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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Sep 06. 2021

할머니 어벤저스 만세!

민폐 끼치지 맙시다.

아침 7시 30분 알람 - 띠리리리.

천근 같은 몸에 주섬주섬 운동복을 끼워 입고 집을 나섰다.

일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산책을 나온 건 '나팔꽃' 때문이었다.


전날 오후, 오랜만에 산책을 나섰다가 입을 오물거리듯 쪼그라들어있는 나팔꽃들을 본 것이다.

온통 오물오물, 쪼글쪼글한 나팔꽃들.

나팔꽃 - 모닝 글로리!

아침에 피는 꽃 아니겠는가! 꽃 핀 걸 보려면 아침에 가는 수밖에.

오늘 난 다 계획이 있다. 나팔꽃을 본 다음 돌아오는 길에 식빵과 우유를 사서 브런치를 만드는 것.


목적이 분명한 산책이기에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비가 많이 와서 떠내려온 쓰레기도 많고 강물도 불어나 있었다.

두다다다다!

갑자기 굉음이 들렸다. 깜짝 놀라 올려다보니 엔진을 단 패러글라이딩 3대가 머리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저런 미친!

저 패러글라이딩을 몇 번 본 적 있다. 상습적으로 이곳을 날아다닌다. 저렇게 큰 소리를 내면 사람뿐 아니라 이곳 생태계의 동식물 모두 놀라 자빠질 거다. 난 급히 사진을 찍었다. 신고하려 한다. 민폐 끼치는 사람들에게 경고라도 해 줘야겠다.    

동력 패러글라이딩 민폐인.  by duduni


화를 삭이며 걷는 나의 레이더망에 포착되는 장면이 있었으니, 역시나 또 낚시꾼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낚시꾼을 아래위로 스캔했다. 그을린 피부에 탄탄한 몸, 한 성깔 하게 생긴 60대 남자. 입술 질끈 깨물고 지나쳤다.

분하다! 짜증 난다. 한마디도 하지 못한 비굴한 나 자신이 더 짜증 난다.


다리 너머 들판은 풀들이 폭발하듯 자라 있었다. 여름의 흔적이다. 오솔길에 좌우로 늘어선 망초는 내 키를 훌쩍 넘어섰다. 나를 호위하는 호위병 같다. 군데군데 들꽃들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못 보던 하얀 꽃이 있어 가까이서 접사로 사진을 찍었다. 다 찍고 나서 고개를 드니, 꽃 아래 푸른 잎들이 뭉게뭉게 펼쳐져 있었다.

헉! 이건! 가시박이었잖아?

가시박 꽃을 처음 봤다. 생태계 교란종인 가시박이 온 들판을 뒤덮고 있었다. 키 큰 나무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가 주렁주렁 줄기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탄식이 절로 나왔다. 손 쓸 수 없을 만큼 들판 전체에 번져있었다. 이것 또한 신고해야겠다. 대대적으로 제거 작업을 해야 할 것 같다.    

가시박 꽃 & 이파리.  by duduni
원시림 분위기지만 알고보면 가시박이 장악한 들판과 나무.  by duduni


한걱정을 하며 걸어가는데 드디어 나팔꽃이 보였다. 모닝 글로리가 활짝 피어있었다!

그래! 민폐인들과 낚시꾼과 가시박은 잊자. 오늘 나의 목표는 나팔꽃이니까!

파란 미국나팔꽃이 아침 햇살에 방긋 웃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핑크 나팔꽃은 왜 없지? 웃고 있는 건 파란 꽃들뿐, 핑크는 여전히 오물오물이다. 아직 안 핀 건 지, 벌써 피고 진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러면 곤란한데... 내가 원한 건 파랑과 핑크가 한데 어우러진 장면인데...


나팔꽃이 핀 길을 따라 아무리 걸어도 파란 꽃들뿐이다. 거기다 으레 만나는 꽃과 햇빛과 잎이 절묘하게 조화된 포토제닉 장면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기대했던 장면을 만나지 못해 힘이 빠졌다.

아! 오늘 되는 일이 없네. 아침 산책은 영 나랑 안 맞네.

툴툴거리다 이내 반성 모드로 들어갔다.

