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르히아이스 Dec 25. 2018

16. 사랑의 균형

사랑의 균형

 모든 일에 균형이 중요하듯이 사랑도 균형이 있어야 행복한 상태로 오래갈 수 있다. 사랑에서 균형이라는 건 뭘 말하는 것 일가? 이것은 내가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주고받는 균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강조를 했다. 그러나 그 도덕적으로는 그게 맞는지 몰라도 사랑의 실전에서 그것은 위험한 짓이다.


 밸런스(균형)는 사랑의 건강상태를 볼 수 있는 하나의 지표이다. 우리 사랑은 얼마나 건강한 상태인가를 알고 싶으면 우선 밸런스를 보면 된다.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혈압이나 혈당을 제는 것과 같다. 두 사람의 사랑이 한쪽 방향으로 치우쳐 있지 않은지, 치우쳐있다면 두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보라.


 아무리 상대방이 좋아도 어느 선에서 참아야 한다. 더 해주고 싶어도 참아야 된다. 그것이 사랑을 더 길게 이어가는 방법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이것은 생물로서 당연한 것이다. 자기 생존과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문제는 사랑에서 두 사람의 균형이 무너지고 한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갈 때  이기적인 인간이 이것을 이용하려 한다는 점이다.


 상대방의 사랑하는 마음을 이용해 하나씩 양보받아 결국엔 완전히 주도권을 쥐고 만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랑의 강자들은 하나같이 상대방의 양보를 얻어내는데 선수이고 더 나아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주종관계처럼 만들어버린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무릎 꿇게 되어있다. 사랑의 잔인함은 여기에 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내가 아는 어떤 남자는 잘 사귀다가 가끔씩 여자 친구에게 화를 낸다. 나는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끔씩 화를 내줘야 돼. 안 그러면 나를 우습게 보거든.”


 그가 화를 낸 타이밍은 그의 여자 친구가 그의 외모를 가지고 가벼운 농담을 했을 때였다. 나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인데 그는 달랐다. 그는 실제로 화가 나지 않았음에도 일부러 화를 내고 있었다. 잘 지내다가 갑자기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은 충격효과가 컸고 여자는 곧바로 저자세가 되었다.


 나는 그 남자처럼 할 수 없고 이 방법에 동의도 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이 방법은 잘 통하는 방법이다. 원래 사람을 잘 요리한다는 게 이런 것 아니겠나.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수가 안 통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그게 여자든 남자든 말이다. 화가 나지 않았는데 버릇을 고치기 위해 일부러 화를 내는 것은 그 사람의 자존심을 살려주고 연애의 주도권을 잡게 해 줄지는 몰라도 연인관계가 그래서야 믿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 여자는 돌연 화를 내는 남자 친구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더 미안하다고 느꼈을 수 있다. 어쩌면 그 남자의 말대로 이것을 그냥 넘어갈 경우 다음엔 더 심한 농담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남자가 여자를 마음대로 요리하고 여자는 쩔쩔매는 이 상황 자체가 나는 매우 불편했다. 남녀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길들이려 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자발적으로 길들여진다.

 생텍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소년은 여우에게 길들이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여우는 “길들여지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라고 말해준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서로에게 길들여진다.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길들이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여자를 길들이고 있었고 그 여자는 일방적으로 길들여지고 있었다. 소년과 여우는 서로를 길들이는 사이였지만 그 남자와 여자는 아니었다.


 남자는 여자를 길들이면서 하나뿐인 존재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자신은 길들여지지 않으므로 일방적인 관계가 되었다. 즉 관계가 양방향으로 형성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지극히 유리한 관계’로 된 것이다.


 사랑의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정체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길들여진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와 닿는다.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이 있어.”


 상대를 길들이기만 하고 책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내가 편한 데로 나를 떠받들도록 길들여놓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주종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존중받고 싶은 만큼 남을 존중해야 하고 진심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을 하다 보면 정확히 5:5로 균형을 이루지는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7:3, 8:2로 가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었든 서로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게 첫 번째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누군가 좀 더 좋아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어느 선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오로지 퍼주기만 하는 사랑은 부모 자식관계를 제외하고는 오래갈 수 없다. 


 가끔 완전히 상대방에게 종속되어 이런 관계가 오래가는 경우도 있다. 스스로도 빠져나올 생각을 못한다. 남에게는 완전히 불공정해 보이는 이 관계를 깰 엄두도 못 낸다. 이는 정신적인 종속 상태로 이미 사랑이 아닌 주종관계이다. 사랑이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사랑은 주고받으면서 점점 시너지가 커지고 행복감도 배가 된다. 이 행복감을 오래 유지하려면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상대방과 균형을 맞춰야 한다. 상대방을 더 사랑하고 싶다면(더 주고 싶다면) 상대방을 더 길들이여서 그만큼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야(더 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랑의 설렘이 오래가고 특별한 것이 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 특별한 것이어야 한다. 사랑이 식는 것은 곧 특별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은 늘 5:5로 양을 따져가면서 하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은 배려라는 사랑의 모습을 손상시켜 사랑의 에너지를 떨어뜨릴 수 있다. 사랑은 항상 우상향 해야 한다는 말을 잊지 마라. 누가 먼저 하느냐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상대방이 하고 있는 것에 보조를 맞출 필요는 있다는 얘기이다. 주는 것에 혹은 받는 것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사랑에 관해 항상 강자 입장에 서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기술적 면이라 어쩔 수 없다. 사람의 재능은 다 제각각이니까. 그런 강자를 만나더라도 균형을 위해 애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지킬 수 없고 사랑도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균형을 잡는 방법은 뭘까?


