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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르히아이스 Mar 16. 2019

23. 불륜 3

불륜 3

졸혼과 불륜

 최근 우리나라에서 등장한 새로운 세태가 졸혼이라는 건데 연예인들이 TV에 나와 보여준 후 광범위하게 인식을 넓혀 가고 있다. 일반인들이 얼마나 이런 삶을 따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감대만은 큰 것 같다.


 졸혼이란 결혼의 껍데기만 남기고 각자 자유롭게 사는 건데 이성과의 만남도 알게 모르게 허용하는 것이다. 물론 대놓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치껏 하게 둔다.


 이 요상한 관계는 남의 눈 때문에 이혼이 쉽지 않은 우리네 문화가 만들어낸 기현상이다. 자기 자신의 행복과 삶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게 아니라 남한테 보이는 이미지, 자식들에 대한 영향, 나이 들면 당연히 욕구를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들이 이런 현상을 만들어 냈다.


 사랑해서 결혼했다면 사랑이 없어지면 헤어지는 게 정상이다. 마치 의무적으로 몇 년을 살아야 하는 것처럼 졸업+결혼을 합쳐서 졸혼이라는 것을 만들어 냈는데 선진국에서는 볼 수 없는 코미디 같은 현상이다. 이런 현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개인의 행복에 너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사회의 발전은 개인의 행복도에 비례한다. 선진국에서는 왜 졸혼이라는 문화가 없을까? 우리보다 훨씬 오래 현대적 결혼문화를 유지했음에도 그런 단어조차 없다. 그것은 개인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고 얼마든지 이혼을 선택할 수 있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식이나 주변 사람들 눈치 때문에 이혼은 무조건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치부된다. 그리고 나이 들면 개인적 행복이나 욕구는 더 이상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으로 치부된다. 


 “나이 50에 뭔 이혼이야. 자식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나이 들어서 새장가라니. 자식들도 있는데.”


 이런 말들이 흔히 오간다. 하지만 가족 같은 ‘집단’이 아닌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면 행복을 위해서 못할 일은 없다. 나이 들어도 자식이 있어도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자신이 행복해야 자식이든 주변이든 돌볼 수 있다. 누가 무슨 선택을 하든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최선이라면 남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스스로 이런 가능성을 차단해버리고 만다.


 부부간에 문제가 있었고 강압적인 이유로 결혼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여기서 생긴 불륜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부부간 없었던 신뢰는 새로운 상대에게 생성될 수 있다. 즉 사람, 애정, 신뢰가 모두 존재하므로 사랑이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불륜을 예방하려면

 우리는 사랑의 과정에서 애정 없이 신뢰만 남았을 때를 조심해야 한다.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 나이 든 부부들은 이런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애정의 대상을 발견하게 되면 신뢰는 그쪽으로 옮겨가 버릴 수 있다.


 유부남은 자유를 찾는다고 했는데 자유를 즐기고 난 후에 원래 있던 안정된 보금자리로 복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아내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에서는 보금자리로 오더라도 안정감보다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유에 대한 욕구가 더 커진다. 만약 유부남이 새로운 상대에게도 충분한 신뢰를 가질 경우 부부관계는 되돌이킬 수 없다고 봐도 된다.

 이 상태가 되면 새로운 사랑이 애정과 신뢰를 모두 획득하게 되어 사랑의 상태는 역전되게 된다. 즉 새로운 사랑이 진짜 사랑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불륜이 막 시작되었을 때 바로 신뢰가 옮겨가지 않는 이유는 아직 배우자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참 사귈 때처럼 타오르지 않아도 시간이 형성한 최소한의 애정이 남아있다. 관성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 믿고 사랑의 노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관성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더 큰 사랑이 밖에서 만들어져 버릴 것이다.


 지극히 도덕적이지 못한 얘기지만 이것도 현실이다. 결혼도 결국 인간이 만든 제도인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제도가 어느 정도 외풍을 막아주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두 사람이 사랑을 지켜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자기 통제가 뒤따라야 사랑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부단히 헤엄쳐야 한다. 그래야 권태의 강에서 익사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상태인가를 늘 점검하도록 하자. 사랑의 3요소인 사람, 신뢰, 애정이 우리 둘에겐 존재하는가를 항상 질문하자. 불륜도 사랑이 될 수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사랑을 무너지지 않게 잘 관리해야 한다. 