아니야, 내 욕심이 과했어.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자연을 거닐면서 내 틀에 맞는 장면을 찾고 있으니... 건방지기 짝이 없지. 활짝 핀 파란 나팔꽃을 만난 것에 만족하자.


터벅터벅 발길을 돌렸다. 들판 한쪽에 시든 국화꽃들이 줄 지어 심겨 있었다. 비가 많이 와서 썩은 부분이 많았다. 공공근로 할머니 네 분이 일일이 국화를 손질하고 계셨다. 이른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시다.

할머니들 옆을 지나가던 바로 그때였다. 그 청정한 들판에서 한줄기 담배 냄새가 훅 코를 찌르는 게 아닌가!


난 번개같이 홱 돌아봤다.

한 남자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다른 손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포착되었다!

민폐인에 낚시꾼에 가시박도 모자라 담배라고라?


꾹꾹 눌러뒀던 울화가 뇌를 거치기도 전에 바로 입으로 튀어나왔다.

공원에서 담배 피시면 안 되거든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크게 나왔네 어쩌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왠 걸쭉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누가! 누가 담배를 피노? 어?


할머니 한 분이 소리치신 거다. 옆에 있던 또 다른 한 분도  거들었다.

여서 누가 담배 피노? 누고?


다른 할머니들도 모두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키며 보란 듯이 할머니들에게 일러바쳤다.

저 아저씨요!! 저 아저씨가 담배 폈어요!


할머니들과 나는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를 째려봤다. 그러고는 눈을 부라렸다. 다섯 여자가 눈 10개로 욕을 퍼부은 것이다!(숫자 그대로 읽기를 권함)


할머니 어벤저스의 눈 욕 공격! by duduni

남자의 동공이 흔들리는 게 똑똑히 보였다. 부끄러운 건 는지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계속 통화하는 척했다. 담배는 엉거주춤 손가락으로 비벼 끄는 것 같았다. 상황은 끝났다.

할머니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이고 국화 손질을 했고 나는 팩 돌아서 가던 길을 갔다.

쯧! 어딜!

할머니 어벤저스와 즉석 합동 공격이 성공한 거다!

벙싯, 웃음이 났다.


상황을 되새겨보니, 내가 지나가기 전부터 남자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할머니들은 담배 냄새가 싫었던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말 못 하고 묵묵히 일을 하는데 내가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거다. 옳다구나, 싶었던 할머니가 일부러 크게 소리를 치신 거다. 불이 화르르 붙은 셈이다.

푸하하하, 이렇게 통쾌할 수가!
할머니 어벤저스 만세!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지 생각 좀 하면 좋겠다. 본인은 좋아서 하는 일이라도 다른 사람이 불쾌감을 느끼거나 피해를 입는다면 그게 바로 민폐다. 산책길에서 동력 패러글라이딩이든, 상수원 보호구역에서 낚시든, 공원에서 담배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동(이기적 사람이라 하고 싶지만 참는다)들은 들판에 창궐하는 가시박과 다를 게 없다. 자신은 줄기를 뻗을 뿐이라 말하겠지만 다른 식물들을 타고 오르고, 칭칭 감고, 모조리 뒤덮어 햇빛을 가려버린다. 피해 식물들은 고사하고 만다. 그래서 생태계 교란종인 것이다.

민폐인들이여, 사회 교란족이 되고 싶은가?

주위에 민폐 끼치는 사람들이 있으면 다들 지 말고 알아듣게 참교육 좀 해 주면 좋겠다. 대놓고 폐 끼치는 인간들도 있지만, 자신이 민폐인 인 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사회 교란족이 되기 전에 교화될 수 있지 않겠나.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룰루랄라 집으로 향했다.

어머나? 핑크 나팔꽃이 피어있었다!

아, 너희들은 늦게 일어나는구나.

핑크 나팔꽃은 늦잠꾸러기였던 것이다. 내가 너무 일찍 나왔던 모양이다.

산책 가는 길엔 기분 나쁜 일 천지였는데, 오는 길은 좀 낫네.
핑크 나팔꽃 & 파랑과 핑크.  by duduni


이런 생각은 금세 무색해졌다. 빵집에 들렀는데 매대가 휑했다. 식빵은 12시나 돼야 나온단다.

에이! 이런 식빵!

할머니 어벤저스를 빼면 죄다 엉망이다.

아침 산책, 나랑 안 맞는다, 안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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