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두니 Jan 06. 2022

아들의 연애를 목격했다

철로 위의 추억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고등학생 아들 녀석이 웬 여학생과 손을 잡고 웃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계단 쪽으로 몸을 피했다. 곧 지하철이 들어와 아들과 여자 친구를 싣고 떠나갔다.

‘아니, 내가 왜 피한 거야?’

심술이 불뚝 올라왔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걸 숨긴 아들이 괘씸했다.

다음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난데없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캄캄한 창문 위로 20대의 내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남자 친구가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있었다. 까르르 웃으며 오르니 안지랑역의 가파른 계단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마지막 계단에 올라섰을 때 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빠와 눈이 딱 마주친 거다!

출구 밖 길가에 거짓말처럼 아빠가 서 있었다!


난 먼저 깍지 낀 손부터 뿌리쳤다. 아빠도 적잖이 놀라신 것 같았다. 아빠와 나, 남자 친구는 정지화면처럼 마주 보고 섰다.

“아, 아빠!”

“어, 그래. 이제 오나?”

“예…….”

“집에 먼저 올라가라. 나, 나는 장 좀 보고 갈라고.”


바짝 얼어있던 남자 친구는 입도 뻥긋 못하고 꾸벅 인사만 했다. 그렇게 아빠와 지나쳐갔다. 그 숨 막힐 듯 어색한 순간은 이후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아빠도 나도 무슨 큰 비밀인 양 함구했다. 그때 남자 친구였던 남편과 나는 그 일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들의 데이트를 목격한 오늘의 나와 20여 년 전 그날의 아빠는 어쩌면 같은 심정 아니었을까? 그저 장 보러 나왔다가 연애하는 줄도 몰랐던 딸이 웬 남자와 손을 잡고 땅에서 솟아오르는 장면을 본 기분이 어땠을까. 멀리서 본 건데도 괜히 서운하고 가슴 뛰는데 정면으로 맞닥뜨린 아빠는 오죽했을까.


지하철 창문에 떠올랐던 20대의 내 모습은 20여 년의 세월을 지나온 중년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지하철을 오가며 만나던 남녀는 결혼을 하고, 그 아들이 자라 여자 친구와 철로 위를 지나다닌다. 가파른 계단을 거뜬히 오르던 아빠는 이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는 계단 말고 에스컬레이터를 찾아다닌다. 철로 위에 겹겹이 쌓인 사연은 추억이 되고 대를 이어 지나온 발자취 속에 인생이 깃들어 있다.


다음에 아들을 또 마주치면 숨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을 진한 추억 하나 만들어줘야 하니까.          


<안지랑역>  by duduni


이전 15화 몽마르트 티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