는 사이클이 아주 짧아졌다. 그리고 얼마든지 중간에 포기하고 다른 사랑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주는 사랑은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다. 오히려 내 상처만 크게 할 뿐이다. 


 심지어 사랑을 위태롭게 만들 가능성도 있다. 잘해주는 게 정답이 아니란 얘기다. 내가 상대방을 ‘지나치게’ 믿고 내 노력을 일방적으로 쏟아붓는다면 상대방은 나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오히려 줄어든다. 이것은 시소와도 비슷하다. 내가 올라가면 상대방은 내려온다. 상대방과 균형을 이룰 생각이라면 상대방의 반응을 봐가면서 요령 있게 사랑을 줘야 한다. 그 요령에 관해서는 뒤에서 계속 나올 것이다. 


 현대 사랑의 이런 변화에 대해 개인의 행복권을 강화했다는 측면에서 좋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도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 사랑이 너무 단편적이고 즉흥적이 된다면 우리가 사랑에서 받는 감동도 작아질뿐더러 사랑의 깊이도 얕아질 수밖에 없다. 


 헤어진다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면 사실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 점심때 만나서 저녁때라도 헤어지면 되지. 우리가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만나고 헤어지는 게 자유로워진 현대 사랑의 특징을 보고 우리는 좋아진 점을 충분히 받아들이면서 나쁜 쪽으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은 문자 한 통으로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는데 이별한다는 결과에 대해서는 문자로 통보하든 만나서 얘기하든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이별을 통보받는 사람은 단순한 이별 이상의 상처를 받는다. 우선 문자라는 통보 방식에서 자존심의 상처를 받고 이런 가벼운 이별통보에 지금까지 해왔던 사랑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이별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사랑까지 건드리지는 말자. 그것은 그 나름대로 고귀한 것이고 그 속에 있었던 두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했던 사랑이었다고 남겨두자. 그래야 상대방도 덜 상처 받으면서 끝낼 수 있다. 집 나갈 것이면 조용히 나가면 되지 불까지 지르고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실연의 고통

 실연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고통을 준다. 그걸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불감증에 걸려있는 게 틀림없다. 고통이 없으면 사랑의 기쁨도 적어진다. 우리가 사랑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이유는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고 서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서로 하나가 되는 기쁨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이 기쁨이 헤어질 때 고통으로 변하는 것인데 고통이 작다는 얘기는 역으로 사랑의 기쁨도 그만큼 작은 것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상대방에 마음을 작게 열고 다치지 않을 만큼만 사랑하면 이별할 때 고통이 별로 없다. 사랑을 많이 한 사람들은 점점 이렇게 되어간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사랑도 시들해지고 이별이 와도 무덤덤하다.


 실연의 고통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애를 쓴다. 정신적 고통이라는 것은 마음의 바닥을 긁는 것과 같다. 당신의 내면에 있는 부드러운 마음씨. 그 연한 살을 갈고리로 파내는 것이다. 그만큼 아프다. "내 마음의 밑바닥이 여기까지는구나!"를 느낄 수 있다.


 상처가 생겼다 아무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나중에는 마음이 어느 정도 단단해지기 시작한다. 생각의 폭도 넓어진다. 그래서 상처가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정신적 내구성이 강하다.


 첫사랑만큼 열심히 한 사랑이 없다는 게 남성들의 본심이다. 그건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자꾸 적응해가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반복되는 사랑에도 노력의 정도는 비슷하다. 매번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게 여성의 사랑이다. 그래서 여성이 상처를 더 많이 받는 게 일반적이다.


 최근에는 이런 공식도 많이 바뀌고 있지만 통상적인 경우에 그렇다는 얘기이다. 남성들은 사랑에 대해 기술과 노하우를 늘려가지만 대개의 경우 여성들은 상대방을 고르는 안목을 길러간다.

실연에서 배운다

 실연의 고통은 잘 견뎌내기만 한다면 자산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오는 고통은 인간의 정신적 깊이를 더 깊게 해 주고 이것은 내면의 인격을 그만큼 높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실연의 고통을 정면으로 부딪히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피하기만 하거나 시간이 해결해주기만 기다리고 있고 어떤 것도 사색하지 않는다면 이 고통은 그저 고통의 깊이만을 체험하는 여행이 될 것이다. 