 균형의 필요성에 공감했다면 먼저 어떤 균형이 무너졌는지 알아야 한다. 단순히 서로 감정의 양이 다른 것인지 아니면 적극성의 차이인지 구분이 필요하다. 항상 내가 먼저 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만약 상대방과 주고받는 감정의 양이 크게 차이 난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두 가지 경우로 나눠볼 수 있는데 처음부터 그랬다면 당신이 넘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탓이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점점 그렇게 되었다면 당신이 잘 못 길들인 탓이다. 


 사랑하면서 서로 잘 보이려고 하고 상대방이 더 나를 사랑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필요하다. 상대방과 나에게 그런 자세가 있는지도 봐야 한다. 한쪽이 그런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면 사랑의 소중함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연애 전문가들은 서로 긴장감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하는데 그런 면도 일부 있지만 나는 상대방이 내가 주는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신경 쓰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사랑을 줄 때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지도 않고 무작정 퍼주거나 내 방식대로 쏟아붓는다고 좋은 반응이 오는 게 아니다.


 상대방의 성격, 기질, 성향 등을 잘 보면서 그것에 맞게 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땅과 기후에 맞게 뿌려야 한다. 무뚝뚝한 사람에겐 지속적인 인내로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하고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 사람의 작은 표현도 칭찬하고 서로 같이 연습하는 것도 좋다.  


 상대방이 이미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별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그에 맞게 관심을 줄여야 한다. 균형을 잃은 채 불타는 사랑보다는 균형을 유지하고 담담한 사랑이 낫다. 그 사람의 노력에 따라 내 노력도 커진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이런 사람과 사랑할 때는 다소 기술적인 면도 생각을 해야 한다.


 항상 내가 먼저 연락하던 것도 오늘은 그에게서 연락이 오도록 기다려야 한다. 5:5를 생각하지는 말고 양방향이 되는 게 중요하다. 끝까지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고민 후 결정해야 한다. 과연 그 사람은 늘 그런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고 개선의 여지는 없는지를 봐야 한다.

 두 사람이 만나서 친구든 연인이든 관계를 이루려면 어떤 식으로든 서로 양보해야 한다. 혼자 좋은 것만 생각해서는 안되고 상대방을 생각해야 한다. 내 성격이든, 행동이든 상대방을 위해 변하고 배려하고 양보해야 한다. 2인 3각 경기에서 혼자 걸으려고 하면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게 안 되는 사람이라면 사랑할 자격이 없다. 이타성은 사랑의 본질과 가장 가까운 성질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상대방을 생각지 않는다면 이미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매우 유아적 수준에서 이기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어릴 때부터 주변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럴 수도 있고 반대로 사랑을 못 받아서 베풀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든 사랑을 할 사람은 못된다. 이것은 결정적인 흠에 해당한다. 사랑은 할 수 있지만 한쪽의 큰 희생이 필요하다. 이것도 감수할 수 있다면 해도 좋다. 그러나 결국엔 이 문제로 고통받을 것이며 안정적인 사랑을 하기 힘들 것이다.


 사랑의 균형을 자꾸 강조하는 것은 많은 남녀가 심각하게 왜곡된 사랑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안다. 사랑이 마음대로 되면 사랑이겠는가? 그렇지만 멀리 가기 위해 등대를 보듯이 사랑을 할 때나 사랑이 끝났을 때(이별 후에) 한번 돌이켜보기 바란다. 우리의 사랑이 균형 속에 있는지.


 세상엔 생각보다 이기적인 사람이 많다. 그런데 사랑은 이타적이다. 이 상반되는 감정이 서로 만나 이타성이 이길 때 사랑이 태어난다. 그러니까 애초에 이기적인 사랑이란 없다. 이기적인 욕심만 있을 뿐이다. 이기심에 덮여버린 사랑을 보고도 제대로 눈을 뜨려 하지 않거나 대충 자기희생으로 덮고 넘어가려 한다면 나중에 남는 것은 더 큰 상처와 자존감 상실뿐이다.


 사랑은 누가 주도해도 상관없지만 한쪽이 항상 주도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사랑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다. 노를 한쪽에서만 저의면 제자리를 도는 것과 같다. 마찰하는 게 싫어서 혹은 버림받을까봐 한쪽이 주도하는 것을 방치한다면 시간이 흐른 후에 가야 할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에 도착한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서로 배려하며 상대방을 성장시키는 사랑이 아니라 무엇을 얻으려는 사랑밖에 되지 못한다. 


 사랑을 하면 두 사람이 행복해야 하고 같이 성장해야 한다. 그 결과 사랑이 끝나더라도 많은 것을 배우고 성숙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지금 한번 생각해보라.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은 지금 당장 끝나더라도 성숙이라는 선물을 남길까? 아니면 일방적 헌신으로 시간낭비만 될 것인가?

이전 15화 15. 요즘 사랑의 조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