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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르히아이스 Nov 20. 2018

12. 사랑의 역할

사랑의 역할

 이번 주제에서 다뤄볼 것은 사랑 속 역할이다. 사랑은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성립되는 것이다.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실의 사랑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한 가지 역할에 고정되기 십상이다. 이런 식의 사랑은 설렘보다는 일상생활처럼 습관화되기 쉽고 곧 따분하게 느껴진다. 물론 생명력도 그만큼 짧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설사 사랑을 받고 있고 더할 나위 없이 안정적이라 할 지라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랑은 항상 양방향으로 교류해야 하고 양쪽이 함께 즐거워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 항상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다. 추구하는 방향이 도덕적으로 선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랑이라는 변화무쌍한 감정을 다소나마 안정되고 길게 가져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권하는 것이다.


사랑에서 역할의 종류

 사랑에는 어떤 역할이 있을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사랑을 주도하는 역할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보폭이 같으면 좋겠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지가 않다. 큰 발걸음으로 앞서가는 사람이 있고 조심스럽게 뒤따라가는 사람이 있다. 경험차나 가치관의 차이가 이런 역할을 차이를 낳는다.


 사랑은 주는 역할과 받는 역할이 있다. 이 역할이 균형을 잃어 주는 사람은 항상 주고받는 사람은 계속 받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두 사람만 만족한다면 뭐라고 할 순 없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사랑이 진행되면 사랑은 역동성이 떨어져 돌처럼 굳어져간다. 매일 받는 사랑에 감동을 느끼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주는 것에 익숙한 사람도 언젠가는 공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무한히 솟아나는 사랑은 부모의 사랑밖에 없다. 연인 간에는 언젠가 이것이 문제의 소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가끔 "쟤는 저런 애야"라는 식으로 어떤 사람을 쉽게 정의 내린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고정관념이 크게 자리 잡는데 그래서 나이 들면 친해지기가 어려운 것 같다. 인간은 다면적이다. 순한 강아지와 포악한 호랑이가 공존하는 게 인간의 정신세계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이중성은 가지고 있다. 이런 이중성이 바로 한쪽 역할에 머무는 것을 불만족스럽게 만든다.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이 안정적이라도 현재의 역할에 만족하지 말고 초심을 되새겨야 한다.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시절, 서로 조심스럽게 상대방의 눈치를 보던 시절 그때를 생각해야 한다. 사랑이란 안정권에 들 때 비로소 쇠퇴하기 시작한다. 노 젓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할이 고정되면 언젠가 충돌이 올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집안에서 청소를 해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계속 어지르고 어떤 사람은 계속 치운다면 치우는 사람이 성격이 좋아서 당장 화를 안 낼 순 있겠지만 그게 쌓이다 보면 불만이 될 수 있다.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이 만만해 보여도 그러려니 하고 팔짱을 끼고 있다 보면 어느새 그 사람도 지쳐서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사랑에서 남녀의 역할

  사랑의 역할을 남녀로 구분해서 얘기해보자. 사랑에서 남녀의 역할은 어떤 모습으로 가야 사랑을 오래 유지할 수 있게 해 줄까? 전통적으로는 남성이 고백하고 표현하고 여성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동물들도 대부분 그렇게 한다. 그렇지만 이런 케케묵은 역할이 사랑을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아주 예쁜 여성이 있다고 하자. 그녀는 유명 미인대회 수상자이고 CF스타이다. 이 여성의 사랑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까 실패할 가능성이 높을까? 우선 무엇이 성공인가를 정의해야 하는데 원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오랫동안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해보자. 답부터 말하자면 실패의 확률이 높다. 


 왜 그럴까? 외모가 우월하면 원하는 사람과 사랑하고 성공의 확률도 높은 게 아닌가? 그럴 것 같지만 아닌 이유가 있다. 일단 뛰어난 외모의 여성이 선택권을 가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고전적인 여성의 역할에 빠져있다면 이 여성은 고백하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수많은 남성의 구애가 쏟아질 것이다. 고백한 남성들 중에 여성이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여성은 결국 고백을 받아들이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 끝은?