 이별 후 혼자인 기간은 단순한 자유의 시간만은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은 둘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다. 사랑이 없는 시간은 사랑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지난 사랑을 반성하는 시간이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몇 번의 사랑을 해도 당신은 어린아이 일 뿐이다.


 사랑하는 동안 누구나 부족한 것이 있고 실수도 하기 때문에 이별 후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왜 그런 일이 생겼고 왜 그렇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는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지 못하면 또 비슷한 이별로 고생하거나 불만족스러운 사랑을 해야 한다. 원하는 사랑을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그런 사랑이 온다. 내 마음이 열려있고 상대를 품을 수 있는 도량이 있은 다음, 상대에게도 그것을 기대할 수 있다. 혼자인 시간 동안 반성과 배움을 통해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


 열심히 사랑하고 헤어진 다음에는 또 다른 사랑을 위해 반성도하고 나의 부족한 면을 채우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한다. 그래야 이다음 사랑은 좀 더 나은 사랑이 될 것이다. 사랑에 한참 빠져있을 때는 지금보다 나은 사랑이 없을 것 같지만 참 우스운 게 다음 사랑을 할 때도 똑같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이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하기보다는 내 부족함을 배우는 계기로 삼고 심기일전해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 번의 실패한 사랑으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면 나는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10대부터 30대까지 똑같은 사랑만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를 통해서 배우고 내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다면 실연조차 헛되지 않고 결국 행복한 사랑에 한걸음 다가가는 길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 책의 저자는 능수능란한 사랑의 조련사로 오해될 수 있지만 나는 실패를 많이 한 사람이다. 실패와 굴욕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됐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실패들에 대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랑할 때 상대는 나의 거울이다. 결별 후에 모든 것이 상대의 탓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다음에 또 그런 사랑을 할 가능성이 있다. 상대를 통해 내가 무엇이 부족했는지 깨닫는다면 그(그녀)가 준 이별은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실연의 후유증

 실연의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후유증이 기다리고 있다. 닮은 사람이 보인다던가 꿈에 나타난다던가 아니면 문득문득 생각에 빠지는 것이 그런 것이다. 이 증상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과정을 겪으며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인데 과정 자체를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두려워한다고 해서 더 부드럽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을 받아들인 만큼 떼어내는 것도 그만큼 대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겨내야 한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육체적으로는 결별해도 정신적인 부분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으면 고통은 계속된다.  정신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이 사랑했을수록 후유증도 크다. 깊이 삼킬수록 꺼내기 힘든 생선가시처럼 말이다. 아프다는 것은 그만큼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했다는 얘기이다. 완전히 하나가 되었던 사랑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바깥으로 나오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아픈 것이다. 


 가끔 보면 이별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인 사람들이 있다.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내가 소극적일수록 상대방도 소극적이 되고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들이 날아가버린다.


 사랑에 대해서는 솔직한 것이 최선이다. 감정에 솔직하자. 이별을 통해 많이 배웠고 성숙해졌지 않은가? 용감하게 뛰어들고 또 상처 받자. 그래서 그 상처까지 치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아픈 것을 두려워하다가는 영원히 자전거를 배울 수 없다. 


 인간은 상처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치유할 수 있는 능력 또한 가지고 있다. 패닉 상태가 되더라도 언젠가 평온이 찾아온다. 거짓말처럼 밥도 다시 먹게 되고 언제 그랬냐 싶게 밖에 나가고 싶어 진다.

 아픔을 당당히 인정하되 그 시간을 너무 길게 가지지는 말자. 이별이 온전히 내 책임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잘못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의도와 다른 결과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고 외부의 환경이 나의 힘보다 클 수 있다. 이별이라는 현실보다 당신이 온전히 그(그녀)를 사랑했고 그 속에서 행복감을 느꼈는지가 중요하다. 


