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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Jun 07. 2021

감꽃

너거 외할머니집 

삽짝[사립문] 우측엔 납딱감나무, 좌측엔 도리돌감나무. 

나 어릴 적 우리 가족과 이웃의 간식 나무. 

감꽃 떨어질 때면 나의 엄마는 

“순아, 동네 아아들이 감꽃 다 주워 간대이.” 

하며 아침잠 많던 나를 깨웠지. 

감꽃 주워 실에 꿰어 쌍 감꽃 목걸이 만들어 목에 걸고 

친구들 보라고 서 있던 나. 

올해 이 감꽃 처음 만나 너무도 반가워 

“엄마야!” 하며 눈물과 함께 엄마가 내 맘에 왔뿌맀다. 

감꽃은 내게 그런 꽃이다.

       


어느 아침, 접시에 놓인 감꽃 사진과 함께 엄마가 보내온 문자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투박한 글이 어떤 시보다도 마음 깊이 와닿았다. 감꽃을 줍고 소담스레 접시에 담으며 떠올렸을 엄마의 추억이 눈앞에 그려졌다.

어린 엄마가 흙 마당에 떨어진 감꽃을 한가득 주워 감꽃 목걸이를 만든다. 갓 떨어진 싱싱한 감꽃은 목걸이 두 개를 만들고도 남는다. 어린 엄마는 쌍 감꽃 목걸이 목에 걸고 언제쯤 친구들이 지나갈까,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린다. 늦잠 잔 친구들 부러워하라고 배를 잔뜩 내민 채 의기양양하게 서 있다. 그런 막내 딸내미를 보고 아침밥 짓던 외할머니가 빙긋 웃는다. 


by duduni 


나도 따라 설핏 웃었다. 어린 엄마와 엄마의 엄마가 그림처럼 그곳에 있었다. 사진 속 감꽃은 엄마의 추억을 넘어 나의 추억까지 소환했다. 나를 어느 시절 우리 집 옥상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외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엄마도 똑같이 나를 깨운다. 

“동네 아아들 꽃 다 주워 갈라.”


잠을 덜 깬 나는 반쯤 눈을 감고 옥상에 오른다. 서늘한 아침 공기에 팔을 비벼도 쉬 잠이 깨지 않는다. 옥상에 올라서자 보이는 건 바닥을 뒤덮은 감꽃이다. 밤새 깔린 노르스름한 감꽃 융단을 보니 그제야 눈이 번쩍 떠진다. 장독이며 바닥에 떨어진 감꽃 중에서 실하고 단단한 꽃만 골라 담는다. 바가지가 수북해지면 기다란 명주실에 꿰어 꽃목걸이를 만든다. 사박사박한 꽃의 감촉, 은은한 감꽃 향기, 어쩌다 밟을 때 나는 아삭한 느낌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럴 때가 있지 않은가? 어떤 물건 하나, 어떤 한순간, 언뜻 스치는 향기 한 가닥이 어느 시절로 순간이동시키는 때 말이다.


차를 타고 가다 마주치는 노을은, 나를 어느 시절 아빠의 낡은 차로 소환한다. 근교 나들이 갔다 집으로 가는 길, 창밖의 하늘이 불그스름하다. 차는 먼 산마루 위를 수놓은 주홍빛 노을 속으로 질주한다. 차 뒷자리에 앉은 세 남매의 눈동자에도 노을이 어른거린다. 

“우우와! 진짜 예쁘다!”

찬란한 광경에 입을 벌리고 있노라면 셋 중 어느 하나가 먼저 음을 띄운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 나머지 둘은 기다렸다는 듯 이어 부른다. 역마살 부모님 덕에 차에서 부르는 삼중창에는 도가 텄다. 이윽고 가락은 2 성부 화음으로 확장된다. ‘아아아 아아아아‒’ 

운전하는 아빠는 빙긋, 옆자리의 엄마는 꾸벅, 노을빛 어린 동생들 얼굴은 불긋.

지금도 차창 밖으로 노을을 만날 때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아아아 아아아아-’




기차를 타고 가다 내다보는 창문은, 나를 어느 시절 통일호 열차로 데리고 간다. 숟가락 개수까지 훤히 아는 동네 이웃들과 북적대며 여름휴가 가는 길. 친구들과 옹기종기 붙어 앉아 여행지로 가는 기분을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마냥 들뜬 나는 위에서 뚝 떨어지며 닫히는 무거운 열차 창밖으로 손을 내민다. 바람이 손뼉을 치듯 손을 스치고 지나간다. 시원하다는 말로는 모자란, 어떤 해방감과 짜릿함이 느껴진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엄마 잔소리. 

“손! 그카다 손 잘린다고!”


