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시움⌟ Episode 10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났다.
지도 교수님은 1년만 있으면 내 재능으로 박사학위 취득은 금방일 거라 말씀하셨으나 실제론 불과 3개월 만에 끝내버렸다. 나도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겠다. 삶의 의미가 부여되고 나니 그 어느 때보다 의욕적이었던 것 같다. 개인 시간, 사적 취미, 인간관계 등 모두 단절하고 잠도 줄여가며 미친 듯이 공부하고 논문 작성에 몰두했다. 다행인 건 서울대학교 대학원 측에서 아직 내 미완의 논문과 가설 기반 시뮬레이션 모델 등 모두 하드 드라이브에 보관해 두었기에 작업이 수월했다. 게다가 이미 논문은 거의 완성된 상태였으며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마치 어제 하던 작업을 이어하듯 마치 컴퓨터같이 나의 머릿속의 하드 드라이브에 정확히 메모리가 남아있었다. 물론 지도 교수님이 인맥도 좀 당겨 주셨는지 전액 장학생으로 돈 걱정 없이 학위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 제대로 말하지 않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려서 가끔 영상통화를 하며 서로의 안부도 주고받았고 아버지는 전혀 죄송스러울 게 없고 오히려 내가 너무 자랑스럽고 끝까지 응원해 주셨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이 세상 그 어떤 약물보다 강력한 치유제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드디어 졸업하고 교수님과 함께 한국 국립 과학 연구소 내부로 출입할 첫날이 되었다. 애초 정부 보조. 전액 장학금을 수령하는 조건이 졸업 후 이 한과연에서 최소 10년 이상 일하는 것이었다. 나는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은 것이라 여겼다. 전액 장학금도 주는데 졸업 후 일자리까지 준다니. 그 얼마나 달콤한 제안인가.
찰스 4세 교수님은 한과연 소속이지만 내가 졸업하기까지는 원래처럼 내 지도 교수로 임시 재직하셨다. 솔직히 나를 위해 뭘 이렇게까지 해주시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어쨌건 드디어 대망의 내 직장이 될 곳으로 떠나는 날, 교수님과 나는 정부 마크와 ‘한국 국립 과학 연구소’와 연구소 상징과 같은 문장이 그려진 차량에 타고 함께 출발했다. 물론 가는 거리가 어느 정도 있는 편이라 대화가 없을 순 없었다. 우리 찰스 교수님은 한순간도 조용히 있는 법이 없다. 그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하지만 전반적으로 유쾌하고 좋으신 은사님이다.
“그래, 이제 진짜 시작이네? 실감이 나냐?”
차량이 출발한 지 1분도 안되어 말을 꺼내셨다.
“아 … 뭐 아뇨…. 아직은 크게 못 느끼겠네요. 비록 차에 그려진 의미도 알 수 없는 멋들어진 심벌을 봐도 말이죠.”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내심 긴장되었다.
“하하! 맞아. 나도 그 로고는 아무리 봐도 대체 뭘 뜻하는 건지 모르겠어. 얼핏 보면 날아오르는 새 같기도 하고? 사람 모양 같기도 하고. 볼 때마다 다르다니까? 하하.”
“그렇죠? 하하하….”
나는 어색하게 짧게 대답할 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교수님은 이어서 이야기를 하셨다.
“하하…. 흠흠. 어쨌든 간에 형식적이긴 하지만 처음 도착하면 일단 면접을 보게 될 거야. 면접관은 두 명인데. 물리 과장, 그리고 핵물리학 팀장인 나야. 그러니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거야. 아! 미리 말하자면 과장이 좀 까칠해. 나보다 젊은 여잔데 말도 별로 없고 항상 재미없이 딱딱해. 무슨 로봇 보는 거 같아.”
흠. 은근 자기보다 어린 사람보다 낮은 직책인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 보다. 티를 안 내려고 하시지만 이상하게도 그 마음이 나에게 전이되었다고나 할까? 표현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렵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에 대해 결코 언급하진 않았다.
“그래도 교수님이 저 잘 봐주실 거죠? 예? 헤헤.”
나도 살짝 농담조로 말을 던져보았다. 그러자 잘 받아주신다.
“이 녀석아. 너랑 나랑 인연이 얼마나 되냐? 나만 믿어. 그리고 이제 난 교수가 아니라 팀장이야. 앞으로 팀장님이라고 부르면 돼. 알아, 알아. 나도 알아. 처음엔 어색하겠지. 하지만 금방 입에 붙을 거야. 그리고 연구소가 한국 역사에 유례없이 과학 발전에 천문학적 예산을 투입한 최초의 시설이다 보니 전 세계적으로도 인재들을 발굴해서 데려오고 있어. 미국은 물론 이미 100년도 전부터 그래왔으니 미국인이 아쉬워서 굳이 올 일은 거의 없겠지만 아무튼 외국인 연구원들도 만날 수 있을 거야. 완공하고 가동한 지 이제 2년째라 추가로 짓는 시설들도 있고 아직 공사하는 부지도 있지만 넌 그냥 우리 팀만 신경 쓰면 돼. 뭐, 아직은 말이지.”
나도 궁금한 말은 많았다.
“우리 팀원들은 사람들 어때요? 제 말은 제가 신입이잖아요? 괜히 첫인상 잘 못 보이고 싶지도 않고.”
