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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르히아이스 Oct 30. 2018

10. 이별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별하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는 사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본능적으로 하는 사랑을 뭘 알고 모르고 할 게 있냐고 물을 지도 모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 인생의 최소 절반 이상인데 우리는 사랑을 너무 소홀히 생각한다. 정말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성공한 사람이 사랑에는 어이없이 실패하여 인생을 망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세계적인 팝스타, 유명한 방송인, 최고의 석학도 사랑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지곤 한다. 


 사랑이 무너지면 아무리 일(Job)에서 성공해도 인생이 행복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사랑도 배워야 한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는데 교과과정에 사랑이라는 과목이 있었으면 좋겠다. 초등학교에서 부터 가르치면 어떨까 싶다. 우리가 태어나 어떤 사람과 만나 결혼할 때까지 한 번이라도 사랑이 무언지, 사랑은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을까? 마음에 드는 사람을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지, 그 사람을 어떻게 만족시킬지만 생각하는 게 고작이지 않은가?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배우는 것이 학교라면 당연히 사랑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 사랑은 인생에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사랑에 대해 무식하면 사랑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어있다. 무릎 높이의 허들도 넘지 못해 넘어지게 되어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랑을 소홀히 생각한다. 외모와 능력만 키우면 사랑도 자연스럽게 성공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랑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가끔 사람을 만나다 보면 아직도 어린아이 수준의 사랑 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된다. 오로지 받기만을 원하고 상대방을 독점하려 드는 그런 유아적 수준의 사랑 말이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을 독차지하려 한다. 그 대상이 기쁜지 슬픈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내 욕구를 채우는데만 관심이 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수준에 머무른다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랑의 문제가 여기서 시작된다. 사랑 무식꾼들이 너무 많다. 사랑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철학적 관점에서 그것을 고찰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이해의 폭을 넓힐 수는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번 장의 주제가 바로 이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는 경우도 있다. 폭력을 행사하거나 자해,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그토록 아름다운 사랑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 뉴스에 헤어지자는 연인을 폭행한 사람들을 욕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사랑이 왜 그 모습이 되었는지 생각해본 사람은 별로 없다.


 폭력은 남을 향한 것이든 나를 향한 것이든 나쁘다. 여기서는 왜 그런 상황으로 연결되는지, 예방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 알아보겠다. 


 이별이 주는 충격과 의미는 다른 장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어쨌거나 이별통보라는 게 듣는 사람이 기분 좋을 리는 없다. 납득이 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별을 하자고 하는 쪽의 설명이나 태도가 너무 냉정하거나 비열할 경우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런 상황은 금방 분노로 이어진다. 보통은 분노를 속으로 삭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보자. 우선 외부적인 이유일 경우이다. 이것은 이별통보 방식, 태도에 관한 문제이거나 상황적인 문제이다. 앞서 이 책에서는 이별통보 시 배려 법칙을 세 가지 설명했다. 1. 사실대로 말하라. 2. 이별을 사전 감지할 수 있도록 표현하고 만회할 기회를 주어라. 3. 상대방이 가장 힘든 시기는 피해라. 



 이것만 지켜도 외부적인 이유로 분노가 한계치를 넘어갈 일은 많이 줄어든다. 물론 개인의 성격 탓이거나 한계치가 매우 낮은 경우는 예외로 한다. 이별은 이별을 통보하는 사람에게 주도권과 선택권이 있다. 어떤 방식으로 이별을 할지는 통보자가 선택한다. 별 고민도 없이 내키는 데로 툭 지르거나 정을 떼기 위해 일부러 심한 말로 이별하려고 하면 어떤 사태가 올지 장담할 수 없다.

이별 시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이유

 이별을 통보하는 사람은 이별하면 끝이지만 이별을 통보받는 사람은 충격과 상처밖에 남는 게 없다. 아무리 좋게 이별해도 어쨌든 이별 ‘당하는’ 것은 기분 좋을 리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별 통보자가 조금만 배려해준다면 그나마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좀 더 상세하게 알아보자.