덜컹대는 의자에 엉덩이가 쑤실 때면 친구들과 우르르 계단 칸으로 간다. 옆 칸으로 가는 통로에 서면 탁 트인 양옆에서 사정없이 바람이 들이친다. 서로의 팔에 몸을 지탱하며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에도 깔깔대며 웃는 재재바른 아이들.

밖으로 손 내밀 수도 없고 뚝 떨어지지도 않는 견고한 기차 통창이 아쉽다. 바람 한 점 없는 열차 통로 계단 칸도 아쉽다. 그럼에도 기차는 언제나 여전히 아련하다. 




산길을 걷다 풍덩 뛰어들 만한 크기의 계곡 물웅덩이를 발견할 때면, 나는 그대로 사춘기 시절로 소환된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입 한번 떼지 않던 그 시절에도 난 가족 나들이만큼은 어지간히 따라다녔다. 

부모님은 계곡의 숨겨진 명당자리를 찜해 놓고서 새벽바람에 우리를 깨워 데려가신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이름 모를 산속 계곡 물웅덩이는 어느 명산의 선녀탕 못지않게 오목하니 넓고 기막히게 맑다. 


동생들은 시원한 계곡물로 그대로 점프한다. 명색이 고독한 사춘기 소녀인 나는 그저 바위 그늘에 앉아 바라볼 뿐이다. 여느 부모님이면 같이 앉아있겠지만 그럴 리가. 한창 수영 배우기에 빠져 있던 엄마는 수모에 물안경까지 야무지게 끼고 물살을 튀기며 접영을 연마한다. 이에 굴하지 않고 아빠는 개헤엄으로 응수한다. 


네 식구의 끈질긴 유혹에 나도 못 이긴 척 물로 뛰어든다. 우리 가족 전용 물웅덩이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물놀이를 한다. 어느덧 바리바리 싸 온 먹을거리는 동나고 다들 지치고 배도 고프다. 

“기다려 봐라. 아빠가 먹을 거 구해올 테니까.”

아빠는 젖은 옷째로 신발도 안 신고 산길을 따라 뛰어오른다. 뜬금없이 어디 가서 먹거리를 구해온다는 건지. 걱정 속에서 기다리길 이 십여 분, 마침내 산을 내려오는 아빠가 보인다! 놀랍게도 손에 부침개 접시를 들고서. 


산길 위 작은 움막에 사는 어떤 할머니가 부침개를 구워 주더란다. 값을 싸지 않게 불렀지만 무얼 사 먹는 자체가 희소한 공간이니만큼 그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더란다. 산나물에 버섯, 깻잎이 들어간 부침개는 내 생애 통틀어 제일 맛있는 전이었다. 접시는 다섯 식구가 한 젓가락씩만 지나갔는데도 금세 말끔하게 빈다. 다들 입맛만 다시고 있는데 짠돌이 아빠가 묻는다. 

“한 판 더?”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고 아빠는 다시 맨발로 산을 뛰어 올라간다.


그때의 아빠는 지금 내 나이 즈음 아니었을까? 물 맑은 계곡 물웅덩이를 보고 있노라면 새끼 새처럼 입 벌리고 있는 자식들을 위해 맨발의 등산 투혼을 불살랐던 아빠와 군침 도는 부침개, 더할 나위 없이 시원했던 물놀이가 절로 떠오른다.      



엄마의 감꽃 사진과 문자 한 통이 아름답던 내 어린 날의 추억을 소환했다. 엄마는 엄마의 어린 날과 당신의 엄마를 그리워하고, 나는 내 어린 날과 부모님의 젊은 날이 그립다. 젊은 부모님에게서 내 모습을 비추어 본다. 엄마의 눈길은 사뭇 우리 삼 남매에게 향하고, 내 눈길은 사뭇 나의 아들들에게 쏠린다. 


방향이 맞지 않는다. 서로 어긋나고 접점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그 눈길에 깃든 건 온통 사랑이다. 부모 자식을 잇는 추억과 사랑은 꼭 마주 보기가 아니어도 괜찮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자 인생인 듯하다.       

지난날의 추억 한 장 꺼내어 나눌 수 있다면, 한 장 뒤에 팔랑거리는 또 다른 순간들을 넘겨 볼 수 있다면, 추억들을 펼친 채 함께 이야기하고 웃을 가족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감꽃 사진을 본 순간, 가슴 뭉클하며 떠올릴 추억이 있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하다. 


엄마에게 감꽃이 그러하듯, 내게 노을은, 기차는, 계곡 물웅덩이는, 그리고 감꽃은 이러하다. 

이런 감꽃이 당신에게도 있는지, 당신의 감꽃은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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