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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Dec 22. 2022

옆 차선 버스에서 크락션이 울렸다

빨간불.

에잇! 끊겼다.

삼거리 골목에서 8차선 대로로 나가려는데 바로 앞에서 신호가 끊어졌다. 짧은 좌회전 신호가 야속했다. 약속 시간이 빠듯했지만 어쩔 수 없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쏜살같이 나가야지, 벼르 기다렸다.


에에에엥!

구급차 소리다. 듣기만 해도 불안해지는 소리. 하던 것을 멈추고 사방을 살펴보게 되는 소리.

어디서 나는 거지?

운전 중에 들리는 구급차 소리는 진원지를 가늠하기 힘들다. 앞뒤 좌우를 살펴보니 오른쪽 멀리서 구급차 경광등이 보였다. 앞을 가로막는 차가 없어야 할 텐데... 다행히 1차선이 비어있어 구급차는 지체 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하필 그때 기다리던 좌회전 신호가 들어왔다. 내 차가 제일 앞이었다.

구급차와의 거리로 봐서 내 차는 충분히 먼저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내가 움직이면 뒤차들이 줄줄이 따라 올 게 분명했다. 평소 구급차의 길을 터준 경험이 있지만 내가 먼저, 주도적인 적은 없었다. 다른 차들이 움직이면 따라서 피해 주면 되는 위치였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칼자루를 쥐고 판단해야 하는 위치가 된 거다.


브레이크를 밟은 채로 버텼다. 구급차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무사히 지나갔다.

다행히 좌회전 신호도 끊기지 않았다. 그제야 차를 움직였다. 내 뒤차들도 신호를 무사히 건넜다. 큰 도로에 들어서자 전방은 빨간 신호등이었다. 앞서가던 구급차는 계속 사이렌을 울리고 있었다. 신호대기 중이던 차들이 어떻게든 길을 터주었다. 마침내 구급차 교차로를 지나갔다. 길을 내어 준 차들은 뒤죽박죽 엉킨 채로 신호를 기다렸다. 차들의 엉킨 대열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 있다니...


그때였다.

옆차선에 있던 버스에서 크락션이 빵! 울렸다.

우회전하려는 앞에 있는 차들이 엉켜 길을 안 비켜준다고 크락션을 울렸을 터.

운전대에 손이 닿으면 저절로 작동되는 신비의 모드가 딸칵 켜졌다. 이 세상 모든 운전자를 적으로 간주하며 갖은 악담과 불평과 욕을 남발하는 난폭 운전자 모드 말이다.

거 참, 구급차 비켜준다고 그런 건데! 그거 쫌 못 기다리고! 쯧! (굉장히 순화해서 쓴 문어체임을 눈치채셨으리라)

나는 도끼눈을 뜨고 옆차선에 서 있는 버스 기사를 팍 째려봤다.


아!

순간 할 말을 잃고 멍해졌다.

버스 기사가 왼손을 들고 있는 거다. 나를 향해.

장갑 낀 왼손은 엄지를 척, 올리고 있었다!

처음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재빨리 알아채지 못했다.

쭈뼛쭈뼛 고개를 돌리고서 되짚어보고야 알았다.

나 칭찬받은 거야?

실실 웃음이 났다.


신호가 바뀌어 버스는 우회전, 나는 직진을 했다. 아쉬웠다. 내가 엄지 척의 뜻을 더 빨리 알아챘거나 좀 더 순발력이 있었거나 버스 기사에 대해 괜한 편견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을 텐데. 살짝 고개 숙여 답인사를 하거나 같이 엄지 척을 날렸을 텐데.


이후 약속 장소까지  운전자 모드에서 벗어나 웃음 띈 얼굴로 운전했다. 그러면서 웃음을 선사한 버스기사의 행동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칭찬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씩이나?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잠깐만 되돌아보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칭찬하는 데 많이 인색한 편이다. 말 한마디, 엄지 손가락 하나면 될 일인데도 속으로 생각하고 만다. 칭찬하고 싶은 마음을 밖으로 꺼내 표현하는 것은 분명 용기다.

알고 지내는 사람을 칭찬하는 데도 인색한 사람이 더러 있다. 이해는 잘 안 되지만 개인 성향일 수도 질투일 수도 있다. 성향과 질투의 감정을 극복하고 꺼내는 칭찬이라면 나름의 용기를 낸 거라 볼 수 있겠다.

모르는 사람을 칭찬하는 건 특히 어렵다. 여기엔 확실히 용기가 필요하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면 더 그렇다.


구급차가 오면 길을 비켜주는 건 당연하다. 당연한 일을 하는데 누군가 칭찬을 해 준다면, 다음에 더더욱 잘하고 싶지 않을까.

당연한 일에도 칭찬하는데 잘하는 일이라면 칭찬을 아낄 필요가 전혀 없다. 잘하는 일을 잘한다고 말하는 건 칭찬을 듣는 사람에게 한마디 이상의 의미가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칭찬을 하는 사람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쁨이다. 선물을 주는 사람이 더 기쁘듯 칭찬을 하는 사람이 느끼는 기쁨도 못지않다. 거기다 하나의 칭찬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낸다. 칭찬받는 사람이 더욱 잘하고 싶도록 만드는 프로세스다. 버스 기사에게 엄지 척을 받은 이야기를 이렇게 전파하는 것이 그 방증이다. 칭찬하는 용기가 칭찬받을 일을 더 많이 양산하는 셈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크락션을 울리며 칭찬을 건네는 용기. 닮고 싶은 덕목이자 마음이다.

칭찬하는 용기를 내어 보자.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스스로에게 하는 전언이자 다짐이다.  

  



*클랙슨이 맞는 표현이지만 어감상 크락션으로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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