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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르히아이스 Nov 08. 2018

11. 세계의 사랑

세계의 사랑

 전 세계를 떠돌며 살아보는 것은 어쩌면 큰 꿈일 것이다. 서구 유럽의 사람들은 국경이 인접해 있고 워낙 많은 나라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돌아다닌다는 것도 굉장히 익숙하고 다른 나라에 가서 사는 것도 별로 특이할 게 없는 일인데 아시아에서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세계를 모두 경험해보지 못하고 세계의 사랑을 논하는 것은 다소 건방지지만 앞으로 개정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이번장 주제로 다뤄보고자 한다.


 먼저 서양의 사랑에 대해 말해보자. 미국이나 유럽이나 문화적 뿌리는 비슷한데 사랑이라는 개념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서구의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개인의 행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 이외의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나의 행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나의 행복을 기초로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사랑을 꿈꾼다는 것이다. 


 인간사회는 문명이 발전할수록 개인주의 성향이 짙어진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선진국은 개인주의가 발전해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서구야 당연하지만 옆 나라 일본만 봐도 매우 개인주의적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나는 개인 가치의 발달이 인간사회의 발달 과정이라고 본다. 의식주가 해결되는 것만으로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 그 이상을 원한다. 그게 뭘까? 바로 자유다. 자유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행복과 연결된다. 즉 자유는 개인주의와 연결된다.


 유럽, 미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고도의 개인주의는 일각에서 생각하듯이 '나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에 적용되면 매우 큰 시너지 효과를 낸다.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요즘엔 출산이 사회적인 것이라 하여 국가에서 결혼을 장려하고 개인의 사랑에도 매우 간섭하고 있는데 이는 좋은 현상이 아니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개인(성인) 간의 사랑은 국가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그 안에서 사랑이 아닌 폭력, 착취가 발생할 때만 국가가 개입하면 된다. 개인이 최대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이것이 자유주의의 출발이고 개개인의 행복이 조금이라도 보장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 동서양이 정말 대조적이다. 서양에서는 이미 젊은 나이에 청년들이 집을 떠나 독립해있고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결혼 전까지 집에서 원조를 받는 우리네 문화와는 많이 다르다. 나는 이런 우리 문화가 계속 청년들을 어린아이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일찍 독립할수록 독립적인 자아가 생긴다. 10대도 마찬가지이다.

 서양 청년들이 독립해 있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할 때 우리처럼 인생 최대의 돈을 쏟아붓고 빚더미 위에서 시작하진 않는다. 나는 우리나라의 지금 결혼문화가 향후 10~15년 뒤에는 사라질 문화라고 본다. 하지만 아직도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만약 그때 내 말이 맞는다면 이 대목을 다시 찾아봐주기 바란다.


 얼마 전 청년들이 결혼 못하는 이유가 집 때문이란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사랑은 두 사람의 만남이고 두 사람이 중심이 돼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 결혼은 현실이고 집안끼리의 만남이라는 케케묵은 반론이 나올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행복하면 나머지는 수긍하게 만들 수 있다. 외부의 문제 때문에 중심이 돼야 할 사람들이 힘들다면 말이 되는가?


 서양에서는 한쪽이 살던 집에 한쪽이 합치거나 조금 큰 집을 빌려 합친다. 그게 전부다. 결혼식을 하지만 수백 명을 불러서 잔치를 하지는 않는다. 요즘 부부들을 만나보면 내심은 이런 큰 결혼식 하기 싫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모와 친척들, 보는 눈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이해는 간다.


 그런데 그것도 적당히 해야지 집, 혼수 이런 문제 때문에 서로 다투고 큰 빚 때문에 결혼 이후부터 내리막을 타는 인생그래프를 그려서야 되겠는가? 우리나라 대부분의 커플이 결혼에서 인생의 정점을 찍고 그다음부터 내리막으로 간다. 왜? 돈과 정력을 모두 써버렸으니까. 여기에 아이까지 있으면 거기에 또 돈과 정열을 쏟아야 하므로 두 사람은 더 멀어진다. 


 결혼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다루므로 여기서는 더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결혼이 인생의 목표도 결승점도 아니란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결혼을 통해 더 행복해져야 한다. 그런 결혼이 아니라면 할 필요가 없다. 결혼은 형식이다. 중요한 형식이긴 해도 결국 형식이다. 형식이 너무 커서 내면을 뭉게 버리면 안 된다. 