1. 자존심을 건드릴 때

 먼저, 이별을 통보할 때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경우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이별 통보할 때는 절대 여성적인 면을 건드리면 안 된다. 여성적 매력에 관해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너는 남자에게 하나도 매력이 없어”, “네가 여자로 보이지 않아.” 이런 것은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여성으로서의 존엄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여자가 남자에게 이별 통보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넌 너무 능력이 없어. 나한테 해준 게 뭐야?”, ”넌 여자를 너무 몰라”, ”넌 남자답지 못해”등이 그런 말들이다. 


 이런 말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성에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남성 혹은 여성으로서의 자존감이 있는데 그것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남녀의 존재감을 상실하게 만드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 성인의 사랑은 성적으로 연결된 관계인데 한쪽이 다른 쪽의 성을 부정해버리면 그 사람은 성적인 낙오자가 되어버린다.


 원래 성격이 이별 같은 충격을 감당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사람은 저마다 감당할 수 있는 충격의 한계치가 있다. 얇은 유리컵 같은 사람에게 이별통보는 예의를 갖추어도 가혹할 수 있다. 그 컵이 깨지는 순간 정신은 분열되고 더 이상 본래의 그 사람이 아니게 된다. 아무리 온순한 사람도 이때에는 분노의 폭풍에 휩싸이게 된다.


2. 성격적인 이유

 사랑의 관성적 성질도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노를 일으키는 데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귀고 있는 사람에게 이별통보를 했다고 할 때 상대방이 그것을 듣자마자 자기도 사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도 관성이 있어서 바로 멈출 수가 없다. 비록 상대방은 이별통보를 했어도 나는 아직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을 수 있다. 나는 아직 사랑의 크기가 그대로인데 상대방이 갑자기 남처럼 군다면 충격은 커지고 이성적인 사람도 분노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사랑과 분노는 성격이 비슷하다. 그 방향만 반대일 뿐이다. 사랑은 분노로 곧바로 전환될 수 있다. 사랑한 만큼 분노는 커지고 사랑이 분노의 연료가 되어 활활 타오르게 된다.


 세상에는 이별통보를 받고도 이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별은 고통스럽고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 상대방의 이별통보 태도이다. 물론 이별 통보를 받은 쪽도 상대방의 생각 변화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것은 맞다. 사랑은 양방향이고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상대방이 내가 아닌 다른 길을 택했다면 어쨌거나 결국엔 받아들여야 한다. 강제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별통보를 듣고 방향을 잃은 내 사랑을 최대한 상처 나지 않게 접어야 한다. 비행기 연료가 떨어졌지만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부드럽게 착륙해야 하는 것이 이별통보받은 사람이 할 일이다. 강제로 상대방을 붙잡아둔다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3. 지나친 소유욕

 성격적인 측면에서 자기뜻에 반대되는 것을 못 받아들이거나 지나친 소유욕으로 상대방을 포기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커플은 남자가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자 친구의 폰에 있는 남자 전화번호를 허락도 없이 지워버렸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전화를 받지 않으면 화를 냈다.


 어린 커플이어서 철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정도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여자 쪽에 그런 게 싫으면 왜 헤어지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그녀의 대답은 '무서워서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남자의 카리스마 혹은 길들이기가 얼마나 그녀를 지배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남녀가 모두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사랑은 양방향이고 동등한 두 사람의 결합이다. 두 사람이 각자 자기 인생을 살면서 서로를 도와주는 게 사랑이다. 사랑하고 있어도 두 개의 인생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다른 쪽으로 합치는 게 사랑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사라지는 것은 인격의 소멸을 뜻한다. 즉 인격으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란 얘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까워지면 남의 인생을 완전히 자신과 합쳐버리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다. 이런 면에서는 서구 유럽의 개인주의 사상을 배울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희생이 강요돼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은 행복을 위해 서로 양보하고 배려할 수 있지만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한국에서는 결혼 이후 부부가 거의 자웅동체 같은 모습이 된다. 서로 사생활도 없고 더 이상 비밀도 없다. 육아에 지치고 처가, 시가 살이에 지쳐 서로를 돌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 아이를 키우거나 5년 차 이상 넘어가면서 서로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잃게 된다. 마치 육아 동업자 같이 보인다. 이것은 서로를 자신의 일상으로 끌어들여 완전히 합쳐버린 결과이다.