“음, 국제적인 기관이다 보니 네가 느끼기에 좀 생소하고 파격적인 분위기가 들긴 할 거야. 뭐 마찬가지로 적응하기 나름이지. 팀원들도 좋은 사람들이고 내가 팀장인 이상 니 뒤는 내가 봐줄게. 하하!”
나도 모르게 살짝 피식 웃음이 났다. 교수님의 말에 약간 긴장이 풀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뭔가 기억은 안 나지만 교수님으로부터 감지한 기운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교수님이 내가 왜 그토록 필요로 했는지 이유가 본디 있을 법한데 도무지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럼 너무 배은망덕한 태도가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런 의문은 내 잠재의식 저편에 묻어두었다.
이윽고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서 연구소 입구를 앞두고 저 뒤에 높게 솟은 탑과 같은 구조물과 주변의 엄청난 규모의 부지에 높고 거대한 건물로 둘러싸인 광경에 압도되었다. 전통적인 육면체 기반의 건물이 아니라 벌집, 또는 축구공과 같이 둥글면서도 육각형과 오각형으로 이루어진 미래지향적인 디자인과 끝이 보이지 않는 너무나도 거대한 크기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곳은 가히 인간의 손으로 빚어낸 거대한 산맥 같았다.
한창 감탄하고 있던 나는 교수님이 등을 탁 침과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얌마. 침 흘리겠다. 입 닫고 어서 들어가자고. 그래그래. 장난 아니지? 하하하!”
교수님도 그 심정을 공감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뉘앙스나 언어적인 게 아닌,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느꼈다. 솔직히 요즘따라 특히 주변인의 감정이나 속내가 잘 보이는 기분이다.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제스처나 반복행동 등을 나도 모르는 새에 모두 파악을 한 것인지 아직 설명은 못하겠지만 마치 상대방의 감정이 내 마음속에 투사되는 느낌이다. 썩 유쾌한 느낌은 아니지만 최대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남의 속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장 경비들이 지키는 문들을 지나 리셉션 데스크로 향했다. 명색이 접수대일 뿐이지만 규모에 걸맞게 이 건물동 전체가 접수 부서였다. 로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섞여서 이리저리 움직여댔고 랩코트를 입은 사람, 군복 차림의 경비원들, 정재계에서 힘 좀 쓸 거 같은 민간인들과 외국인들. 마치 기차역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나는 여기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으니 교수님이 알아서 어련히 이끌어주시겠거니 했다.
“입구부터 요란하고 정신없지? 여긴 그래도 양반이야. 뭐 어쨌든 우린 예약된 일정에 따라가면 되니까 나만 따라오라고. 가면서 간략하게나마 시설 설명해 줄게.”
역시 든든하신 분이다. 아버지와 떨어진 이후로 가장 내게 아버지 같은 분이셨으니.
“일단 여기 연구소는 크게 3가지 부서로 나뉘어있어. 과학부, 기술부, 그리고 의학부. 그 아래에는 전공별 과들로 나누어져 있고 또 세부 전공으로 나뉜 팀으로 이루어져 있지. 우리로 예를 들자면 과학부 물리학과 핵물리학 팀 소속이지. 그러나 다른 팀, 또는 다른 과, 심지어 다른 부와도 연계하여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하기도 해. 그리고 정부의 지적 자산 개발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만큼 경비도 삼엄한 편이고 안보 문제도 있기에 뭐 이것저것 비밀도 많을 거고 제한적인 것도 있을 거야. 아무튼 부딪혀 봐야 알아. 말로 하는 것보단 직접 체험하는 게 가장 낫지 않겠어? 곤란한 질문은 다 내가 받아줄 테니 걱정 말고. 알겠지? 아! 말하다 보니 다 왔네. 여기서 이제 간단한 문답형 면접을 받을 거야. 자 들어가자고.”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치 텅 빈 강의실 같았다. 새하얀 바탕의 벽과 밝은 조명이 들어차 있는 방이다. 면접관용 책상과 내가 앉을 의자가 구비되어 있고 구석구석엔 먼지가 두껍게 쌓인 용도를 알 수 없는 과학장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과장님은 오고 계시나 봐. 시간을 참 칼같이 맞추는 분이거든.”
“아 그러시군요…. 저는 여기 앉으면 되겠죠?”
“그래. 이제 들어오신다고 하니 나도 자리에 가 있으마. 형식적인 거니 너무 긴장하진 말고.”
이윽고 물리학 과장이 방에 들어왔다. 순간 닭살이 돋을듯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매우 도도하면서도 표정. 변화 없이 들어왔고 이국적이면서 신비로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분명 한국인 같았지만 희미한 회색에 가까운. 푸른빛의 눈동자를 가졌으며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단정하게 묶었다. 아마 혼혈이지 싶다. 나이는 나보다 좀 더. 많지만 원숙미가 느껴지는 아름다움에 잠시 넋이 나갔다.
— 탁. 과장은 가져온 서류뭉치를 책상에 탁 치면서 면접의 시작을 알렸다.
“저는 물리학과를 총괄하는 물리학 과장입니다. 그럼 면접을 시작하도록 하죠.”
