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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Nov 28. 2022

은밀한 민원인

소식지의 한 페이지    photo by duduni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구청 소식지를 넘겨보다 이 사진을 보고 입이 헤벌레 해졌어요. 제가 자주 산책하는 길이 항공 샷으로 찍혀 있었거든요. 워낙 좋아하는 길인데 하늘에서 바라보니 더 근사한 거 있죠! 정말 멋있지 않나요?

오른쪽 위쪽 끄트머리에 있는 다리를 건너 둔치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중간쯤에 보이는 다리를 건넙니다. 그러면 고모들판이 펼쳐져요. 들판 파크골프장을 지나 소식지 한중간에 있는 무성한 은행나무 숲길을 지납니다. 그러고는 왼쪽에 쭉 뻗어있는 아카시아 길을 걷지요.  


입이 헤벌레 해진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요. 왼쪽 페이지에 확대되어 있는 철새 탐조대를 주목해 주십시오. 이 사진에 찍히지 못한 부분부터 아래쪽으로는 철새도래지거든요.  반원 모양의 탐조대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몸을 숨기고 도래지의 철새를 관찰할 수 있어요.


일 년쯤 됐을까요? 저 길을 걷다가 탐조대에 새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빛바래고 낡고 으스러져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어요. 민원을 넣었죠. '알겠다, 교체하겠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 변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민원을 넣었어요. 신고 번호 000번에서 분명  답변을 받았는데 아무 조치가 없다, 어떻게 된 거냐, 언제 할 거냐. '곧 하겠다'는 답을 받았어요. 얼마 후 길을 따라가며 있는 네댓 개의 탐조대를 매의 눈으로 살펴봤어요. 너덜한 안내판을 싹 다 떼어버렸더군요. 마지막에 딱 한 군데 이렇게 새 걸로 교체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음하하하!

새로 부착된 새 안내판  photo by duduni


그러니까 소식지에 나오는 저 새 사진 안내판은 저의 민원으로 완성된 것이지요. 숨어서 은밀히 활동하는 이런 구민, 시민, 국민이 있다는 걸 알랑가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안 알아주니 이 자리에서 스리슬쩍 밝히는 바입니다.


아, 기쁜 소식이 하나 있는데요.

이 산책길을 걸은 지 몇 년인데도 저 사진 속의 은행 숲이 노랗게 물든 걸 한 번도 보지 못했거든요. 작년에는 작정하고 기다렸는데도 못 봤어요. 타이밍을 못 맞춘 탓이지요. (작년 이맘때, 노란 잎을 놓쳐 속상했던 마음을 담은 글을 아래에 붙입니다)


https://brunch.co.kr/@dew1217/94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노오란 은행 숲을 만났답니다! 정말 소원 성취했어요. 멀리서 노란빛을 보고 점점 다가갈 때의 심정이란! 시종일관 웃으며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에 환희가 몇 움큼은 들어있을 거예요. 노란 은행잎 보는 게 뭐 그리 기쁜 일이라고, 싶으신가요? 이 사진들을 한번 보세요. 제 마음을 아실 거예요. 이웃님들, 노란 은행잎 눈에 가득 담으시고 마음이 환해 지시길 바랍니다.


고모들판 은행나무 숲   photo by dud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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