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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Dec 02. 2021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 순간이 좋다.

어느 날 주방 천장이 젖어있는 걸 발견했다. 윗집에서 누수가 된 것이다. 1년 전 이사 들어올 때 설치한 정수기에서 물이 샌 거였다. 정수기 업체에서 처치를 하고 난 후 다행히 물이 말랐다. 천장에는 직경 40센티 정도의 얼룩이 남았다. 윗집 새댁이 아기를 업고 와서 얼룩 사진을 찍고 사과도 했다. 곧 처리를 하겠노라고 말하기에 천천히 하라고 했다.


며칠 후 도배 업체에서 견적을 보러 온다기에 문을 열어주었다. 우르르 들어와서 보더니 주방 전체를 도배해야 한다고 했다. 새댁의 시어머니로 추정되는 인물이 얼룩 부위만 덮어 씌우면 안 되겠냐고 했다. 그건 안된다고 말했다. 비용을 아끼려는 건 알겠는데 집은 엄연한 재산이다. 누수가 우리 탓도 아니고 집을 팔 경우, 누수 얼룩으로 덧방 한 집이 제값을 받을 순 없다. 이런 건 차치하더라도 덧방은 좀 심하지 않나.


도배가 문제가 아니라 천장 안쪽이 어떻게 됐는지 살피는 게 중요했다. 새댁이 어련히 알아서 처리를 할 줄 알았는데 믿은 게 잘못이었다. 믿음이 안 가기에 업체를 우리가 알아보겠다고 했다. 누수 전문 도배 업체를 검색했다. 가장 꼼꼼히 설명하는 업체를 선택했고 견적을 보러 왔다. 15년이 넘은 우리 집의 경우, 천장이 석고보드이기에 물을 한 번 먹으면 곰팡이가 생기고 자국이 언젠가 부풀 거라고 했다. 그렇기에 애초에 천장을 뜯어 어디까지 물이 흘렀는지 확인 작업을 하고 보드를 새로 붙인 후 도배를 해야 한단다. 작업은 3일 예상.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첫째 날 온 주방과 거실을 비닐로 보양작업을 했다. 막아버렸으니 3일 동안 주방, 거실을 못쓰는 거다. 매트 깐 곳을 신발을 신고 지나가야 하고 방을 드나들 때는 비닐 틈을 헤집고 겨우 문을 열고 신발 벗고 들어가야 했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밥은 다 사 먹어야 했다.


공사를 하는 동안 난 안방에서 글을 썼다. 평소에도 안방에서 글을 쓰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다만 커피를 만들어 먹을 수 없어 사 먹었다. 포장한 음식을 방에서 먹었다. 난 본디 남이 해 준 밥을 좋아한다. 그렇다 보니 포장한 음식이 다 맛있었다. 밥을 아예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집밥 스타일인 둘째 녀석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별 수 있나.


3일간의 공사가 끝나고 청소부터 소독까지 싹 다 하고 철수했다. 어제였다. 방에 있는 빈틈마다 테트리스처럼 끼워 넣었던 식탁과 의자, 거실 테이블을 제자리에 놓았다. 오랜만에 걸레를 들고 온 집안을 닦았다. 심지어 절대 손댄 적 없던 방 문이며 소파 밑, 피아노 밑까지 닦았다. 비닐로 막았다 해도 틈마다 먼지가 다 들어간다. 주방 싱크대 위에 아무 생각 없이 놓아두었던 컵과 조미료 통들도 다 닦았다.

평소 공주 손목인 양 손목에 힘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사는데 이상하게 힘이 나서 모조리 닦았다. 천장은 깨끗한 벽지로 도배되었고 덕분에 묵은 먼지들도 말끔히 청소했다.


오늘 낮, 3일 만에 커피를 만들어 소파에 앉았다. 햇살 들어오는 베란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아이들이 말했다.

엄마, 우리 집이 이렇게 좋은 지 몰랐어요.

어수선하고 불편하게 3일을 살아보니 우리 집의 평범한 상태가 얼마나 좋은 지를 알았노라는 뜻이었다.

정말 그랬다.


싫은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닌, 집이 그냥 집이지 뭐, 하던 우리 집.

아! 나도 전원주택 지어 이사 가고 싶다, 하며 외면했던 우리 집이 이렇게 안락하고 편안했다니.

역시 고생을 해 봐야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내게 특별한 일이 일어나길, 지금과 다른 공간에 있길 바라 왔건만, 지금만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 순간이 좋다.


거실과 주방을 맨발로 누빌 수 있고 집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고 빨래를 해서 널 수 있고 먼지 없는 집안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어 좋다. 더불어 가족, 친구, 우리 집... 까지.

늘 그 자리에 있어 소중함을 잊고 있었던 당연한 것들에 감사하는 오늘이다.  


by dud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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