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이 있는 날이었다. 한 해는 간단히 하고 한 해는 정밀하게 한다. 올해는 정밀한 해다. 가기 전부터 걱정에 휩싸여있었다. 타고난 걱정 유전자가 있는 데다 왠지 느낌이 안 좋았다. 하기 전에는 늘 느낌이 안 좋긴 하지만.... 매년 하던 위내시경도 어쩌다가 3년 만에 하게 되니 별별 상상이 걱정을 비집고 들어왔다.
병원 가는 길, 두 가지 후회가 들었다.
아이들 얼굴 찬찬히 들여다 보고 한 번 안아주고 올걸...
집 좀 치워놓고 설거지도 하고 나올걸...
갑작스럽게 신변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평소에 이런 것들을 정리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좀 많이 과한 면이 있지만 이 마음에 공감하는 분들이 있으리라.
병원에 도착해 안내하는 대로 검사를 받았다. 막힘없이 진행되던 검사가 MRA실 앞에서 정체되었다. 검사 시간이 10분이나 걸리기에 대기자가 많았다. MRA가 무슨 검사인지 몰랐는데 MRI와 같은 기계를 쓰고 있었다. 원통 안에 들어가 받는 검사였다.
이런! 두 가지 우려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나는 저 기계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갑갑하고 숨 막혔던 기억이다. 나도 모르게 살짝 눈을 떴었는데 눈앞에 다가온 벽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마치 관 속에 갇힌 것처럼 공포스러웠다. 하, 큰일 났네.
두 번째는 자력이었다. MRI는 자기장을 이용하는 기계다. 며칠 전 뉴스에 나왔던 사고 기사가 떠올랐다. 검사 도중 자력 때문에 산소통이 MRI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 희생자가 나온 무서운 사고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신청을 했으니 검사를 받아야 했다.
내 차례가 되어 검사실로 들어갔다. 방을 쭉 둘러봤다. 물품을 얹어둔 카트가 바로 옆에 있었다. 기계적으로 설명하며 빨리빨리 기계에 눕히려는 방사선사에게 타임을 외쳤다.
"저기요, 저 쇠는 안 치워도 되나요?"
"쇠요? 쇠가 어딨어요?"
"저 수레요." (카트라는 말이 순간 생각이 안 났다)
방사선사는 쓰잘데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누우라는 말을 눈으로 하며 건조하게 대꾸했다.
"저거 쇠 아닙니다. 누우세요."
"네..."
입이 쏙 들어갔다. 한 가지 우려는 사라졌고 이제 어떻게든 10분만 견디면 된다. 시계를 볼 수도 없으니 무작정 참아야 하는 것이다.
방사선사는 솜으로 귀를 막고 귀마개를 씌우고 덮개를 덮은 다음 이불을 덮어주었다. 움직이면 안 되고 소리가 시끄러우니 놀라지 말라고 알려주었다. 꼼짝 않고 누워 바짝 긴장한 상태로 있는데, 귀마개에서 소리가 나왔다.
♪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랍니다. ♬
어머나! 헤드폰이었어? 아, 너무 센스 있다. 음악을 틀어주다니!
평소 트로트는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순간 귓가에 들리는 이 음악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사막을 걷다가 갑자기 저기 앞에 오아시스의 나무 꼭대기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한 곡이 보통 3-4분 정도니 세곡만 들으면 끝난다. 한 번도 불러본 적 없지만 내가 가사를 알고 있었다. 과연 히트곡이로세. 눈을 감고 속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진동과 함께 원통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구궁 쿵쿵쿵쿵 쾅쾅쾅쾅 우당당당...
기계에서 나온 기괴한 소리가 음악을 삼켜버렸지만 베이스에 깔린 반주 리듬이 간간히 들렸다.
찬찬찬찬~~
트로트의 경쾌한 리듬이 이렇게 좋았단 말인가? 난 생명줄을 붙잡듯 간신히 들리는 트로트의 끝을 잡고 버텼다.
기계 소음 속에서 노래는 다른 곡으로 바뀌었다. 반주 느낌이 달랐다. 중간중간 이런 가사가 들렸다.
♩♫ 있다 있다 있다요♪♬
이 노래도 장윤정 목소리 같았다. 이 곡도 신나는데?
세 번째 노래 중간쯤 되었을 때 기계가 움직였다. 드디어 끝난 것이다. 원통을 빠져나올 때 내 발가락은 까딱까딱 리듬을 타고 있었다.
음악이 우리 삶의 순간순간에 어떤 영향을 불러일으키는지 몸소 체험했다. 음악은 흥겹고 즐거울 때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힘들고 긴장되고 두려운 순간에 위로와 에너지를 주는 한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고된 일을 할 때면 입 맞추어 부르던 노동요며 생과 사를 오가던 시위 현장에서 부르던 투쟁가도 이런 이유에서 나온 걸 거다.
MRI 기계 안에서 조우한 트로트를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나면 어떤 느낌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어찌 됐든 장윤정의 목소리가 나오면 한 번 돌아볼 것 같기는 하다. 이렇게 트로트에 자연스레 입문하게 되는 건가. 같이 고생한 조강지처와는 헤어지지 못한다는 원리가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건가.
아, 방금 검색해 보고 알았다. '있다 있다 있다요'가 아니라 '이따 이따 이따요'라는 걸.
이 가을,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분위기의 잔잔한 음악도 좋지만 둠칫 둠칫 까딱까딱 가볍고 경쾌한 음악도 괜찮을 것 같다. 우리 이따 이따 이따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