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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르히아이스 Jan 18. 2019

18. 결혼과 이혼 2

결혼과 이혼 2

이혼의 성격 변화

 이혼율 증가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한데 사실 이 문제는 그동안 이혼율이 너무 적었던 것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무슨 얘기냐 하면 지금으로부터 2,30년 전만 해도 여성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다. 하물며 자식을 부양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기껏해야 식당 종업원이나 방문판매가 다였다. 


 여성의 경제참여 증가, 산업구조의 변화 등이 맞물려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가능해졌고 비로소 이혼의 길이 열린 것이다. 제도적으론 이혼에 제한이 없지만 실질적으로 이혼할 수 없었던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이렇게 이혼이 살아있는 선택사항으로 부상하자 이혼율은 상승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직도 이혼녀, 초혼녀를 가르고 사회적으로 부끄러워하는 풍토가 있어서 이혼의 장벽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장벽도 갈수록 낮아져서 결국 서방 선진국처럼 이혼을 크나 큰 인생의 오점으로 보는 눈도 많이 사라질 것으로 생각한다. 이혼했다고 인생을 망친 것도 아니고 결혼이든 이혼이든 하나의 제도일 뿐이다. 인간이 행복을 위해 이 제도를 선택한 것이지 태초부터 인간은 결혼해서 백년해로해야 한다고 정해진 것은 아니다. 어떤 제도에 기대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되 그것이 깨어졌을 때도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왜 이혼이란 걸 하게 되는 것일까? 검증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결혼하고 나서 생긴 문제 때문일까? 근대사회가 막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이혼이란 제도가 여성에게 매우 선택하기 어려운 환경이 존재했다. 이혼 후 삶이 불투명하거나 이혼녀 딱지를 달고 살아야 했다. 여성인권 신장과 더불어 이혼제도의 활용도는 더욱 높아졌다. 아무래도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쪽이 남자라서 그럴 것이다.(남자에게 더 많은 유혹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결혼 생활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혼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가진 이상 결혼은 더 이상 영속적인 사랑을 보장해주는 제도가 아니게 되었다. 사귀는 것보다 더 깊은 단계, 그 이상의 의미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여성에게 가정이란 의미는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안정된 가정과 분신과도 같은 아이만 있으면 특별한 박탈감을 느낄 일이 없다. 


 남성은 조금 다른데 사회 속의 내가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존재가 없어지는 것처럼 느낀다. 남성에게 가정의 행복은 큰 힘이 되긴 하지만 그보다는 더 큰 경쟁과 성취감이 있는 사회적 성공을 꿈꾸고 갈망한다. 이것은 남성이 가진 근원적인 욕구이다.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성공하는 게 남성의 목표이다. 가정이 아무리 행복해도 사회에서 무리수를 두는 남자들이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혼을 받아들이는 남녀의 차이

 이런 시각으로 보면 이혼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큰 타격이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지만 원래 연인 사이에서 헤어진 경우에도 통상적으로 첫사랑이 아닌 이상 여성이 더 충격에서 빨리 회복하고 원만한 사랑을 다시 이어간다. 이혼을 받아들이는 남녀의 자세 차이인데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여성은 이혼을 처음에는 크게 받아들인다. 사랑이 파괴된 것이니까. 그 책임이 어디에 있다고 해도 우선 가정이 파괴된데 큰 상실감을 느낀다. 아이가 있는지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데 아이가 있을 경우 이런 상실감은 많이 완화된다. 여성은 아이와의 감정교류로 남성과의 감정교류를 상당 부분 대치할 수 있다. 외로움이나 부족한 부분이 다 채워진다는 것이다.


 남성은 이혼했을 당시에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하나는 실패, 하나는 자유이다. 결혼도 하나의 관문인데 여기서 실패했다는 데 대해 남성 입장에서는 상당한 자괴감을 느끼고 자신감이 상실될 수 있다. 이혼 후 두문불출하는 남성들의 경우 대부분 이런 입장이다. 실패하는 데 아무렇지 않을 사람은 없다.


 또 하나의 감정은 가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이다. 결혼이라는 것은 남성의 기본적 충동들을 상당 부분 억제해야 하기 때문에 남성에게 구속감을 주는데 이혼 후 여기서 해방되는 면이 있다. 그래서 이혼 직후에는 남성이 훨씬 심리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혼 후 시간이 갈수록 남성은 가정과 사회 중에 오로지 사회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는 반쪽자리 동물이 된다. 자유에 대한 감격은 갈수록 줄어들지만 무언가 실패해 낙오했다는 패배감은 점점 커진다. 


 여성은 이혼 후 시간이 흐르면 슬픔에서 벗어나 심리적 안정을 되찾는다. 개인적인 자신감은 조금 떨어져도 불편한 사회적 시선만 아니라면 크게 패배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회복 속도가 빠르다. 상당시간이 흐른 후에는 훨씬 더 당당한 모습이 될 수 있다. 오히려 결혼이란 과정을 경험하고 순진한 척 내숭 떨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여유와 지혜로움까지 겸비하게 된다.