역시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매우 사무적인 태도이다. 왜 찰스 교수님이 로봇이라고 불렀는지 이해가 갔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우리 교수니….”
순간 과장은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여기선 팀장님이라고 부르세요. 더 이상 본인의 지도교수가 아닙니다.”
분명 형식적 면접이라 했건만. 상당히 깐깐한 사람인 듯하다. 하이톤의 목소리를 일부러 저음으로 내려는 듯한. 목소리이다. 젊은 여성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무시당하는 것을 의식하여 일부러 근엄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예, 잘 알아들었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과장님.”
그러자 조용히 내 눈을 노려보듯 응시하더니 질문을 시작했다.
“스스로에 대해 설명해 보세요.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음… 너무 광범위하고 모호한 질문 같은데, 좀 더 구체적으로 여쭤봐주시겠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또 차가운 서리의 기운을 내뿜으며 눈에 힘을 주며 다시 말을 하였다.
“여기선 저만이 질문합니다. 당신은 질문할 권한이 없습니다. 짧고 간략하게 대답하세요.”
완전 얼음장 같은 태도이다. 유난히 타인에 대해 배척하고 불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자신은 나름 감추려 했겠지만 불가사의하게도 나에겐 투명한 유리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다. 이런 걸 육감이라고 하는 건가? 나조차도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하겠다. 이런 능력은 아버지와 지낼 때와는 다르게 타인들을 접하게 되면서 우연히 조금씩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려왔다. 처음엔 우연의 일치라고 여겼지만 갈수록 무언가 알 수 없는 게 존재한다는 걸 몸소 체험해 왔다. 솔직히 썩 맘에 들진 않는다. 능력이라 해야 할지, 저주라고 해야 할지.
“예, 실례했습니다. 질문에 답하자면, 저는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현실주의자처럼 계산적이고 이기적이란 뜻이 아닙니다. 현실에서의 나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함을 알고 있고 그런 것들은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기에 억울하지만 현실과 타협해야 하면 하는 편이고 기회가 오면 알아차리고 놓치지 않습니다.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 대해서 현실이 허용하는 한 저의 모든 것을 쏟아서라도 끝을 보려는 스타일입니다.”
나도 잘 모르겠다. 적절히 대답한 건지. 애초에 답안지 따위나 기출문제가 존재하는 게 아닌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대한 개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이 허용한다면 어떠한 불편함이나 장애물이 막더라도 끝을 볼 용의가 있습니까?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많은 마찰이 생길 텐데 괜찮겠습니까?”
일부러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의도적으로 던지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든 싫든 간에 그 ‘기운’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한편으론 반칙하는 기분이라 썩 맘에 들진 않는다. 하지만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을 고민한들 어쩌겠는가?
“제가 좋아하고 자신 있으며 잘할 수 있는 분야에 한해서입니다. 피차 알다시피 제가 소속되어할 연구에 대한 질문을 돌려서 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수고를 좀 덜어드리도록 하죠. 예. 저는 제 연구분야에 한해서는 끝까지 파헤칠 생각입니다. 물론, 허락받는 범위 내에서 말이지요.”
가만히 옆에서 듣고 계시던 찰스 교수, 아니 팀장님은 그 얼음같이 차갑고 도도한 과장이 한방 먹은 듯한 나의 말에 내심 자랑스러움과 웃음이 느껴졌다.
과장은 분명 당황했지만 겉으론 거의 표현을 하지 않았다. 신입에게 역공을 당한 것이 기분이 나빴던 걸까? 얼핏 관찰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는 하나 그녀의 동공은 수축되었고 관자놀이 측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며 목 부근 돌출된 동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쉽게 보였다. 이건 단지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것처럼 보인다. 나는 남에게 상처 주기를 싫어하는데 이렇게 속은 연약한 사람일지 처음엔 인식하지 못하였다.
과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척하며 질문을 이어갔다.
“아시다시피 이 연구소는 지적 자산을 통해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상을 떨치게끔 강인한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설립되었습니다. 따라서 국가 안보와 연관하여 수많은 보안 절차와 규칙 등 일부 자유가 제한됩니다. 본인 스스로 이런 환경에서 오랜 시간 지낼 자신이 있습니까? 그러한 규제에 따른 걱정거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마 내 의지를 떠보려고 하는 말이리라.
“과장님, 저는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인한 폭격으로 고향마을 자체가 사라지고, 어머니는 제 눈앞에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신체가 훼손된 채 사망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살아남은 저로선 그 이후로부터 웬만한 일로는 저는 두려움을 느끼려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지옥을 경험했기 때문이지요. 충분한 답이 되었길 바랍니다.”
팀장님은 자신이 끼어들 틈은 없지만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 것처럼 흥미롭게 지켜보고 계셨다.
“그럼 자신만만하다는 뜻이겠지요? 알겠습니다. 앞으로 지켜보도록 하죠. 아, 마치기 전에 하나만 더 물어보죠. 어머니를 그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잃었는데 업무 수행하는 데에는 지장은 없겠습니까? 정신검사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까?”
하…. 그냥 그대로 끝냈다면 좋았을 것을.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면 가졌지 악감정은 전혀 없지만 왜 저렇게까지 뒤끝을 부리는지, 그것도 감히 내 어머니를 언급하며 말이다. 나는 그래서 대답 대신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을 꺼냈다.
