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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Jan 26. 2021

마늘 한 톨만 한 가능성


따사로운 햇살이 손짓한다. 홀린 듯이 베란다로 나가 초록이들을 들여다본다. 앞다투어 꽃망울을 피워내는 녀석들이 기특하다.

누렇게 떠서 영 시원찮은 녀석들이 몇 보인다. 분갈이할 때다.


 

잔뿌리를 털어내고 새 흙을 채운다. 몸채를 불린 녀석은 큰 화분으로 옮기고, 시든 잎을 솎아 성글어진 녀석은 작은 화분으로 옮긴다. 이리저리 화분 돌려막기를 하다 흙째로 구석에 내버려 둔 화분까지 꾸역꾸역 들고 온다.


여러 계절 동안 말라붙어 화석처럼 굳은 흙을 파낸다. 마른 먼지를 피우는 삽 끝에 뭔가가 걸린다.

‘응? 이게 뭐지?’

마늘 한 톨만 한 게 나온다. 한두 개가 아니다. 적게 잡아도 서른 개는 넘는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열매 같기도, 씨앗 같기도 하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뿌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뿌리들을 일일이 골라내어 새 흙에 간격을 두고 심는다. 배양토를 덮고 물을 듬뿍 준 다음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놓는다. 속는 셈 치고 키워보기로 한 것이다.


열흘쯤 지났을까? 이쑤시개 마냥 뾰족한 싹 하나가 흙을 뚫고 올라와 있다.

“드디어 올라왔구나!”

반가움에 주책없이 인사를 건넨다.

며칠에 걸쳐 화분 가득 쏙쏙 힘차게 싹이 올라온다. 여느 새싹처럼 동그마한 모양이 아니라 대쪽같이 곧고 길게 위로만 뻗는다.

“고놈 참. 네가 무슨 부추라도 되니?”

부추? 그러고 보니 두 해 전쯤에 잎이 부추처럼 생긴 녀석을 키웠었는데.

“맞다! 애기범부채!”

녀석의 정체가 밝혀졌다. 싹이 트고 잎이 나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by duduni


아예 시들어 영영 사라졌다고 여겼는데. 꽃에서 씨앗만 받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꽃과 잎이 지고 나서도 알뿌리 속에 생명의 기운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흙 속에서 수년간. 기특한 걸 넘어 경이롭다.


꽃은 저마다 피는 계절이 다르다 했다. 늦되는 이들에게 힘이 되는 말이다.

개화 시기가 다르다 해도 지켜보고 기다려주는 건 어디까지나 일 년 안이다. 계절을 한 바퀴 돌아서도 꽃 피우지 못하면 가망 없다 치부하며 으레 기대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한 해를 한참 지나서도 피지 못하는 꽃도 분명 있다. 이 애기범부채처럼.

시간이 좀 더 걸렸을지라도 여물게 가능성을 품고서 자기만의 준비를 단단히 해 온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만 해서도 안 된다.

적절하고 적합할 때 물을 주어야 한다.


딱 맞는 때에 마늘 한 톨 같은 알뿌리를 발견한 우연에 감사한다.

이 야무진 알뿌리가 하얀빛, 주홍빛의 애기범부채 꽃으로 피어날 날이 머지않다.    


<피어난 애기범부채 꽃> by dud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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