비도덕적 사랑

 사랑은 도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동물의 세계와 같이 잔인한 면도 존재한다. 글을 마무리하던 참에 센세이셔널한 사건이 신문에 났다. 유명 영화감독과 톱스타 여배우가 불륜관계라고 폭로된 것이다. 나이 든 유부남 영화감독과 젊은 톱스타 여배우의 불륜은 신문지를 가득 메우고도 남았다. 사랑을 연구할 때마다 이해하기 힘든 것이지만 어떻게 이런 불균형한 사랑이 이뤄질까. 그냥 제눈에 안경이라고 하면 다인가?


 이 책에서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해서 모든 애정사에 대해 답해줄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현상일수록 책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해석을 해볼 필요는 있다. 물론 그들의 개인사에 대해 내가 아는 정보는 없다. 단지 제삼자의 입장에서 일반적인 상상력을 발휘해보고자 한다. 나이, 외모에서 여자가 뭐하나 부족할 것이 없고 재력도 부족하지 않다. 영화감독이 재벌이 아닌 이상 재력이 그 남자를 만나는 이유는 아닐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관계가 성립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과연 사랑일까?


 객관적으로 보면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주도권은 여배우가 가지고 있다. 모든 면에서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싱글이고 나이도 훨씬 젊을뿐더러 여성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남자 감독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것은 직업적 권위이다. 영화 세트장에서 감독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선생님이자 지휘자이다. 배우는 그의 요구에 따라 죽고 사는 훌륭한 도구이다. 그런 측면에서 어느 정도 감독이 좋은 위치를 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이런 식의 사랑이 이뤄질 수 있는 가능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남자가 감독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대시했을 경우. 아니면 여배우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을 경우이다. 사실 후자가 이런 사랑이 이뤄지기 가장 쉬운 조건이다. 여러모로 조심할 수밖에 없는 유부남이 애정을 쉽사리 표현하기란 어렵다. 자칫 명성과 사랑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사랑에는 대중의 비판까지 감수해야 된다는 조건이 있다. 웬일인지 여성계에서는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대중문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 비난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이 대중문화계 핵심적 인사라서 그럴까? 아무튼 대중의 비난과 활동범위가 매우 좁아지는 불이익까지 감수하면서 사랑을 이어가는 것은 매우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사랑의 한 가지 속성인데 바로 울타리 이론이다. 이것은 내가 이름 붙인 것으로써 인간이 다른 사람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는 기준은 보편적인 것보다는 울타리 안의 기준이다. 무슨 얘기냐면 원래 전혀 다른 이상형을 가졌던 사람이라도 어떤 울타리 안에 가둬놓고 장기간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안의 기준으로 눈높이가 맞춰진다는 것이다. 직장, 종교단체에서 이런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외모, 재력, 학력에서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울타리 안의 사람과 사랑이 이루어진다.


 특정한 울타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마주치다 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편해진다. 다양한 일을 겪으면서 서로 공통된 관심사가 생기고 오래 알고 지낸 만큼 신뢰는 자동으로 구축된다. 여기서 사랑으로 가려면 애정이 필요한데 같은 단체에 소속되어 있으면 동료애, 동지애가 기본적으로 있다. 사랑과는 좀 다른 것이지만 이것도 작은 애정의 일종이다. 이것이 사랑의 애정으로 넘어가는 것은 다소 충동적이다.


 평생 만날지 기약도 없는 이상형보다는 바로 앞의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눈길이 가게 마련이다. 현대에 와서 직장동료는 같이 생활하는 시간만 따지면 가족보다 더 친밀하다. 인간의 이상형은 기본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앞서 말한 오이디푸스, 일렉트라 콤플렉스 이론도 있지만 많이 보면 익숙해지고 편해지므로 그것이 이상형과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무의식은 적응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환경에 적응해 살아갈 수 있게 만들지만 사람이 사람에게도 적응하게 만든다. 낯선 얼굴은 불편함을 주지만 시간이 지나면 편한 얼굴이 된다. 험상궂게 생겨도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과 같다.


 여배우와 남자 감독은 촬영장에서 점점 편한 관계가 되었고 사적인 부분도 많이 오픈하게 되었을 것이다. 서로 많이 안다는 건 신뢰가 쌓인다는 얘기이고 이것은 사랑의 기초가 된다. 아마 두 사람이 처음부터 이것을 의도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의도하면 오히려 잘 안 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은 너무 깊이 들어와 있었고 타인이 줄 수 없는 신뢰와 애정을 서로 주었을 것이다.