 이별은 노력에 따라 확률을 줄이거나 유연하게 지나갈 수는 있지만 피할 수는 없다. 그 어떤 노력에도 당신보다 월등히 큰 힘 때문에 이별이 다가올 수 있다. 그 힘이 무엇이든 이별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충분히 아파한 후에는 자신으로 돌아오기 바란다. 사랑하기 전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워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별 후 닮은 사람이 보이는 증상은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마음속에 완전히 그 사람을 떨쳐내지 못한 경우에 나타난다. 당신이 최근 가장 많이 집중해서 본 얼굴이 사랑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얼굴의 특징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 사람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세련된 느낌의 사람도 있고 차가운 느낌이나 편안한 느낌의 사람도 있다. 이런 특유의 분위기를 감지했을 때 우리는 착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 풍기는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고 아주 작은 부분이 비슷한 사람도 마치 전체가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람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많이 있다. 머리 모양만으로도 그럴 수 있고 키나 눈매에서 그런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눈으로 보게 될 때 마음속에 가라앉은 감정들이 갑자기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고 두려움 혹은 반가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이별한 사람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서로를 아는 척하게 될까? 알아보기는 할까? 당신은 어떤가? 내 경우만 보면 아는 척하기는 힘들 것 같고 설사 그쪽이 아는 척하더라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를 것 같다. 도망치는 쪽이 내 성격에 가깝다.


 사람 성격마다 다르겠지만 상처는 치유돼도 흉터는 남는다. 즉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아도 건드리면 아픔이 느껴진다. 헤어질 때만큼 아프지는 않지만 마치 "여기에 상처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특정한 곳이 아파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마주치더라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호쾌하게 악수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물어본 뒤 쿨하게 갈 길을 갈 수도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 자기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가 있고 자기한테 맞는 방식이 있을 뿐이다.


 이별한 상대에 대해 꿈을 꾸는 사람도 있다. 프로이트는 꿈이 무의식에 기반한 것으로 봤는데 그 이론으로 분석하자면 헤어진 사람에 대한 꿈을 꾸는 것은 무의식에 남아있는 그 사람의 흔적 때문이다. 무의식에서 아직도 당신이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만 무의식에서는 아직도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 속 기억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죽을 때까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보통은 기억이 사라짐과 동시에 무의식에서도 사라지는데 그 사람이 남기고 간 흔적이 크다면 무의식에서 잘 사라지지 않고 지우려는 노력 자체가 그 사람을 자꾸 떠올리게 만든다.

 무의식은 우리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 몸과 마음을 방어한다. 그 사람으로 인해 고통스럽다면 무의식은 그것을 잊기 위해 자체 프로세스를 가동한다. 가상의 내가 등장해 그 사람에게 시원하게 쏘아붙일 수도 있고 헤어지는 장면만 기억나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무의식에서 그 사람이 사라지는 건 아니므로 완전히 그를 잊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이 바로 서야 한다. 이것은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스스로 설 수 없으면 자꾸 상대방이 기억나고 의지하고 싶어 진다.



 나라는 존재는 고귀한 존재이다. 세상 사람에게 상처 받고 의기소침해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자존감을 잃으면 영원히 실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하고 나를 아끼는 것이 실연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깨진 사랑 때문에 자책하거나 원망하면서 나를 무너뜨리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바로 서면 더 먼 곳을 볼 수 있고 세상에는 더 좋은 사람과 많은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에게 얼마든지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고통을 자학으로 잊으려는 시도만 하지 말기 바란다.


 통상적으로 꿈은 깊은 잠이 아닌 얕은 잠에서 생긴다. 이별의 고통이 큰 경우 수면을 이루기 어렵기 때문에 꿈을 꿀 확률도 그만큼 높아진다. 그 꿈속에서 나오는 장면들이야 뻔한 것이다.

 그래서 나를 먼저 사랑하라는 것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내가 바로 서면 그런 증상들이 저절로 사라진다. 나는 또 다른 사랑을 해야 하고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실연이라는 고통이 아무리 깊어도 내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내가 바로 서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무의식은 어쩔 수 없이 나를 따라올 것이다. 무의식은 조금 불친절하긴 하지만 언제나 나를 걱정하고 있다. 오늘도 실연 속에서 아파하고 있다면 일단 나를 생각해보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든 술만 퍼마시고 있든 며칠 동안 굶었든 상관없다. 나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있는지 먼저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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