“과장님도 전쟁 중 누군가를 잃으셨군요. 아주 가까운 사이의 사람 말입니다. 물론 그로 인해 변화를 겪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로 남편은 아니겠군요. 이미 전쟁 한참 전 이혼하셨을. 겁니다. 그럼 자식이겠지요. 과장님 외모로 대강 나이를 유추해 보았을 때 아이는 8살 내지 10살 정도였겠군요. 흠…. 통계적으론 모자보단 모녀간의 유대감이 더 끈끈하기 마련이므로 그렇게 깊게 숨겨진 슬픔이라면 딸이었겠네요. 유감입니다, 과장님.”
그러자 그녀는 마치 숨은 치부를 들통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눈이 커지고, 호흡이 빨라지며 콧구멍이 넓어져 보인다.
“아… 아니 그런 건 어떻게….”
나는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슬픔이란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과장님. 오히려 감추려 들수록 더 곪아 들어갈 겁니다. 어쨌든 과장님도 업무를 지장 없이 보시는데 저도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자신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한 답변이 되었겠지요?”
그러자 그녀는 죽일듯한 적대감을 투사하면서 눈은 나를 강하게 노려보고 양쪽 턱 근육이 마구 움찔거리며 붉게 칠한 입술을 잘근거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깊게 숨겨둔 슬픔을 이해해 줄 몇 안 되는 사람이고 충분히 그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다만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남몰래 앓아왔으리라. 나는 아버지라는 버팀목이라도 있었지만 그녀는 여태껏 혼자서 감당해내왔을 것을 생각하니 딱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도움받기를 원치 않는 자는 결코 도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준비되기 전까진 어떻게 해줄 방도가 없었다.
그 와중 눈치를 보고 있던 팀장님은 사태를 수습하려 나서셨다.
“네, 훌륭한 답변이었습니다. 과장님, 면접은 이만하면 된 거 같군요. 여기서부턴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절차는 제가 알아서 진행시키고 제 연구팀이 있는 연구실로 데려가도록 하지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얼른 나를 데리고 방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솔직히 나는 큰 감정의 동요 없이 충실히 대답했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긴 복도를 지나 물리학과가 위치한 과학부 A동 건물로 향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후 팀장님이 말을 먼저 꺼내셨다.
“야, 너 장난 아녔어? 하하! 그 얼음 여왕의 얼어붙은 심장을 그대로 타격하다니!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첫 만남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하하… 뭐,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단 거 하난 확실하네요…. 에휴, 첫날부터 상사에게 찍히면 그 사람이 퇴직할 때까지 고통받는다는 게 만국 공통 직장인들의 고충 아니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과장님 좋은 사람 같으세요.
그냥 대인관계에 서투르셔서 그렇지 진심으로 그런 식으로 구는 건 아닐 겁니다.”
그러자 팀장님은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괜찮아 임마. 뭔 일 생겨도 내가 다 커버 쳐줄게. 내가 있는 동안은 맘 놓아도 돼. 야 근데 마지막에 그건 무슨 뜻이야? 대인관계가 서툴고, 진심으로 그렇게 구는 건 아니라니? 너 오늘 처음 얼굴만 봤잖아. 평소에 괜히 휘하 연구원들한테 짜증 부리고 막 깐깐하게 다시 정리하게 만들고 뭐 아무튼 물리 과장은 소셜 스킬도 별로고 다들.불편해하는 사람이지. 남의 뒤에서 안 좋은 소리 하고 싶진 않지만 그냥 평판이 그렇단 거야. 완벽주의자에, 황소고집에, 부하 마구 대하기 등… 뭐 그런 행동들 있잖아?”
역시 예상대로다. 인간관계는 그 사람을 오래 알아갈수록 진정한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지만 여전히 첫인상에서도 많이 알 수 있는 법.
“뭐, 관찰력 덕분이죠. 뭐 일부러 남들을 막 주의 깊게 지켜보고 그런 건 아닌데, 뭐랄까… 모르겠어요. 그냥 막제 눈엔 미세한 잠재의식적 행동들이 확 띄어 보이더라고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는데 그 왜 비유하자면 책에서 중요한 내용이나 단어에 형광펜 칠해놓으면 책을 탁 펼쳤을 때 자동으로 형광 칠 된 글부터 눈에 들어오지요? 그런 거랑 비슷한 거 같아요.”
이게 일단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설명 방식이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하.”
순간 불신의 기운이 느껴졌다. 나름 진지하게 설명해 본 건데 초자연적인 미신 정도로 치부하시나 보다.
“무슨 뜻이시죠?”
그러자 팀장님은 힐끔 쳐다보며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씀하셨다.
“에이, 뭘 그리 아닌 척하는 거야. 그 과장, 성격은 저래도 솔직히 예쁘장하잖아? 그러니 눈이 많이 갈 수밖에.
고작 떠올린 변명이 그런 초능력이었어? 여긴 명색이 과학 연구소야. 근데 괜찮아. 나도 이해해. 너같이 젊은 남자가 미녀를 보면 눈길이 꽂히겠지. 자연스러운 거니까 부끄러워 안 해도 돼. 나도 20년만 젊었어도… 하하! 뭔 말인지 알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 물론 아름다운 외형에 호감이 간 것은 사실이나 이 재능인지 저주인지 모를 능력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 안 하고 처음 마음을 터놓았는데 그냥 변명쯤으로 여기다니.
