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이혼
나중에는 어떨지 몰라도 처음부터 비혼주의자는 없는 것 같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문명의 결과물인 것 같지만 원시부족 때부터 결혼과 유사한 제도는 있어왔다. 문화로 보기도 힘든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프리카 부족까지도 누가 강요하지 않았는데 결혼이라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
이는 참 묘한 결과로 하다못해 타문화권과 접촉이 거의 없었다던 잉카문명도 일부일처는 아니지만 결혼제도가 있었다니 결혼은 어떤 의미에서 문명의 결과가 아니라 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혼의 의미를 얘기하자면 그것만으로 책 한 권이 될 것이며 많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여기서는 사랑과 연관된 부분만 살펴보겠다.
결혼이란 무엇일까?
결혼은 인간이 만든 제도이면서 문명이 생긴 이래 가장 오래된 제도 중에 하나이다. 물론 일부일처제를 근간으로 하는 남녀평등적 근대적 결혼과 과거의 결혼제도는 차이가 있지만 혈연이 아닌데도 제도로서 가족을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게다가 일부다처제의 경우에도 보통 첫 번째 부인을 정실로 인정하여 배타적 소유권을 보장했다는 측면에서 결혼이란 제도가 두 사람의 배타적 관계를 보장하는데 기본적인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예전에 동남아시아 어떤 국가의 남자가 여러 명의 부인을 데리고 사는 걸 보았는데 부인의 서열이 전혀 없고 가장 최근의 부인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가 경제력으로 지배하고 여성이 남성에 예속된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사회였다. 이 경우 남성은 결혼할 때 여성에게 상당한 재산을 넘겨주었고 여성이 경제적 약자 입장에서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여성에게만 배타적 관계의 의무가 주어진 경우로 의무가 큰 쪽이 경제적 혜택을 입게 된다.
단순하게 보면 남성은 경제적 의무를 지지 않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여기서 결혼의 또 다른 속성이 작용한다. 바로 2세의 문제이다. 여성만큼은 아니지만 남성도 자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본능적인 의무감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대를 이어 자신의 노후와 자신이 일궈놓은 것들을 이어갈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손을 키우는 것은 시간도 시간이지만 역시 경제적 의무가 따른다.
즉 돈을 주고 결혼하지 않아도 자식이 생기면 경제적 의무가 발생해 결혼한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여성도 자식에 대한 경제적 의무를 지지 않을 남자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결과적으로 결혼은 서로에게 의무를 강제하기 위한 제도인 것이다.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형태로 퍼져있는 것을 보면 남자, 여자를 막론하고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제도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결혼은 단순하게 말해 두 사람이 사랑해서 서로 독점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공인하는 것이다. 일정한 틀을 갖추는 요식행위이기도 하다. 물 한잔을 떠다 놓든 부족이 모여 의식을 치루든 뭔가 형식적인 것을 하게 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결혼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결혼이란 자연인의 두 사람이 사랑을 매개로 해서 서로 약속을 하고 삶을 함께하며 사랑을 이어가기로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것이다.
결혼하기 전 커플은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사랑이라는 속성 자체가 계속 커지고 단계적으로 상승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어서 다음 스테이지를 만든 것이다. 오래 사귄 커플이 더 쉽게 헤어지는 것은 바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지 못하고 지루하게 연애를 끌어왔기 때문이다. 결과물이 없는 노동과 비슷한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결혼을 하나의 단계별 결과물로 인식하고 다음 단계로 자식 생산에 들어간다.
결혼 제도는 누가 고안했는지 몰라도 꽤나 영악한 선택이다. 형식적인 행정제도, 관습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면서 서로 남편, 아내라는 정서적인 면까지 갖도록 하니 말이다. 내 남자 친구였던 것과 내 남편인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같은데도 호칭에 따라 우리 정서가 받아들이는 무게와 거리감은 전혀 다르다.
결혼의 유례
최초의 결혼은 아마도 힘을 가진 남자가 많은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었을 것이다. 왜 남성일까? 현실적으로 원초적 힘이 지배하는 원시사회에서는 아무래도 남성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데 여성도 가능하다고 보지만 여성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경우 굳이 결혼이라는 형식을 도입할 이유가 없다. 여성이 강한 남자를 선택해 결혼하게 되면 그 남성은 반드시 여성의 권력을 탐하게 되어있다. 권력욕 또한 남성의 사회적 본능에 가깝다. 남성들의 사회생활은 유치원이건 국회의사당이건 온통 정치와 권력다툼의 연속이다.