 젊은 남녀처럼 불꽃 튀는 애정은 없지만 신뢰가 굳어가고 공감대가 커질수록 서로 교감하는 정도가 높아진다. 이것은 곧 애정으로 발달하기 쉽다. 교감만큼 좋은 애정 원료는 없다. 영화 제작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제한된 공간에서 교감하는 배우와 감독이 신뢰와 애정을 쌓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보인다.


 인간의 사랑이란 이렇게 때로는 비도적적이고 충동적이다. 연인을 뺏긴 사람에게는 하루아침에 날벼락이겠지만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가정의 불만, 상대적 외로움, 직업상의 열정, 지속적인 만남, 느슨한  도덕감. 이런 것이 다 갖춰져야 하나의 불륜이 탄생한다. 


불균형적 사랑

 단순히 불륜이라서가 아니라 현격한 두 사람 간의 차이가 있어서 더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는데 가끔 예쁜 여자가 뚱뚱하고 아저씨 같은 남자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왜일까? 멋진 몸매도 아니고 배 나온 아저씨에게 멀쩡한 젊은 여성이 끌리는 것은 왜일까? 실제로 나는 배 나온 남자가 이상형이라는 여성을 본 적이 있다.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그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나는 왜 그런 사람이 이상형이냐고 물어봤는데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곰처럼 푸근하고 귀엽고 배 만지고 놀면 재밌을 것 같아서.'


 남자 입장에서는 한 가지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없지만 애완동물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사랑이 가능한 이유는 이미 언급했듯이 여성이 도구적 사랑을 한다는 데 있다. 사랑은 물론 마음으로 하지만 하나의 수단으로써 역할도 한다. 여기서 수단이라는 것은 매우 실질적이고 생활에 관계된 것이어야 한다.


 이 여성의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애완동물처럼 남성을 다루며 모성본능을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보면 그런 펑퍼짐한 남성의 곁에서 자신이 몇 배는 더 예뻐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추한 남성과 같이 있을 때 그녀는 훨씬 더 예쁘고 날씬해 볼일 것이다. 이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만족을 준다. 여성들이 마른 남성을 싫어하는 것도 약해 보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 옆에 가면 자기가 뚱뚱해 보여서 그런 것도 있다.

키 작은 남성 옆에 있으면 자기가 너무 커 보여서 싫어하는 여성도 있다. 


 물론 사랑하는 이유가 이런 이유만은 아닐 테지만 아름다움에 대해 본능적인 집착을 가지고 있는 여성에겐 중요한 사유가 될 수 있다. 오히려 너무 날씬하고 피부가 좋은 남성이 여성에겐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사랑에 빠진 여성은 더할 나위 없이 예쁘게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런데 남자와 함께 있을 때 평소보다 예쁘지 않다면 이 사랑은 할 맛이 안 난다. 


 '그 남자 앞에만 가면 내 피부가 엉망이고 내가 살쪘다는 느낌이 든다.'


 만약 그렇다면 이런 자괴감은 자신감을 상실시키고 곧 상대 탓을 하도록 만들어 관계 발전이 어렵다. 반면 만날 때마다 내가 예뻐 보이고 주연이 되는 느낌이라면 계속 만나고 싶고 만남의 만족도도 높을 것이다. 멋진 남자를 만나서 느끼는 만족감과 내가 이쁘게 보여서 느끼는 만족감 어느 것이 더 클까?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 취향에 달려있지만 둘 다 존재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후자가 강하게 작용하면 미녀와 야수 커플이 탄생하게 된다.

불륜에서 이해할 수 없는 점

 최근 선진국도 그렇고 불륜 남성에 대한 매스컴의 고발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한국에서 성폭력 혹은 불륜 남성에 대한 기사가 났을 때 오히려 아내가 남편의 편을 들어주는 경우가 자주 있다. 남편과 관계를 가진 여성이 더 큰 잘못을 했고 유혹했다며 남편의 편을 드는 것이다. 언뜻 생각했을 때는 배신감에 치를 떨 것 같은데 이런 일도 있다. 이런 심리는 무엇일까?