이혼의 의미

 이혼의 의미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혼을 통해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혼해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이혼해서 본래의 나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혼은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서로 배려하며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동생활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즉 다른 사람과 사적 영역을 공유할 자세나 체질이 아닌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사회의 관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돼서 결혼하면 쉽게 이혼해버리고 만다.


 두 사람 간의 문제에서 남에게 양보하기 싫어하고 오로지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습관이 들여진 사람들은 결혼한다고 쉽게 바꾸기 힘들다. 결혼 후에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생기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배려와 양보가 필요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결혼이 아니라 룸메이트만 해도 이것은 필요한 일이다. 


 룸메이트처럼 같이 사는 사람이 생기면 청결 수준도 서로 맞춰야 하고 서로 사생활을 공유해야 한다. 나가고 들어올 때 알려주는 것도 기본이다. 룸메이트도 이러한데 결혼은 오죽하겠는가? 그런 부담과 의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이혼을 통해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 사람의 나로 돌아가서 모든 책임과 권리를 혼자 가지는 것이다.


 이혼을 통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여러 경우가 있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초혼과 재혼의 확률적 상황으로 비교해볼 수 있다. 초혼인 사람이 여러 상대를 만나며 결혼의 환상 속에 사랑의 깊이를 더해가는 것과 이혼으로 상처 받은 사람이 전 연인과 비슷한 사람들을 제외한 좁은 범위에서 좋은 사람을 찾는 것은 확률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재혼한 뒤 삼혼 , 사혼까지 가는 사람은 이런 확률의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선택의 범위가 점점 좁아지니 더 나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혼 후 더 좋은 상대를 만나는 경우도 분명 있다. 그런데 더 좋다는 개념도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어서 지금만 좋은 것인지 앞으로도 좋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한쪽 면에서는 좋지만 다른 면에서는 더 못해진 것도 있어서 종합적으로 볼 때 만족감을 표현하기 애매한 경우도 있다.


 폭력이나 외도 같은 피할 수 없는 파탄의 원인이 있다면 이혼은 선택 가능한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같이 힘든 상황에서 혼자 도피하기 위해 이혼을 선택한다면 원하는 행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경영하던 회사에 부도가 났다거나 실직을 당했거나 아니면 건강이 안 좋아져서 이혼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가장 어려울 때 옆에 있어줘야 하는 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인생도 그렇다.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다. 나쁜 일도 많이 겪으며 힘을 합쳐 한고비를 넘기는 것이다. 한 사람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사랑하고 그 사람과 함께 명과 암이 모두 있는 인생의 전체를 부담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결혼하는 것이다. 한쪽이 망가졌을 때 탈출하라고 만든 출구가 이혼이 아니다.

 이혼이 쉬워지면서 이런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이혼을 권장하지도 배척하지도 않는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필요한 순간에 고를 수 있는 선택지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혼을 선택하는 것은 좋지만 한 사람을 위한 도피처가 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결혼제도의 오래된 논쟁거리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결혼 후 한쪽의 마음이 떠나버린 경우엔 한쪽이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이혼을 허락해야 할까?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했던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죽을 만큼 사랑해서 결혼해도 어느 시점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완전히 고갈될 수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이상 사랑은 없고 증오만 솟아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나는 서로 놓아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마음이 아직 뜨겁더라도 양방향이 아닌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헤어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결혼은 사랑의 퇴로를 끊어버리는 행위이다. 즉 사랑이 식을 수는 있지만 이미 다른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혼하는 것은 안된다. 이것은 결혼 후에 허용될 수 없는 행위이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고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다시 남이 되는 게 맞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숨기고 결혼상태를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기만행위이다. 왜냐하면 한쪽은 여전히 책임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바로 배신감으로 이어진다. 


 사랑할 생각이 없는 사람을 결혼이란 제도를 이용해 구속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넓은 차원에서 서로가 더 행복해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아이가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도 부모가 행복해야 행복할 수 있다. 부모의 웃는 얼굴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든다. 결혼이란 큰 무게와 의무를 충실히 하면서 동시에 서로 마음이 없다는 게 확실해지면 놓아주는 게 사랑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결혼할 때는 서약을 한다. 그 약속은 형식이겠지만 그 내용만큼은 다시 새겨서 마음에 가졌으면 좋겠다. 계약은 물건을 주고받는 것이지만 결혼은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다. 마음을 받았다면 내 마음도 주는 게 당연하다. 이것을 할 수 없을 때 이혼은 선택하는 것이고 유불리를 따질 일도 아니다. 이혼은 출구가 아니라 새로운 관문이다. 이혼 후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이다. 이혼도 결혼할 때만큼 커다란 마음과 의욕적인 자세로 선택할 수 있어야 새로운 길이 열린다. 사랑은 결혼할 때도 이혼할 때도 가장 중요한 기준이자 동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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