 일단 이 여성에게 고백하는 남성들 중 출중한 외모와 말솜씨 그리고 하나라도 더 나은 배경을 가진 사람이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당연히 예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승자라는 것이 대체로 성실한 인품의 소유자보다는 연애기술과 말솜씨, 순발력이 좋은 남자일 가능성이 높다. 애당초 자기 일에 성실한 남자치고 화려한 말솜씨와 연애기술을 보유한 사람은 별로 없다. 


 이건 당연한 이야기이다. 자기 일에 매진하는 사람이 연애를 그렇게 고단수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 중에 화려한 스펙과 재산에도 불구하고 늦은 나이에 결혼도 하지 못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보면 십중팔구 조용한 성격에 부끄럼을 많이 타고 자기 할 일만 묵묵히 하는 스타일의 남자들이다. 여성들은 이런 남자들에게 센스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패션, 유머, 연애 센스가 말이다.


 뛰어난 외모의 여성이라도 사랑을 이루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남성의 구애를 통해 선택권은 넓어지지만 어차피 고백받은 것 중에 선택할 뿐이고 그 고백한 사람 중에 좋은 남성은 숨어 있으며 화려한 연애고수들 때문에 잘 보이지가 않는다. 잘못 고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애초에 여성이 직접 선택하고 다가갔다면 쉽게 보였을 것이다. 그 사람은 항상 당신 주변에 있으니까 말이다. 


 세상 모든 걸 줄 것처럼 말하는 남자들이 많고 그런 남자들이 여성을 차지하긴 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거짓말이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감추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성실하고 선한 사람은 부족한 게 많아 보일 수밖에 없다. 포장하지 않으니까. 마치 먹이를 향해 접근하는 맹수처럼 속이고 위장하라고 본능에서 지시하는 게 남성이다.

 아름다운 여성일수록 남자들에게 더 높은 도전 목표가 되므로 연애에 능숙한 남자가 접근하게 마련이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평균적인 연애를 하는 사람이 이런 도전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결국 선택된 남자는 연애에 매우 밝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면 주는 역할을 할 남자는 아니게 된다.


 연애에 밝은 남자는 여자에게 위험하다. 왜냐하면 한 여자를 바라보는 비중 자체가 작기 때문이다. 헤어지는 것에도 익숙하고 다른 여자를 새로 사귀는 데도 능숙하다. 그리고 연애를 효율적으로 할 줄 안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낸다. 여자의 마음을 일찍 눈치채고 한수 앞서 여자를 조종할 줄도 안다. 이런 남자와 만나서 여자가 행복하다고 착각할 수는 있으나 진실한 행복일지는 미지수이다.


 결국 여성은 남성의 고백을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고백한 사람들 가운데 선택해야 하므로 인성, 능력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과감성과 연애기술에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적인 남녀의 역할에 빠져있는 것은 위험하다. 필요하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내가 원하는 남자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먼저 선택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서로의 자존심을 내려놓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편, 능력 있고 잘생긴 남성은 조금 입장이 다르다. 전통적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잘생겨도 남자가 고백을 해야 한다. 그래서 고백 들어온 것 중에 선택하는 것보다 선택폭이 훨씬 넓고 연애 고수에 당할 확률은 좀 낮은 편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여성에게 연애의 기술 중 한 가지로 '고백을 하게 만드는 기술'이 있다는 것이다. 본모습을 숨기고 남성의 판타지를 자극해   자신에게 오도록 만드는 기술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기술은 남성의 소위 ‘말발'을 기본으로 하는 연애기술에 비해 매우 고단수 여성에게만 존재하는 것이라 그리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서양보다는 동양의 여성들에게 사랑의 전통적 역할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얌전하게 있으라는 유교적, 보수적 세계관에 매몰되지 말고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행동하는 사람만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동물들처럼 수컷이 하는 쇼를 보고 선택하면 당할 확률이 높다. 동물은 사기를 안치지만 인간은 사기를 친다.