그럼 여성이 권력욕이 없는 남성을 택하면 어떤까? 문제는 애초에 권력을 탐하지 않는 착한 남성은 매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나쁜 남자의 매력은 동서고금의 현상이다.
힘을 가진 수컷이 다수의 암컷을 점유하는 것은 많은 동물들에게서도 관찰되는 일반적인 자연법칙이다. 강한 유전자가 살아남는 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왕과 같은 강자에게서 시작된 결혼제도가 점점 일반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결혼이라는 보편적 풍습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결혼이 이렇게 대중화된 것은 결혼이 가진 장점 때문인데 특히 남성들에게 필요성이 강하다. 결혼제도가 형성되었을 원시시대에는 어차피 여성보다 남성이 우월한 위치에 있었고 남성들은 자기 자식에게 권력과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배타적으로 여성을 독차지할 이유가 있었다.
이것은 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아주 강력한 제도적 힘이 필요했다. 물리적 힘으로 다른 남성들을 제압해도 몰래 만나는 것은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유전자 검사가 있는 것도 아닌 시절에는 남자들의 불안이 더 컸을 것이다.
이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여성에게 여러 남성과 관계해서는 안된다는 윤리적 각인 또는 의무감을 심어주고 혈통의 안정성을 얻는 대신 여성들의 안전과 생활을 남성이 보장하는 일종의 딜이 성립된 것이다. 남녀 모두가 필요한 것을 가져가고 합의한 것이다.
일부다처제라는 것도 부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남성에게 유리할 것 같지만 부인이 많으면 그만큼 결혼의 의미가 퇴색하기 때문에 꼭 그렇지도 않다. 오직 자식을 낳기 위해서만 짝짓기 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정서적인 교감이 상당 부분 작용한다. 그래서 짝이 될 수 있는 사람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 상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교감이 떨어지고 친밀감도 사라져 결국 배타적 의미도 사라진다. 옛날 왕의 태자가 몇 백 명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이 상태에서는 사실상 결혼도, 가족도 무의미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일부일처제로 전환된 계기는 무엇일까? 사실 일부일처제로 전환된 게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 이전에는 비공식적으로 혼외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고 근대에 와서도 경제력을 이용해 결혼상대 이외의 상대와 실질적인 부부관계를 형성한 경우가 있었다.
일부일처제가 대세로 자리 잡은 이유는 대체로 경제적 이유, 윤리적 이유로 구분해볼 수 있다. 경제적인 이유는 사냥해서 부족이 공동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닌 개인이 벌어서 가족을 부양하는 시스템에서 경제적 부담 때문에 일부다처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호들은 혼외 자식으로 문제 되는 경우가 꽤 있다. 윤리적 이유는 인권인식이 커지면서 일부다처제가 곧 여성인권 악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대 다의 구도에서 주도권을 뺏긴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지 못하는 것은 뻔한 일이다. 여성이 남성과 경제적으로 밀리지 않은 위치에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렇게 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여기에 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다. 향후 이 책의 개정판이나 다른 책에서 또 다른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결혼이 사회제도로 정착하고 일반인에게도 자리 잡게 되자 결혼이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관혼상제의 하나가 되었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4가지 관문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신분상승의 계기도 되고 서로 가족이 되는 수단이기도 한 근대의 결혼을 지나 현대에는 사랑의 과정에서 결과물 중 하나가 된 것이 사실이다.
결혼 자체가 사랑의 결실이다. 결혼한다고 실제로 두 사람 사이가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법의 도움을 받아 관계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게 된다. 개인주의가 정착되기 전까지의 결혼은 사랑의 결론이었다. 지금의 한국에서도 그런 모양새를 띄고 있다.
결혼은 사랑의 결론(Conclusion)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만약 결혼이 사랑의 결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생을 굉장히 짧게 해석한 것이고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지나치게 종속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제도이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진짜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지 결혼 그 자체가 아니다. 결혼을 했다고 더 책임감을 느끼거나 사랑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안 했다고 아무 생각 없이 사랑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결혼 제도와 관계없이 사랑의 책임을 다하고 신뢰받을 수 있게 행동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이것이 잘 안되니까 결혼이라는 제도까지 만들었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기본 가치관은 제도 자체에 묶일 것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완성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제도가 당신의 가치관을 만들어주기 시작하면 결국 당신의 국가의 충실한 국민으로서 부품 역할을 할 뿐 개인의 행복감에서는 언제나 소외될 것이다.