“아니, 찰스 교수님, 아니, 팀장님! 그게 아니라 저는 진짜로…!”
“아! 드디어 도착했구만. 이제 여기서부터 연구동이야. 난 안쪽에서 기다릴 테니 너는 랩코트랑, ID 카드랑 뭐 기타 등등 받고 들어오면 돼.”
내가 말을 하려는 도중에 갑자기 말을 끊어버리셔서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이참에 팀장님은 분명 좋은 사람이지만 개인적 이야기를 진지하게 터놓기엔 부적절한 상대라는 걸 깨달았다. 앞으론 이런 말도 주의하며 가려서 얘기해야지.
“네 안쪽에서 뵙겠습니다….”
이윽고 곧 행정 직원 한 명이 브리프 케이스를 하나 들고 내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그쪽이 핵물리학 팀 신규 멤버이시죠? 안 그래도 우리 연구소 요즘 메인 프로젝트가 그쪽 분야거든요! 아, 부담 드리려는 건 아니고요. 아무튼 여기 가방 안에 필요하신 건 모두 다 들어있어요. 모르겠다 싶으신 건 예상 문답지가 든 매뉴얼도 들어있으니 그걸 참고하시면 되실 거예요. 그럼 합류를 환영합니다! 이제 옆에 있는 직원용 라커룸에 들어가셔서 지정된 관물함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직원은 자기 할 말만 휙 떠나버렸다. 내 관물함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이런…. 일단 들어가 보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라커룸 안에 들어와 의자에 걸터앉았다. 똑같이 생긴 관물함들이 연달아서 수없이 줄 서있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일단 건네받았던 브리프 케이스부터 열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겉으로 보이는 걸쇠식 잠금장치가 없이 매끈하여 어떻게 여는지 알기 어려워 잠시 당황했지만 금방 작동 방식을 이해했다.
“첨단 시설이라더니…. 첫 관문부터 장난 아니구먼?”
혼자 중얼거리며 윗면 한가운데에 매끈한 유리 같은 재질에 엄지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철컥하고 열렸다. 역시! 그러고 보니 기시감이 드는 게 처음 찰스 팀장에게 연락받고 수령했던 정체불명의 스마트 기기도 지문을 이용했던 게 기억났다. 그땐 눈도 갖다 댔는데 잘 생각해 보니 그때 잠금 해제용이 아니라 내 생체 데이터 수집용이었나 보다. 한방 먹었군.
난 개의치 않으며 그대로 케이스를 오픈하자 벽면에 ‘PN-7’이라고 굵은 글씨로 하얗게 쓰여있었다. 처음엔 제조사나 모델명인가 싶었으나 곱게 접어 포개어져 들어있는 내 랩코트의 가슴 주머니에도 똑같은 코드가 쓰여있었다. 그리고 ID카드 겸 명찰을 보니 내 사진 아래에도 똑같은 글자가 적혀있었다. 그러고 보니 팀장님의 랩코트에는 ‘PN-L’이라는 문자가 프린팅되어 있던 것이 기억난다. 추정컨대 직원별 고유 식별코드 같은 것인가 보다.
아무튼 나의 관물함도 같은 코드가 쓰여있겠지.
그렇게 똑같이 생긴 구조의 라커룸 내를 배회하다 내 관물함의 위치에 도달했다. 그리고 앞에 서니 녹색의 격자형 레이저가 얼굴을 향해 빛을 내뿜더니 철컥하고 문이 열렸다. 아마 안면인식형 잠금장치인 듯하다.
그렇게 열어보니 세면용품, 벽면에 부착된 거울형 스마트 스크린, 연구소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셔츠, 슬리퍼, 운동복 등 여러 가지 기본적인 일상용품들이 들어있었다. 10여 년 전 육군 훈련소 입대하던 때가 겹쳐 보일 정도이다.
브리프케이스에 든 업무 매뉴얼 안에서 연구소 내의 독특한 규칙들을 읽어볼 수 있었다.
동료와 사적 관계 금지, 외부와 통신은 극히 제한적으로 통제되며 과장급의 허가와 사유가 있어야 함, 동료들과 서로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 본명이나 과거 배경은 일절 밝히지 않고 부여받은 코드명으로 호칭할 것, 나이 등으로 인한 위아래 서열 형성은 철저히 금지하며 모든 직원은 평등함. 기본적으로 경어체는 쓰지 않는 것을 권장하지만 공식 석상이나 특별히 예의를 갖출 때엔 사용 가능.
대충 읽어 보았지만 아까 팀장님이 적응하기 까다로울 것이라는 말씀이 이런 걸 의미하였나 보다. 얼핏 상당히 파시즘적인 내용이다. 물론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고 국제적인 인원들, 특히 서구권 우방국 위주로 인재를 선별해오다 보니 그 정서에 맞춰 나이 상관없이 반말해도 상관없다는 듯하다.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다고 느꼈지만 내가 어찌하겠는가? 매우 실험적인 시설이기도 하고 산업스파이가 함부로 넘볼 수 없을 것 같긴 하다.
