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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Feb 01. 2021

그림 선생님과 비 시리즈

베란다 보일러 연통에서 '타당, 탕' 소리가 난다. 비가 내리며 연통을 두드리는 거다. 오늘 아침 일어나자 탕탕, 소리가 들렸다. 비님이 오시는구나.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그림 선생님이 계신다. 아이들을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보내고 몇 시간이나마 여유가 생겼을 때였다. 그림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손쉽고도 저렴한 방법을 찾아 검색하던 중, 한 문화센터를 알게 되었다. 마침 수강생 모집기간이었고 두 자리쯤 남은 상태. 당장 전화로 수강 신청을 했다. 그 수업의 선생님이다.


그 선생님은 기존의 문화센터 강사들과 사뭇 달랐다. 그때까지 내가 경험했던 몇몇 강좌의 강사들은 수강생들과의 교류를 가장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교류 덕에 재수강하는 장기 수강생이 있고 그들이 있어 수업이 폐강되지 않고 유지되는 듯했다.


이 선생님은 이러한 교류나 친교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직 유화를 잘 가르치는 데만 열심이었다. 수강생들과의 식사자리뿐 아니라 당시 명절이며 무슨 날이 되면 으레 거두어 전달하던 금일봉도 모조리 거절했다. 여기까지는 딱히 문제랄 게 없다. (난 이런 점 때문에 더 좋았다)

진짜 문제는 수강생이 날이 갈수록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었다. '징하다' 말하며 나가떨어진 수강생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강의 방식이 맞지 않았던 거다. 그들은 선생님이 하나하나 짚어주길 원했다.


"선생님,  이 색을 만들려면 무슨 색이랑 무슨 색을 섞어야 해요?"

"이것저것 직접 해 보세요. 그래야 알아요."


"선생님, 이 사진 누가 찍은 건데 저 이거 그리고 싶어요."

"직접 찍은 사진으로 그리세요. 남의 사진 말고요. 그래야 자기 그림이 돼요."

"아, 난 이게 좋은데."

이런 경우가 몇 번 되풀이되면 "에라이"하며 나오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의 강의 스타일이 좋았다.

여느 강사들처럼 처음부터 쉬운 길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직접 사진을 찍는 방법부터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 그림 작업을 이어나가도록 알려주셨다. 작은 문화센터가 아닌 미술 대학의 강의실에서 전문적인 수업을 듣는 듯했다.


그릴 사진을 고르고, 구도를 잡고 스스로 색을 만들어 보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누군가의 그림을 수정하는 시연을 보며, 붓 잡는 법, 색 섞는 법, 수정하는 부분, 붓 터치까지... 눈 한번 깜빡하기 아까울 정도로 집중해서 수업에 참여했다.   


선생님이 한 사람의 그림을 오래 붙들고 앉아있으면 볼멘소리들이 터져 나오곤 했다.

"선생님은 왜 내 그림은 안 봐주는 거야?"  

수업이 진행되며 터득한 건, 선생님은 봐줄 만한 그림을 봐준다는 것이었다. 지난주에 그렸던 그 상태 그대로 들고 오는 그림은 본인이 진행하는 것이지, 선생님이 손댈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방향을 영 못 잡고 헤매는 그림이나 열심히 그리는 사람에게 가서 코멘트를 해 주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은 결국 옳았다. 얼마 안가 수강 등록은 초단위로 마감되었기 때문이다.


기초 과정을 마친 후에 선생님은 내 그림에 한 번도 붓을 대지 않으셨다. 내가 원하지 않은 것도 있고 선생님도 말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그런 점이 참 좋았다.

일 이년 지난 후에는 몇 달이 지나도록 그림에 아무 멘트를 달지 않기도 했다. 그건 지금 잘하고 계십니다. 계속 그렇게 진행하면 될 것 같아요, 하는 뜻이었다.


이런 선생님을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지금은 나 혼자 그림을 그린다. 살갑지 못한 성격에 선생님께 연락도 잘하지 않는다. 지난 전시 때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혼자 고심한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고, 이렇게 계속하면 된다고, 언제든 찾아와 편하게 조언을 구하라 말해주셨다. 어찌나 위안이 되면서도 죄송하던지...


그때 문화센터 유화 수업에서 무언가 하나의 주제로 그리는 '시리즈'는 내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비 시리즈'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차 창에 어린 빗줄기와 풍경이 당시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선생님도 좋은 아이디어라며 지지해주셨다.


<Rain. 11AM>  65.1×53cm.  oil on canvas.  by duduni


그때 그린 비 그림이 여러 장 된다.

내 나름의 노하우도 터득했다. 바탕과 자연스러운 빗방울을 표현하는데 요령이 생겼다.

빗 자국을 표현할 때면 숨을 참고 터치를 해야 한다. 나만의 방식이다.


   <Rain. 6PM> 90.9×72.7cm. oil on canvas.  by duduni  


비 시리즈를 볼 때면 선생님 생각이 난다. 열정을 불태우던 그때의 나도 떠오른다. 그때의 열정이 어디에 숨어있을까? 지난 그림을 하나씩 꺼내본다.


<Rain. 10AM> 60.6×50cm.  oil on canvas.  by duduni


내 전시에서 비 시리즈를 보고 간 지인이 어느 날 카톡을 보냈다. 비 오는 날 신호대기 중 와이퍼를 멈추고 찍은 사진이었다. 비가 오니 내 그림이 생각나 한번 찍어봤는데 멋있게 찍혔다며 보낸 것이다. 그 카톡을 받고 무척 뿌듯했다.

나의 그림이 어느 배경, 어느 순간 그에게 떠오른 것이.

그림으로 인해 그가 일상의 작은 순간, 예술적 체험을 한 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런 것이다.

내 그림을 본 누군가가 보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예술성을 발견하는 것.

예술을 감상하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스스로 창작의 욕구를 느끼고 실행하는 것.


이런 순간과 사람들이 늘어나면 이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Rain. 5PM> 116.8×91.0cm.  oil on canvas.  by duduni

       


https://youtu.be/wJzoos4rE_o

<White Gloves>

Khruangbin 의 곡으로 몽환적이고 빈티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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