결혼이 사랑의 결실이 될 수는 있다. 결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있을 수 있고 결혼도 그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이만큼 사랑해서 결혼이라는 제도로 서로를 구속하는 단계까지 왔다는 것도 큰 결심이고 그래서 그것도 하나의 결실이 된다. 두 명의 당사자가 결혼이라는 구속을 받아들이는 것은 큰 결심이다. 그래서 결실이 될 수 있다.
결혼을 사랑의 결론이라고 믿는 이유는 매우 전통적인 것이다. 많은 동화가 왕자와 공주가 결혼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끝나기 때문에 이것이 고정관념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과거에는 혼인관계의 변동이 매우 정적이었다. 한번 결혼하면 끝이었다. 그래서 사랑의 결론과 결혼은 거의 동의어가 맞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사회가 다원화되고 개개인의 욕망과 바람이 다양해진 사회에서 결혼은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
결혼을 사랑의 결론이라고 보면 안 되는 이유가 또 있다. 만약 결혼을 사랑의 결론이라고 생각하면 사랑은 결혼과 동시에 끝나는 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Opening)이 아니라 엔딩(Ending)이 돼버린다. 결론을 봤는데 뭘 더 하겠는가? 그다음부터는 목적지가 없는 여행일 뿐이다. 아이를 낳고 늙어가면서 친구가 되어가지만 더 이상 두 사람 간에 애정이나 설렘이 존재하지 않는 암묵적 육아 동업자일 뿐이다. 좀 심하게 말해 베이비 시터를 둘이서 맡고 있는 것뿐이다. 목적지가 없으니 더 열심히 해야 할 필요도 없고 당장 부여되는 의무만 충실하면 그만이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제도의 본래 의미마저도 퇴색하게 만드는 잘못된 자세라고 생각한다.
결혼은 과정(Process)이다. 한 차원 더 높은 단계의 사랑을 하기 위한 형식적 도구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붓이 필요하듯이 밑그림을 잘 그려놓고 이제 본격적으로 세밀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구입한 비싼 붓인 것이다. 붓을 사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듯이 우리는 사랑을 더 잘 그리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다. 붓을 샀다고 그림이 그려지는 게 아니고 붓을 산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것이다. 아이도 마찬가지이다.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 결실임은 틀림없지만 그 또한 결과는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강하게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될 뿐이다. 내 파트너보다 아이를 더 우선하다 보면 사랑도 잃고 행복한 가정도 잃게 된다.
일부의 사람들은 결혼이 결론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사랑의 에너지를 거기에 따 써버린다. 오직 결혼을 잘하기 위한 궁리만 하면서 결혼 한 뒤 더 이상 엔진에 연료를 채워 넣지 않는다. 결혼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정말 사랑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평생을 함께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위치나 재력을 통해 심신의 안정적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것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낭만주의자라고 비난받더라도 나는 전자를 선택하고 싶다. 반대론자들은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렇다면 결혼보다 사랑을 앞세우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얘기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도 현실이다. 수많은 사람 중에 나의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설렘을 느끼는 것도 현실이다. 삶은 좀 더 윤택한 결혼이냐 아니냐의 현실이 아니다. 서로가 다른 사람이면서도 하나처럼 합치된 마음으로 살고 있느냐, 그래서 좀 더 오랫동안 행복감에 이를 수 있느냐, 그 결과 살아가면서 오는 갖가지 고난들을 함께 뛰어넘을 준비가 되어있느냐의 현실이다.
물론 물질적인 안정이 가져다주는 효과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가치관이 공유되고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할 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것은 그런 바탕 위에서 진정한 제도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고 우리가 기대하는 결실이 될 수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 그 자체의 순기능이나 비중, 그리고 현실적 무게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은 분명 인간에게 단순한 사랑 이상의 만족감과 안정감을 준다. 남자 친구와 남편의 차이는 상상할 수 없이 큰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남자 친구라고 해서 책임감 없이 사랑한다던가 남편이라고 해서 지나치게 구속하거나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혼의 의미가 크면 클수록 사람은 결혼에 기대하거나 결혼 제도 자체가 가진 힘에만 의존하게 된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결혼제도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제도'가 갖는 의미와 힘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도가 갖는 힘을 인정하되 그것에만 의존하거나 그것에 종속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사랑을 유지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마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란 자기가 만든 제도에 자기가 구속되며 심지어 종속되기까지 한다. 최소한 이런 상태까지 가서는 안된다.