그러한 규정들은 그러려니 하고 입고 온 옷 위에 랩코트만 걸쳐 입고 목걸이형 ID 카드 겸 사원증을 목에 건 후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까 팀장님이 출입한 입구로 가서 똑같이 카드를 갖다 대고 출입하였다. 전통적인 줄이 늘어나는 카드인 줄 알았는데 자석처럼 탈부착 가능한 방식은 신선하게 느껴졌다.
“어이구, 뭐 하느라 이제 왔어? 한참 기다렸네!”
팀장님이다. 딱히 짜증 나 보이지는 않는다.
“죄송해요. 첨에 설명도 없이 007 가방만 주고 가버려서 여는 방법을 알아내고 관물함 위치 찾기도 어려웠거든요. 게다가 여기만의 독특한 규칙이나 관습에 대해 읽어보기도 했고요. 솔직히 아직 이해하려 노력 중입니다.”
그러자 팀장님은 그 마음 이해한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셨다.
“하하하! 여기 처음 오면 전부 다 그래. 열이면 열. 모두가. 참 불친절하기 짝이 없지? 하하. 뭐 하지만 여기까지 아무 설명 없이 무사히 도달한 거 보면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고급 인재들만 모집한다는 걸 반증하기도 해.”
말이 되는 설명이긴 하다. 어느 정도 지능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들어올 수 있는 시설이겠지.
“아 그렇군요. 근데 이 목걸이는 잡아당기는 줄 형식이 아니라 자석으로 탈부착하는 방식이네요? 신선한 방식이네요. 네오디움인가요?”
이상하지만 나도 모르게 사소한 부분에 관심이 가서 호기심에 한번 여쭈어보았다.
“아 그거? 아냐 아냐. 영구자석이 아니라 전자석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 잠금장치야. 네가 문을 열기 위해 탈착하려고 손에 쥐면 그것을 감지해서 전류가 자동으로 끊어지고 톱니형 잠금장치가 풀리는 방식이야. 반대로도 역순으로 작동하고. 이 카드는 생각보다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물건이라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알겠지?”
탈착 메커니즘만 들어도 흥미가 생기는데 고도의 기술이 집약되어 있다니. 나는 궁금증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네 알겠습니다! 근데 팀장님 그럼 이 카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어요?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플라스틱 카드 같은데 어떤 기능들이 있나요?”
역시 과학도답게 궁금한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팀장님 또한 순순히 응해주셨다.
“그래 알았어. 일단 뒷면에 작게 보이는 솔라 패널이 보이지? 여기로 태양광 에너지를 배터리에 충전하지. 물론 그것뿐 아니라 손으로 쥘 때, 몸에 지니고 있을 때 신체에 흐르는 생체전류를 끌어와서 자동으로 충전되지. 사실 이 얇은 카드의 부피 대부분이 얇게 만든 배터리야. 전통적인 리튬이온배터리와는 차원이 다른 효율을 보여주는데, 자세한 건 전기, 재료공학과에 물어봐. 나도 잘은 몰라. 그리고 본인 사진과 코드명이 적힌 앞면에는 마이크로렌즈로 된 센서가 있어서 눈을 갖다 대면 홍채인식을 통해 앞면 전체가 액정으로 바뀌면서 2차 보안인증이 필요할 때 유용하지. 이 스크린은 단순한 가젯들을 가지고 유용하게 쓸 수 있어. 메모하거나, 계산기, 일정관리 등 말이야. 그래서 보통 스마트카드라고 불러”
신선한 충격이었다. 일반 신용카드 같은 플라스틱 카드같이 작은 물체에 저렇게 많은 기능이 들어있다니! 미래로 온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꿈의 장소와 같이 느껴진다. 시중에 저런 제품은커녕 근접한 제품조차 내놓은 기업이 없는데 과연 누가 개발한 것일까? 과연 이 시설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이윽고 내가 앞으로 일하게 될 핵물리학 연구실과 팀원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도 당당하게 ‘PN-7’이라 쓰여있는 나만의 키카드 겸 신분증을 랩코트에 달고 팀장님과 함께 연구실에 입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긴장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품에 안은 채 드디어 조우하게 되었다.
“흠흠, 여러분 주목해 주세요. 여기 오늘부터 함께 일하게 될 ‘PN-7’입니다. 특채로 들어왔기에 여러분들이 많이 알려주고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언제나처럼 팀워크를 중시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로 연구에 임해주시길 바랍니다. 아 그럼 신규분이랑 간략히 인사 나누고 업무와 업무환경 등에 대해 자유롭게 소통해 주세요. 이상입니다.”
솔직히 좀 놀랐다. 찰스 4세 교수님, 즉 이젠 팀장님인 그에게 이런 면도 있는지 몰랐다. 생각보다 말을 정중하고 유연하게 잘하시는 듯하다. 항상 내겐 털털하고 유쾌했던 그였으니. 물론 그로 인해 나에 대한 불필요한 이목을 자아내었다. 이는 나를 간단한 소개로 끝내지 않은 순간부터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만 쳐다보는 눈길들이 너무나 불편했다. 물론 일반 직원들이나 인턴, 보조원 등은 나랑 엮일 일이 거의 없으니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지만 핵심 팀원들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고 말았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왜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본명을 쓰지 말라더군요. 코드명은 ‘PN-7’입니다. 신참이라 모르는 게 많으므로 선배님들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어색한 말투로 공식적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그러자 여성 멤버 한 명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불쑥 다가왔다. 뭔가 조짐이 좋지 않게 느껴졌다.