 여성들은 남성이 고백하는 것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는데 남성들이 다 그렇게 되바라지고 말 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남성들이 그 과정을 힘들게 생각한다. 그래서 소수의 남성들이 많은 연애경험을 가지게 되어 부익부 빈익빈 연애라는 말이 나온다. 소수의 바람둥이 남성들이 다수의 여성들을 독점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계로 내보지 않았지만 사실일 것이다. 강자가 약자의 여성도 빼앗는 게 현실이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말 잘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에 속아서는 안된다. 여성을 잘 이해하는 게 아니라 경험이 많아 잘 아는 것이고 잘 알기 때문에 당신을 잘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것이다. 연애고수 남성들은 거짓말을 잘한다. 이것도 연애의 경험을 통해 증진된다. 말발 센 남성 중에 거짓말 못하는 사람은 없다. 여성들은 여기에 속아 낭패를 겪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동서양이 공통이다.


 사랑은 남녀의 약간 다른 역할이 조화를 이룬다. 남자는 이상주의적이며 미래, 과정, 전체를 보는 데 집중한다. 여성은 현실주의적이며 현재, 결과, 디테일에 집중한다. 이런 차이는 유전자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고대로부터 오랫동안 학습된 것일 수도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둘 모두 맞는 얘기인 것 같다. 고대에 인간은 사냥하는 남자와 육아를 담당하는 여자로 나누어졌다. 남자들은 사냥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더 쉽고 빠르게 사냥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 보통 남자들은 서열이 나눠지는데 더 높은 서열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사냥, 싸움 기술을 연구해야 했다.


 여성에게는 육아와 부족의 소일거리가 맡겨졌다. 이것은 당장 해야 할 일이며 결과가 중요했다. 지금 당장 먹기 위해 요리하고 태어난 아이의 육아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육아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보호가 필요했다. 그래서 남성과 협력하게 되었다.


 이런 주장은 '진화론적 심리학’에서 나온 것으로 이 이론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아니라고 본다. 남녀가 본능적으로 그런 성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그러나 인간이 환경에 완전히 좌우되는 동물이 아니고 개인의 가치관, 심리, 의지가 워낙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모든 사안에 이 이론을 적용할 수는 없다. 이 책의 주장도 가이드일 뿐 절대 진리는 아니다.

행복을 위한 사랑의 역할

 그렇다면 사랑의 역할이 어때야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초입부에 조금 언급하긴 했지만 결국 균형을 이루는 게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주는 것으로 행복하다고 해도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오래 유지시켜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랑의 에너지는 한계가 있고 우리는 반복되는 것에는 싫증을 내게 되어있다.


 받는 것이 더 이상 고마워지지 않는 순간 그 역할의 의미는 끝난 것이다.  내가 예전에 들었던 강의에서 유명 연애강사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사랑을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말했다. 참 비참하지만 현실에서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니까.


 그러나 강자가 되기 위한 노력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강자니까 다 가져도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 양방향으로 교류하지 않는 사랑은 오래갈 수 없다. 그것은 사랑의 모습도 아니다. 착취이거나 일방적인 집착일 수도 있고 입장에 따라 마조히즘이나 사디즘이 될 수도 있다.


 사랑에는 배려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그것도 양방향으로 말이다. 만약 사랑인지 아닌지 헷갈린다면 배려가 있는지 보라. 서로를 향한 배려가 일어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한쪽 방향으로만 있거나 전혀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다른 감정이다.


 강자가 되든 약자가 되든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사랑을 만들기 위해서는 배려가 필수이고 이는 서로 조심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랑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되돌아보자. 나는 이 역할을 강자/약자로 나누고 있나 아니면 주는 자/받는 자로 나누고 있나? 그 기준조차 당신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어떤 기준으로 나누든 균형이 맞아야 한다.


 사랑이 외발로 서있다고 생각해보라. 여러 고비와 훼방꾼들 사이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본 영화 중에 '룸바'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사고로 여자는 다리를 잃고 남자는 기억을 잃는다. 보통이라면 도저히 사랑이 지속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랑을 이어간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말이다. 남자는 여자의 다리가 되어주고 여자는 남자의 기억이 되어준다.


 사랑은 이렇게 배려하되 궁극적으로 두 사람 다를 위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한 배려라면 곤란하다. 사랑의 역할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야 한다. 고정된 역할만을 해왔다면 문제가 있다. 사랑은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더욱 커지고 그 속에서 행복감도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사랑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가? 오늘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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