 남자의 사랑은 호기심과 성적 욕구가 출발점이다. 여자의 사랑은 동경이 출발점이다. 자웅동체에서 남자는 호기심이 사라지고 여자는 동경이 사라진다. 그 상황에서 일상이 조금만 힘들어도 사랑은 동력을 잃고 추락하고 만다. 서로를 존중하고 그 사람의 일상과 생각, 사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이 사랑을 더 강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랑하기 전에는 잘하면서도 사랑하고 나서는 잘 못한다.


이별을 받아들이는 법

 상대방이 이별을 통보했다면 화는 나겠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상대방의 이별 의지는 못 받아들이면서 내 사랑 의지는 받아달라는 것도 모순이다. 조그만 일이 틀어져도 그게 분노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평소 사귀면서 이런 면을 보았다면 헤어지는 게 겁날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간다'면 말이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이런 사람을 피하지 않는 이상 이별할 때 한 번은 겪어야 되는 상황이다. 대신 앞에서 말한 이별통보 3원칙을 지키면서 사랑을 연착륙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당신도 사랑에 대한 노력을 줄이고 그 사람도 노력을 줄이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은 분명히 눈치채고 물어볼 것이다. 그때 불만을 얘기해라. 아마도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고쳐질 일이면 당신이 이별까지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력을 줄이고 사랑도 그만큼 줄여라. 그렇게 연착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신호를 이미 여러 차례 받았기 때문에 이별통보를 해도 사랑을 분노로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비정상적인 사람이 있어 그것조차 못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로부터도 비난받지 않을 만큼 당신이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이별 때문에 자살까지 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왕 이별을 배우고 있으니 자살에 관한 이야기를 꼭 해보자. 여기서는 자살, 자해가 모두 포함된다. 사람들은 자살할 용기로 살라고 하지만 자살은 용기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매너 없는 이별통보 때문에 자살충동이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럴 때 이것만 생각해보자.


 '자살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하루만 더 살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 


 얼마 전 동내 공원에서 산책하다가 분수대가 있는 연못에 물을 빼서 바닥이 말라있는 것을 보았다. 난간에 기대어 돌무더기가 깔린 연못 바닥을 보는데 거기에 뭔가 꼼지락 거리는 게 보였다. 그것은 작은 물고기였다. 그 물고기는 곧 말라죽었다. 그런데 그 물고기와 가장 가까운 물 웅덩이의 거리가 30cm도 안되었다. 그 물고기는 아마 그렇게 가까이에 물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만 몸을 꿈틀거려도 닿을 거리였다.


 그걸 보면서 우리 인생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 만큼 힘든 이 순간 정말 출구가 가까이 와 있지 않을까?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이 이별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러나 하루만 더 살아보면 조금 생각이 바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 아직 끝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것이다.


 이 순간 끝난 것은 내가 하고 있던 사랑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또 다른 사람과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며 거짓말처럼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사랑이든 삶이든 실패하면서 더 완벽해져 간다. 그렇게 멀리서 우리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안목을 배우면서 어른이 되어간다.


 이별에 무덤덤할 수는 없겠지만 큰 나무처럼 중심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자. 이별을 통보할 때도 상대방이 이겨낼 수 있도록 매너를 지키자. 문자 한 통으로 이별통보를 받아들일 순 없다!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도 철학이고 가치관이다. 잘 만나듯이 잘 이별할 수 있도록 내 인격을 길러야 한다. 


 제대로 이별하지 못한 사람들을 남겨둘수록 당신의 인생은 미완성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있다. 남에게 함부로 대하면 결국 어느 순간 당신이 그런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올 때 감사했다면 사랑을 스스로 포기해야 될 때도 감사해야 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대의 배려를 하는 것이 당신이 할 일이다. 


 그렇게 한다면 이 세상에서 이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없어질 것이다. 더 이상 슬픈 악몽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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