“안녕? 히히. 어서 와. 난 3번이야. 아, 너 말투 식으로 하자면 저는 ‘PN-3’입니다! 하하하!”
뭐지? 날 조롱하는 건가? 신입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네? 3번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당황스러웠다. 정확히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었는데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말아서 그런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에이, 장난친 거 가지고 엄청 진지하네. 그렇게 딱딱하게 안 굴어도 돼. 여기서는 적어도 팀원들끼리는 위아래가 없어. 나이가 많든 적든, 연차가 오래되었든 간에 선배도 후배도 없고 형 누나 동생도 없어. 모두가 평등하거든. 그래서 너도 나한테 편하게 반말해도 돼. 아니면 누나~라고 불러줘. 히히히!”
딱 봐도 나보단 어린 여자가 당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친해지면 배울 것도 많을 것 같았다.
“네, 3번 님. 그럼 저는 7번인 건가요? 팀 안에서는 코드명 앞 이니셜은 생략하나 보군요. 근데 아직 반말하기는 제가 좀 어렵네요…. 하하….”
갑작스러운 여기만의 문화에 나는 적응할 기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 느꼈다.
“오~ 너 눈치 빠르구나? 맞아. 우리끼린 그냥 숫자로만 불러. 아 그리고 우리끼리만 말인데, 숫자로만 부르는 건 너무 딱딱해서 서로 별명을 지어주고 그 닉네임으로 부르기도 해.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끼리만의 비밀이야. 알겠지? 존댓말 하든 반말하든 네 자유이지만 좀 적응해 보면 반말이 오히려 더 편할 거야. 아 참, 나만 너무 떠들었네? 다른 팀원들도 만나봐. 다들 생긴 것보단 좋은 사람들이야. 크크크. 나는 여기에서 유일한 여성인 홍일점이고. 그러고 보니 너 꽤 핸섬하네? 근무시간 마치고 나랑 한잔할래?”
정신없이 말을 쏟아대는 그녀의 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예? 그 저 뭐….”
나는 혼란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머? 얘 얼굴 벌게진 거 봐. 크크크. 하하하!”
그때 저 안쪽 가운데 앉아있던 남성이 일어나서 다가오며 말을 했다.
“3번. 거기까지 해. 7번 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저 여자는 아무한테나 저렇게 수작 부리거든. 난 1번이야. 호칭은 네 편한 대로 부르면 돼. 그리고 모르는 것 있으면 나한테 말하면 돼. 한 식구가 된 걸 환영한다.”
시의적절하게 나타나서 중재해 준 1번이라는 사람 덕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왠지 고맙기도 하면서 의지하고 싶은 느낌도 들었다.
“예 반갑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형식적인 인사말이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워낙 나는 인간관계에 약해서 그런 것 같다.
“아니 수작이라니! 그냥 동료로서 프로페셔널하게 친목을 다지려는 건데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히히히. 이. 사람은 조크를 모른다니까. 재미없게.”
3번은 상당히 발랄하고 적극적인 성격인 듯하다. 먼저 다가올 줄 알고 농담과 재치에 능한 거 같다. 하지만 그렇게 과도한 호감 표시와 그녀의 눈빛을 잠시지만 응시했을 때 그녀는 그러한 유쾌한 태도 깊은 곳에 무언가 감추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직은 방금 만났기에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감이 들었다.
1번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건장한 체격, 짧게 자른 스포츠머리를 보니 전직 군인인 듯하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고 중저음톤의 목소리, 상황 중재능력 등을 보아 여기서 아마 가장 오래 근무한 큰형 같으면서도 모두가 평등한 이곳에서 개인들의 갈등을 중재하고 엇나가지 않도록 해주는 정신적 지주이자 모두를 결속시키는 구심점과 같은 존재처럼 보인다. 역시, 아무리 개방적인 분위기라도 어느 정도의 질서는 필요한 법이지.
그러자 옆에 있던 외국인이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해왔다.
“어서 오세요. 반가워요! 저는 5번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매우 정중한 태도로 나를 반겨주는 사람이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금발에 푸른 눈,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를 가진 그 남자는 백인임에도 한국말을 마치 모국어 하듯 자연스럽게 구사하였다. 그리고 상당히 예의 바른 사람으로 처음으로 존댓말을 하는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어딘가 아주 미묘한 특유의 억양이 느껴졌다. 속단할 순 없지만 북유럽계 억양처럼 들렸다. 더 많이 이야기해 보면 알겠지만 굳이 알아서 뭐 하겠는가?
그때 또 3번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얘 엄청 한국말 잘하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진 모르겠지만 그냥 말만 들으면 완전 그냥 한국인 그 자체야! 누가 보면 한국에서 태어난 줄 알겠다니깐? 히히히. 완전 신기하지 않아?”
휴우. 아주 피곤한 여자다. 오지랖도 넓고.
“네 신기하긴 하네요….”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했는데 갑자기 더 피곤해지는 느낌이다.
“놀리지 마세요, 3번 누님! 이게 예의라는 거예요.”