 우선 불륜과 성폭력의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법적인 차원이 아니고 인문학적인 견지에서 보자. 둘 간의 차이는 한쪽의 일방적인 강요로 이뤄진 것인지 아닌지이다. 만약 남편이 자의로 성관계를 가졌다면 아내의 입장에서 볼 때 성폭력이든 불륜이든 이미 남편이 신뢰를 깬 것이다. 그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굳이 어떤 아내는 성폭력보다는 불륜으로 몰아가려 한다. 즉 남편이 혼자 잘못한 게 아니라 불륜녀와 공동으로 잘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방어적 행동이라고 본다. 성폭력이 아닌 불륜이 된다면 이것은 이성 간의 문제로 전환된다. 그래서 불륜녀가 남편을 유혹했고 남편은 그저 수동적으로 응했다고 한다면 상황은 아내에게 훨씬 받아들이기 나은 상황이 된다. 아내의 심리는 자기 방어적, 현실도피적인 것이겠지만 사랑의 관점에서 볼 때 이미 신뢰는 깨어졌고 이 사랑은 파탄이 난 것이다.


 불륜녀의 유혹으로 상황을 그나마 우호적인 것으로 바꾸고 '남편의 부정'이라는 현실을 도피하려 한다. 그리고 가정을 깨지 않으려는 지극히 미래지향적인 생각까지 담겨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불륜남편을 두둔하는 아내들의 심리도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깨어진 사랑보다는 가정을 지키고 상처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반대로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을 때는 남자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이 경우 본능적으로 남성은 아내를 옹호하지 않는다. 원초적으로 수컷은 확실한 자신의 자손을 남기려는 본능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인지 구분할 방법은 자연적으로는 없기 때문에 자손의 정통성에 대해 불안감을 항상 가지고 있다. 이것은 동물들에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수사자는 무리 내에서 암사자와 영역을 감시하여 낯선 수컷의 등장을 방지한다. 낯선 수컷이 나타나면 싸워서 내쫓는다. 만약 이 과정에서 새로운 수컷이 싸움에서 이겨 우두머리가 되면 기존 수컷의 자손들은 모조리 물어 죽인다. 정통성을 지키려는 수컷의 본능인 것이다.


 인간은 무리 집단의 규모가 커서 이렇게 하지는 못하지만 남성은 남의 자식을 부양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불안은 항상 있다. 그래서 불륜사건이 발생했을 때 남성들이 느끼는 배신감은 사랑에 대한 것보다 남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위기감이 더 크다. 남의 자손을 부양할 가능성, 자기 자손을 남기지 못할 가능성이다. 이것은 남성성의 부정이며 자기가 남자로서 부정되는 느낌과 같다. 요즘 사회에는 남녀가 경제생활을 같이 하고 친자확인까지 가능하지만 본능 속에 남아있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아내의 불륜을 발견했을 때 아내를 두둔하는 남편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불륜과 단순 외도를 구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도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같다고 본다. 감정이 얕은 단순 외도는 순간적으로 충동된 감정이지만 거기에도 최소한의 신뢰와 애정은 담겨있다. 특히 애정이 훨씬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사람이 가진 애정의 양은 총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단순 외도라고 해도 이미 써버린 애정은 가정에서 발휘되기 힘들다. 불륜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불륜과 단순 외도를 구별하려 한다. 


“잠시 만났을 뿐이야. 사랑한 건 아니야.”

“한 때 불장난이야. 진짜 사랑은 너야”


 이런 말 같지 않은 변명도 자주 한다. 사랑은 가치관이 중요하다.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면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바보같이 늘 사랑에 끌려다니며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가치관,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랑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랑을 할지 말지 고민할 때 꼭 상대방의 가치관 혹은 관점을 봐야 한다. 사랑에 대한 관점이 나와 다르다면 사랑이 이뤄져도 고통받을 가능성이 있다.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그리는 사랑의 모습이 얼마나 같은지가 곧 행복의 척도이다.


 이 책에서 불륜 주제가 제일 길어진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의 부끄러운 단면이기도 하고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대목일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이 사랑을 할 때만큼은 머리 굴리지 말고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식으면 식은데로 다른 사랑이 생겼다면 그런대로 솔직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처 없이 사랑을 끝내기는 어렵지만 그나마 솔직하다면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행복해지는 방법도 분명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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