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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Jan 11. 2022

산책 예찬

<방금 발간한 브런치북에 싣기 위해 발행한 글을 재발행합니다. : 브런치 북 [주제 모르고 맥락 없으면 어때]와 [도시의 자연산책자]에 같이 수록됩니다>


집 근처에 금호강이 흐른다. 나는 몇 년 전부터 하루 한 시간 정도 강변을 걸었다. 순전히 운동이 목적이었다. 운동에 딱히 취미가 없는 내게 그나마 걷는 건 거부감이 덜했다.

그럼에도 음악 없이는 못 걸을 만큼 지루하긴 했다. 쾌감을 줄 때도 있었는데 한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걸을 때였다. 스스로를 고행으로 몰아넣는 구도자가 되어 얄짤없는 자연에 맞서는 듯한 묘한 쾌감이 있었다. 아주 가끔.


그런 걷기가 즐거움으로 바뀐 건 어느 이른 봄이었다. 게으름을 피우다 이 주 만에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시야가 탁 트인 다리로 들어선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강 건너편이 온통 푸릇푸릇한 것이다! 겨우내 허허벌판이던 둔치가 연둣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도 모르게 우뚝 서서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헐!”


두 주밖에 안 지났는데 딴 세상이 펼쳐져 있다니! 무채색이던 세상이 색을 입고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아무도 깨닫지 못한 대자연의 변화를 나 혼자 알아챈 것 같은 특별한 순간이었다.

난 푸른 들판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연두색 풀이 소복이 돋아났고 그 사이로 새끼손톱보다 작은 꽃들도 올망졸망 피어있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을 허공에 고정한 채 영혼 없이 발만 놀리던 그 길에서 난 걸었다 멈췄다 웃기를 되풀이했다. 그동안 보고도 스쳐 지났던 이름 모를 들풀과 들꽃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다.


by duduni


그날 이후 단순한 걷기는 즐거운 산책으로 탈바꿈했다.

들판은 하루하루 새로웠다. 들풀의 성장 속도는 놀라웠고 들꽃의 아름다움은 마음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다채로운 들꽃의 향연에 산책길은 감탄과 환희로 물든 꽃길이 되었다.

이전의 나처럼 무미건조한 얼굴로 걷고 있는 사람들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저들도 어서 빨리 닫힌 눈을 떴으면, 그래서 이토록 예쁜 꽃을 들여다봐 줬으면 싶었다.


산책은 치유와 영감까지 선사했다. 우울하거나 답답할 때면 들판을 거닐어야 살 것 같았고 정체됐던 아이디어도 스르르 풀렸다. 엉킨 마음에 빈틈이 생겨 공기가 통하는 기분이었다.

음악이 나오던 이어폰은 언젠가부터 빼놓고 걸었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를 고스란히 느끼고 싶었다.


산책의 영향은 실로 지대해서 이제는 둔치가 아니어도 수시로 자연과 교감하고 있다.

앙상한 나무의 잔 가지가 그려내는 은은한 하모니, 바스락거리며 말라버린 들풀을 어루만지는 겨울 햇살, 언 땅에 납작 들러붙어서도 잃지 않는 맥문동 이파리의 싱그러운 초록 에너지를 만난다.

따뜻한 계절이 오면 학교 담을 수놓은 장미꽃, 버스 정류장에 드리워진 가로수, 어느 집 대문 앞에 놓인 화분 앞에서도 잠시 발길을 멈추고 보게 되겠지.


이러니 산책을 예찬하지 않을 수 있나.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곳에 핀 꽃, 풀, 나무와 조우하는 자연적이고도 초자연적인 순간이 산책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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