많이 시달려왔다는 것이 딱 봐도 알아차릴 정도였다.
“으이그. 귀여워서 봐준다, 이 누님께서 말이야. 호호호!”
저 과장된 어투,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적응 안 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제 거의 인사는 끝나가네요. 그쪽은 PN-2이시죠?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또한 형식적인 인사라도 했지만 구석자리에 앉아서 여태 가만히 있던 그는 나를 힐끗 흘겨보듯 쳐다보더니 대답 없이 눈길을 돌리고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뭔진 몰라도 내게 불만이 있는 듯하다. 순간적인 그의 눈빛에는 열등감으로 가득해 보였다. 뭐, 어쨌든 다들 상당히 개성적인 건 분명해 보인다.
그때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여러분, 이제 우리 신입 연구원과 인사는 다 했으니 각자 일자리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PN-7의 자리는 이곳입니다. 우리 팀 연구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내일 과회의때 자세히 브리핑할 예정이니 오늘은 일찍 숙소로 들어가 쉬도록 하세요. 그리고 PN-2는 제 사무실로 오세요. 이상입니다.”
그러자 다들 맡은 업무를 하러 갔고 나는 아직 할당받은 업무가 없으므로 팀장님 지시대로 오늘은 쉬려고 관사로 발을 향했다. 하지만 뒤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오가는데 나한텐 안 들리는 줄 아나 보다. 뭐, 사실 안 들려야 정상인 거리이지만 내가 원래 귀가 상당히 밝은 것은 미처 몰랐겠지.
그들은 쑥덕거리며 말을 해댔다.
“3번. 아무리 혼자 여성이라지만 그런 식으로 자꾸 노골적으로 남자들에게 들러붙지 마. 격식 떨어진다.”
“쳇, 1번 당신은 내 타입이 아니라서 삐졌어? 그리고 솔직히 넘 잘생겼잖아! 질투하는 건 아니지? 히히.”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그런 애정표현은 개인 자유 시간에 하든지 하고 일터에선 프로처럼 행동하란 말이야.”
“아 예예. 안 그럴게요 오빠. 흥!”
“……. 오빠라고 부르지 말고.”
내 예상대로 1번은 엇나가는 이를 붙잡아주고 중심을 형성하는 하나의 축과 같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존재였다. PN-3도 반항하는 듯 말은 하지만 그건 표면적 자존심 때문인 말이지 목소리 톤은 순응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5번은 딱히 문제 일으킬 타입은 아니라 묵묵히 자기 일을 성실히 하는 것 같다.
넓은 연구실에서 터벅터벅 걸어가며 팀장님 사무실을 지나칠 때 안쪽에서 나는 소리도 작지만 내겐 식별 가능한 수준으로 귀에 들어왔다.
“얌마 2번. 너 계속 그따위 태도로 할래? 왜, 특채로 스카우트된 사람 보니까 샘나더냐? 3번 그 여자는 과하지만 살갑기라도 하지 넌 인마 사람이 인사하는데 거들떠도 안 보고. 그런 태도로 계속하면 곤란해. 그렇다고 네가 특별히 뛰어난 성과를 내는 것도 아니고. 경고하는 건 이제 마지막이야. 들어가서 일이나 해. 가봐.”
팀장님께 된통 깨지는 2번이었다. 오늘 나한테 보인 행동 외에도 평소에도 행실 문제가 많았는 듯하다. 작은 키에 구부정한 허리,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대충 걸쳐 입은 옷 등. 속단하고 싶지는 않지만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는 낮은 자존감으로 인한 시샘과 질투, 그리고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가득한 사람 같다.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것도 아니지만 나는 웬만큼 작은 소리도 바로 옆처럼 생생하게 들리는 청각을 가지고 있기에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자꾸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분석하게 된다. 매우 작고 알아차릴 수 없을 듯한 미세한 근육 움직임, 땀방울, 눈꺼풀 떨림, 목소리 톤 등 숨기려 할수록 나에게는 더욱 정교하고 또렷하게 보인다. 이 능력을 재능이라 해야 할지, 저주라고 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마치 흑백사진에서 특정 부분에만 형광 컬러로 표시해 놓은 것처럼 나에겐 너무나 선명히 보인다. 의식적으론 남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 같아서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해도 이미 무의식은 이를 다 처리해 버린다. 내가 직접 심장박동을 조절할 수 없듯 이는 내가 조절할 수가 없다.
혼란 속에 나는 수많은 생각이 스쳤지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방 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지만, 눈앞에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이 식별조차 어려운 속도로 쉴 틈 없이 스쳐갔다. 마치 내 머릿속 컴퓨터의 이미지 폴더가 한꺼번에 열린 듯, 지난날의 기억 조각들이 파도처럼 몰아치며 잠재의식 속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것만 같았다. 그 파도 속의 파편들은 볼 수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늘 그래왔다. 그래서 나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었다. 밤새 뒤척이며,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들 속에서 단 하나의 의미라도 건지기 위해 발악하곤 했다. 결코 성취할 수 없는 목표임을 알면서도.
하지만 그날 밤은 지친 몸이 한계에 다다랐던 걸까. 나는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오랜만에 깊고도 고요한 잠에 빠졌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신생아처럼 모든 근심을 내려놓은 채,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 영겁의 바닷속에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평온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