결혼을 통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족이 아닌 한 어차피 사랑은 유한하다. 사랑에 더 긴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신도 할 수 없고 오로지 당사자들의 몫이다. 초심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긴 하지만 쉽지 않다. 이 유한한 사랑의 불완전한 바탕 위에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린다는 것 역시 불안하다. 결혼이란 제도의 탄생 배경에는 이런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연인인 것과 아내(남편)인 것의 그 차이는 어느 정도일까? 말하지 않아도 크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도의 힘이다. 중요한 것은 이 제도의 힘을 충분히 이용하되 사랑의 본질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이 깊어져 결혼하고 제도의 보호 속에 좀 더 안정적 사랑을 이어가게 되지만 결혼이 사랑의 종착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만은 잊지 말자.
결혼 후 사랑이 하향곡선을 긋는 이유
결혼 후에 사랑은 하향곡선을 긋는 게 보통인데 원인은 서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서이다. 관심이 줄어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일 큰 것은 아이 때문이다.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가정에 큰 축복이지만 모성애가 없는 남성이 들러리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육아에 있어 아무래도 여성보다 뒤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남성은 시키는 일만 하는 일꾼처럼 된다.
사회적 랭킹에 관심이 더 많은 남성들은 언제나 돈벌이와 승진에 목을 맨다. 가정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왜 시키는 것만 하느냐. 알아서 적극적으로 하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본능적으로 남성은 새벽에 깨서 아이는 못 보더라도 야근은 새벽까지 잘 참고 한다. 이게 좋은 것도 아니고 일반화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남자들 성향이 그렇다. 뭐가 더 중요하냐고 물었을 때도 서로 답이 다를 것이다.
결혼 후 남성과 여성의 관심은 서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남편은 가정을 책임진다는 무의식적 압박에 시달리며 더욱더 사회적 성공에 매달린다. 아내 역시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와 피로로 인해 사랑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지며 늘 보고사는 남편에 대한 신비감, 존중 등이 감소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두 사람이 꿈꾸던 신혼은 끝이 나고 무덤덤한 유부남과 유부녀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아니면 엮이는 것이 없으며 할 이야기도 없어진다. 어떤 경우에 이것은 가정의 위기로 발전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너무 지나치게 아이에 올인한다던가 한 사람이 육아를 전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가정의 축복이지만 가정의 중심은 아니다. 가정의 중심은 바로 부부 당신들이다. 육아로 인해 발생하는 어려움과 문제에 대해 서로 얘기하고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상대방이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막상 생활에 찌들면 이런 것을 잊기 쉬운데 나중에 위기가 닥친 뒤 후회해도 늦는다. 나의 무관심으로 인해 상대방이 항상 불만족의 상태에 있다면 좋은 관계를 기대하기 힘들다.
아이가 없어도 서로 무관심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서로 너무 많은 부분을 오픈해서 더 이상 상대방에 대한 어떤 호기심도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부부가 아무리 일심동체라지만 마치 자웅동체처럼 서로 모든 걸 알아버린다면 관심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성적인 차이점 마저 상실한다면 관심도는 더욱 떨어질 것이다.
결혼하면 서로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도 어느 한계가 있다. 서로 모든 것을 알려는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남(타인)에게 관심을 가진다. 그건 왜일까?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잘 모르는 사람에게 더 관심이 가도록 되어있다. 이것은 호기심이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근친을 막기 위한 본능이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호기심=관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만큼 호기심이 관심을 갖는데 중요하다. 인간은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식욕만큼이나 강하다. 또한 모르는 것은 인간에게 기대를 심어준다. 나와 다른 장점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는 것이다. 내가 가진 지식과 생각의 틀을 뛰어넘는 것을 타인에게 기대할 수 있다. 모르기 때문에….
그런데 결혼 후 하나부터 열까지 지켜보고 알게 되면 관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에서는 지나치게 부부간 사생활이 없다. 사적 영역을 가지면 마치 외도하는 것처럼 오해받는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사적 영역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부분이고 이것이 개인의 에너지가 된다. 오직 공적 영역만 있는 사람은 기계나 다름없다. 사람의 희망이나 욕구는 바로 이 사적 영역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적 영역이 타인에게 점령당하고 나면 개성을 잃게 되고 하나의 개체로서 자격도 잃어버린다. 부부간 서로 24시간 지켜보려고 하고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태도가 이런 사태를 만든다. 상대방이 하나의 개체로서 자기 영역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그녀)가 내가 모르는 영역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그 영역에서 외도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자기 절제와 신뢰의 문제이다. 사적 영역이 없더라도 자기 절제를 못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다.
내가 모르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관심을 느낀다. 그 사람이 뛰어난 외모나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금세 사랑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외모와 재능을 가져도 내가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길게 만나기 힘들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할지, 어디로 갈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는데 대화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데이트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나친 결혼 후 사랑이 하향곡선을 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