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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Jul 23. 2021

당신이 날 버릴 자격이 있어?

벤자민과 노란각시버섯

베란다에 나갔다가 화들짝 놀랐다.


오랜 세월 우리 집 베란다의 메인 모델이었던 벤자민. 높고 넓게 뻗은 가지에 달린 수많은 잎이 커다란 파라솔처럼 작은 화분들에 그늘을 드리워주었었다. 어느 날부터 끈적한 액체가 바닥에 떨어졌고 그 정체는 벤자민에 기생하고 있는 깍지벌레의 분비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맨 위에 있는 풍성한 나뭇잎이 벤자민.  by duduni


가지와 잎 사이, 잎 뒤쪽에 하얀 솜털 같은 알집을 짓고 끈적한 액체를 분비하는 깍지벌레. 웬만한 친환경 살충제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인터넷에 물어보니 1000배 희석해서 쓰는 농약을 살포해야 한다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농약 살포는 불가능했고, 어쩔 수 없이 하나하나 잎을 닦고 벌레를 잡아주었다.

하지만 한계에 달했다. 끈끈이 액은 아래에 있는 다른 초록이들에게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병을 치료하려면 병균이 사는 서식지를 없애야 하는 법.


잎이란 잎을 다 잘라내고 살충제를 천에 묻혀 줄기와 가지를 일일이 닦아주었다. 앙상한 가지에선 금세 새 잎이 돋아 다시 울창해졌다. 그러면 숨어있던 깍지가 다시 침범 - 이파리 커트 - 침범 - 삭발. 이 과정이 몇 번 반복됐다. 줄기의 옹이까지 침투한 깍지 솜털을 보고서야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작년 가을, 지긋지긋한 깍지로부터 벗어날 최후의 보루로 '줄기 치기'를 감행했다. 잎자루가 아니라 뿌리와 가지를 연결하는 몸통에 해당하는 줄기를 댕강! 자른 것이다. 수관은 싹 쓸어 쓰레기봉투에 넣어버렸다. 속이 다 시원했다.


큰 화분에 아더왕의 검처럼 줄기 막대기만 꽂혀 있는 형상이었다. 지금은 볼품없어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새 잎이 날 거야.


3월, 4월, 5월.... 기다려도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물을 주어도 주르륵 밑받침으로 흘러내릴 뿐이었다. 줄기마저 딱딱하게 말라 그대로 죽은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방제 실패였다. 깍지에게 진 거다. 아!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는구나.

너무나 아쉬웠지만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었다. 한더위가 지나고 나면 줄기를 뽑아 버리고 화분을 싹 비운 다음 새 흙을 채우고 다른 걸 심어야겠다, 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아더왕의 검 / 줄기를 뚫고 나온 새싹!!  by duduni


화들짝!

그 갑옷처럼 두껍게 말라버렸던 벤자민 막대기에 뽀록! 새싹이 돋아나 있는 것이다!!

이럴 수가!!

반가운 마음에 눈을 바짝 대고 들여다보았다. 연둣빛 새싹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그렇게 무식하게 날 자를 수가 있어? 당신이 그러고도 주인이야? 엉?

물도 제대로 주지 않아서 있는 뿌리 없는 뿌리 다 끌어당겨다가 겨우 목숨 부지했는데.

거북이 등껍질 같은 줄기 뚫는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런데 뭐? 그만 갖다 버린다고? 그 말 듣고 내가 얼마나 서러웠는지 알아?

난 죽어라고 노력했다고. 살아남으려고 악착같이 버텼단 말이야.

당신! 살면서 나만큼 애써 본 적 있어? 나만큼 노력해 본 적 있냐고. 그런 적 있다면 순순히 넘어가 주지.

할 말 없지?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런 당신이 날 버릴 자격이 있어?


자격 없지. 미안 미안. 앞으로 더 잘 가꿀게. 내가 너한테 배운다. 화 풀어라... (쭈글)


난 입을 꾹 다물고 흙이 촉촉해지도록 물을 주었다. 그리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




베란다 입구를 나오려는데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확 들었다. 돌아보니 조그마한 율마 화분에 무언가가 볼록 솟아있었다. 이건 또 뭐지? 다시 허리를 숙이고 들여다봤다.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내가 눈에 보이나 보지? 빨리도 보네.

처음 나 딱 보고 당신이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맞혀 볼까?

누가 노란색 배스킨라빈스 숟가락을 꽂아뒀나, 싶었지?  


아니면 노란 에어팟인 줄... 그래서 넌 도대체 누군거냐?


노란 각시 버섯이야.

독버섯이란 설도 있고 식용이란 설도 있지만 정확히는 식독 불가라는 거.

당신 이렇게 예쁜 버섯 본 적 있어? 거기다 나 크는 속도 보면 더 깜짝 놀랄 걸?

이런 놀라운 균류인 나를 당신이 버릴 자격 있어? 있냐고?


어. 있지 그럼!
보아하니 넌 내가 심은 애가 아니고 어디서 포자가 날아온 모양인데.
이쁜 건 인정한다만,
우리 율마에 기생해서 살려고 하지 마라잉. 어디! 확! 마!
노란각시버섯 반나절 동안의 변화 (8AM / 5PM /10PM)  by duduni

레몬 색깔처럼 예쁜 노란각시버섯은 봉지에 싸여 쏙 뽑혀버렸다. 그런데 그 자손들이 자꾸만 화분에서 올라온다. 학자들이여, 노란각시버섯의 식독 여부를 빨리 판명해주시라...


누가 쳐다보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구석에 있는 벤자민 새싹이 나를 계속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크...


지켜보고 있다. 열심히 살아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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