 예전에 프랑스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서 밤늦게 들어온 남편이 아이방에서 아내와 아들이 같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본다. 우리 문화였으면 당연히 남편은 혼자 방에 가서 자는 것으로 끝날 텐데 영화에서는 남편이 굳이 자고 있는 아내를 안아서 안방으로 데려가 눕힌다. 아이는 혼자 잔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했다가는 등짝 스매싱을 맞을 일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가 1순위이니까.


 하지만 나는 이 장면을 보고 문화적 쇼크를 느꼈다. 아무리 자식이고 가족이라도 결국 별개의 개체이다. 가족은 한집에 살면서 공동체이지만 개인으로 볼 때는 각자 삶을 사는 것이다. 각자 행복을 추구해야 된다는 것이다. 부부는 부부의 삶이 있다. 그것이 온전하게 보전될 때 아이도 행복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개인주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주의 사상이 서양보다 100년 이상 늦어진 동양에서는 아직도 관계가 사랑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서구도 중세시대에는 매우 사회적인 사랑이 강했다.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에 걸맞은 사람과 사랑을 해야 했다. 물론 귀족이 아닌 평민들의 삶은 다소 달랐지만 평민들은 여러 가지로 구속을 받는 처지에 있었다. 영주나 땅의 주인으로부터 인신구속까지 받는 처지에서 개인의 행복을 논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현대사회로 넘어와서도 아직 전통적인 보수 관념이 남아있던 1950년대까지는 남녀의 역할이 구분되어있었고 자유로운 만남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물질이 풍요해지면서 생활은 자연스럽게 개인주의로 향하기 시작했다. 미디어의 발달은 이를 촉진시켰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대부분 경제개발이 늦게 이뤄져서 아직도 이런 문화가 낯설다. 일본 사람과 연애를 했던 한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인은 의외로 냉정하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화를 자주 안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연인이 되면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문자 하느라 밤이 새는데 일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냉정해서가 아니다. 우리처럼 완전히 한쪽을 소유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서로가 동등한 객체로서 사랑하는 사이일 때 각자의 사생활은 보장되야하는 것이다. 뜨겁고 격렬한 사랑도 있지만 잔잔하고 오래가는 사랑도 있다. 개인주의적 사랑은 후자에 가깝다. 상대를 완전히 나의 사생활 안에 집어넣고 비밀이 한 개도 남지 않을 때까지 파고드는 게 사랑은 아니란 것이다.


 미국도 1950년대까지는 아무래도 기성세대의 힘이 강했지만 월남전을 지나면서 반전 의식을 통해 보수적인 관념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반항이라는 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갈구하면서 히피족이 나타나고 전후 경제성장에 기반한 신세대들의 보다 진보된 생각들이 사회 전반의 혁신을 불러오던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미국의 전성기였다. 유럽도 이 시기 냉전의 울타리는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재도약을 시도하는 시기였고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점차 사랑의 개념도 자유화되는 물결을 탔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실용적인 생각에 더 가치를 두도록 했다. 즉 예의나 전통에 가치를 두던 이전 세대와 달리 무엇이 더 행복한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솔직하게 답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나고 육체노동에서 점차 해방되게 했기 때문에 더더욱 자유를 추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수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적 풍요도 반드시 필요하다.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사회, 문화적 풍요기는 서구 유럽의 문화,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젊은 세대들에게 개인의 행복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서구의 이런 문화적 변화는 아시아 국가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문화의 발전이 이런 단계를 밟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육체의 노동에서 점차 해방되고 생각의 자유, 경제적 풍요를 얻으면서 결국의 개인의 행복을 찾아간다는 것은 기본적인 공식으로 생각된다. 


 동양에서는 서구의 영향을 받아 1980년대 이후로 개인주의가 점차 확산되었다. 한국에서 기성세대의 권한이 약해진 것은 90년대부터이다. 자녀수가 줄어듬에 따라 점차 가정에서 자녀의 가치가 커지고 부모세대도 가부장적, 권위주의적 생각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유교사상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집안 대 집안이 만나는 결혼은 여전히 젊은 사람들을 괴롭힌다. 신혼부부를 위해 아파트를 공급하는 국가정책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집이 없어 결혼을 못하는 것은 왜일까?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런 충고를 준다. "결혼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라" 무슨 뜻이냐면 사람들이 결혼에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결혼이 과정이 아니라 목적이 되고 결혼을 이후의 삶에 신경 쓰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결혼이 제도로써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결혼제도에 반대하는 부류는 아니다. 결혼은 제도로써 충분히 의미가 있다. 결혼제도가 생겨난 것부터가 필요에 의해서이다. 생각해보면 전 세계 문명이 닿지 않는 곳까지 포함해도 인간이 사는 곳에는 항상 결혼이라는 제도가 존재한다. 일부다처 제도가 있긴 해도 결혼이라는 형식 없이 원숭이처럼 한 무리에 한 마리 수컷이 수십 마리 암컷을 지배는 구조는 아니다.


 그렇다면 결혼은 어떤 의미일까? 동서양의 사랑을 말하는 주제에서 다소 벗어나긴 했어도 중요하니까 짚고 넘어가자. 결혼은 형식상으로, 법적으로 두 사람에게 책임을 부여한다. 결혼은 쉬워도 이혼은 법정까지 가야 한다. 이것은 자녀와 재산 등 복잡한 문제가 수반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두 사람에게 서로에 대한 중대한 의무를 지우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리적인 의미도 큰데 이렇게 생각해보자. 여자가 병원에 큰 사고로 입원해 있다. 위급한 상황이다. 여자의 가족은 급히 병원으로 왔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돌보는 사람이 남편이 있는 것과 남자 친구가 있는 것. 어떤 것이 더 안정감을 주는가? 굳이 법적 책임을 들먹이지 않아도 누가 봐도 심리적으로 남편에게 큰 무게감이 간다. 이것은 제도가 가져다주는 큰 혜택이자 효과이다.

 하지만 결혼의 이런 효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결혼은 과정이다.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자리잡지 못한 동양, 후진국에서는 아직도 결혼의 의미가 너무 크다. 결혼에 모든 돈을 쏟아붓고 출발할 때 모든 것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풍요하지 않았던 세대에서는 정도가 덜했는데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다.


 집을 못 갖추어도, 혼수가 없어도 결혼한 당신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 별개의 생활을 하다가 이제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제부터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는 당신들 각자에게 있다. 지금 갖추어진 것에 좌우되는 게 아니란 얘기다. 내 인생의 행복은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다. 부잣집 아들, 딸과 결혼하다고 해서 혹은 나보다 잘난 사람과 결혼한다고 해서 보장되는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는 에히리프롬이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얘기했던 '주는 사랑'이 맞는 측면도 있다. 결혼으로 뭘 얻으려 생각하기 전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우리들의 사랑도 더 가벼워질 것이고 신혼부부 아파트 특별공급 따위는 없어도 되는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원시부족 국가에서도 남성이 모든 여성을 독점하지는 않았다. 물론 남성이 권력을 가지고 여성을 가지려 노력했던 것은 맞다. 다수의 여성을 소유했던 것도 맞다. 그렇지만 원천적으로 다른 남성이 2세를 가지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동물과 달리 사회생활을 했던 인간은 혼자서는 절대로 큰 힘을 가지기 힘들었기 때문 일 수도 있다.


 사랑은 두 사람이 일단 먼저다. 서양과 동양의 구분도 필요 없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부터 생각하자.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괴테의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보면 정말 일편단심의 순수한 사랑이 잘 나와있는데 그 옛날에 서양도 그런 면이 있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나를 먼저 생각하지 않게 된다. 어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옛날에는 정말 상사병에 걸려 앓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인류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훑어보면 사랑도 사상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집단속의 사랑에서 개인의 사랑으로 발전해왔다. 우리는 개인의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많은 제약이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공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참 다행이지만 시대는 더욱 변화해야 한다. 특히 한국은 아직도 갈길이 멀다.


 남을 의식하고 뭔가 덕 보려고 하는 자세에서 내 행복을 우선하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자세로 바뀌어야 한다. 언제나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집 없어서 결혼 못한다는 얘기를 언제까지 들어야 할까? 혼수가 왜 필요한 것인가? 결혼하기 전에는 TV를 보지 않았나? 세탁기가 없었나? 이 책을 읽은 조금이라도 깨어있는 여러분이 그런 고정관념과 낡은 폐습을 용감하게 깨줄 것으로 믿는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사상에서 앞으로 우리가 더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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