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두 번째 기회

⌜엘리시움⌟ Episode 9

by 특이점

‘제2차 한국전쟁’이 임시 휴전상태로 들어간 후 6개월이 지났다. 나는 아버지와 오랫동안 난민캠프에서 생활하다가 정부에서 마련한 연립주택으로 이사했다. 물론 캠프와는 비교할 순 없지만 나는 내 고향이 그립다. 내가 자랐던 그 집과 어머니가 그립다. 대학교 기숙사, 친구들, 대학원 지도교수님 등 모두가 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 한국정부는 우리 같은 국민까지 신경 쓰긴 어렵나 보다. 아버지의 1톤 트럭도 징발되고 나서 보상해 주기로 약속받았건만 감감무소식이다. 집이라도 마련해 줬으니 이제는 각자도생의 길밖에 없나 보다.


아버지는 비록 계약직이지만 평생 갈고닦으신 경력과 탁월한 실력 덕에 전후 복구팀에 들어가서 생계를 유지하고 계신다. 부끄럽다. 나는 30이 넘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아버지 아래에서 독립하지 못하고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작은 시골마을에서 한국 최고의 명문 대학교로 가서 배우고 연구한 지식들은 지금 쓸모가 없다. 생존에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 무력감이 나를 덮친다.


아버진 한 복구팀장으로 함경남도 점령지에 종합 감독 겸 팀장을 맡고 계시다. 차라리 공학을 배웠다면 무엇이라도 만들고 아버지께도 도움이 되었을 것 같고 의대에 갔다면 전쟁 피해자들과 부상군인들의 생명을 살리는 데에 일조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법대에 갔다면 인맥을 통해 더욱 좋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다 모르겠다. 그저 추측일 뿐.

내 생각대로 했더라도 그렇게 일이 안 풀릴 가능성도 크지만 지금은 계속 후회만 된다. 다른 분야는 경험해보지도 않았고 교육도 받지 않은 문외한이고 나는 이론 물리학 중 핵물리학을 전공으로 연구하고 있었을 뿐이다. 당시에는 대단한 업적을 이루고 창창한 미래를 그렸건만 지금은 너무나도 무력하다.


나는 현재 그 누구도 도울 수가 없다. 마치 어머니를 돕지 못해 잃은 것처럼. 내가 조금만 더 일찍 갔더라면 아직 살아계셨을까? 그것도 모르겠다. 정말 모르는 것투성이다. 내가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진다. 아버지가 벌어오시는 돈으로 생활하고 끼니를 해결하지만 마음은 공허하다. 물론 아버지는 본인은 괜찮으니 마음 추스르라고 하셨다. 부모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겠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내 새끼는 내 새끼일 뿐이니까.

이해는 하지만 여전히 죄송스럽다. 불효자도 이런 불효자가 없는 것 같다.


──────────────


이윽고 해가 저물면서 아버지가 퇴근하여 귀가하시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말없이 저녁식사를 차렸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른다. 마지못한 아버지가 먼저 말문을 틔우신다.

“그래, 오늘 하루는 어떻게 지냈니?”

나는 답했다.

“그냥 매일같이 우리 마을에 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자학하고 지냈지요. 아버지는요?”

아버지도 내 심정을 이미 헤아리고 있다는 듯 화제를 돌려 말씀하셨다,

“오늘은 말이야. 이 아비가 5층 건물을 드디어 복구하는데 완성했어. 엘리베이터는 물론, 수도, 전기, 가스까지 완벽하게 작동하고 말이야 하하.”

“네 좋으시겠네요. 축하드려요.”

물론 말뿐인 무미건조한 대답이다. 이미 아버지가 무엇을 하든 관심을 끊은 지 오래이기 때문.

“아들, 생각해 봤는데 언젠가 이 정부의 전후복구 프로젝트만 완성되면 리모델링 가게를 열까 싶어. 그동안의 노하우를 통해서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애써 긍정적으로 보이려는 아버지의 태도는 이젠 가식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네. 아무렴요. 저는 여전히 뒷방에서 혼자 시간만 죽이고 참 좋을 거 같네요.”

나는 비꼬는 듯이 말은 했지만 한편으론 죄책감이 들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너도 충분히 네 역량을 펼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모르겠지만 나중엔 분명 아비 말이 옳았다고 할 날아올 게야. 아무튼 밥이나 마저 먹자.”

아버지도 내 심정을 알아차리셨는지 애써 어색한 분위기를 모면하려고 말을 돌리셨다.

“네네. 그래요. 밥이나 먹죠.”

그렇게 고요함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수저를 달그락거리는 중 현관문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딩동-”

아버지께서 의아해하시며 물으셨다.

“너 친구 오기로 했니? 나도 누가 방문한다는 얘기를 들은 게 없거든.”

난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제가 친구가 있을 거 같습니까? 뭐, 아무튼 누군지 확인해 볼게요.”

그렇게 난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철컥 문을 열자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 서있었다. 야밤에도 검은 선글라스에 검은 정장차림의 사내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며 말을 걸었다.

“누… 누구시죠?”

그러자 남자는 차분하지만 묵직한 어조로 답했다.

“제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주소로 이것을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입니다. 당장 결정하실 필요는 없지만 생각해 보시고 관심 있으시면 연락 주십시오.”

그렇게 그는 한 두터운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받아 들고 발신자란을 확인해 보았다. 거기엔 ‘한국 국립 과학연구소’라고 큰 글씨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한국 국립 과학 연구소? 여긴 뭐 하는 곳이죠?”

혼란과 궁금증에 휩싸인 나는 그 감정을 해소하고자 남자에게 물으려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혼란과 호기심의 감정은 해소는커녕 더욱 증폭되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서류봉투를 받아 든 채 혼잣말로 이 상황을 애써 이해해 보려 애를 썼지만 오히려 혼란감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날 부르셨다.

“누구더냐? 너 아는 사람이야?”

“아… 아뇨….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근데 이걸 주고는 무슨 알 수 없는 말을 하더니 휙 사라져 버렸네요?”

나는 상황의 어이없음을 말로 표현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셨다.

“등기우편 같은데? 빨리 다음 집에 배달해야 해서 가버린 거 아니냐?”

“요즘엔 우체부가 무슨 국정원 요원처럼 선글라스에 검은 정장을 입고 다니나 보죠?”

그간 너무 현실 안주적이고 무지한 아버지의 태도에 이골이 난 나는 나도 모르게 필요 이상으로 비꼬듯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봉투를 들고 거실로 다가갔다. 아버지도 호기심이 드셨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하셨다.


“한국 국립 과학연구소? 흠 전후 복구 일을 하면서 얼핏 들어본 거 같다. 전쟁 때문에 국가 경제가 무너지자 자원하나 없는 대한민국 땅에서 유일한 지적 자원인 과학기술을 극도로 발전시키기 위해 국가에서 엄청나게 투자하고 있다던데…. 나는 뭐 관심도 없고 터무니없는 얘기 같아서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겠거니 했었지. 그런데 실제로 있기는 하구나?”

순간 나는 아버지의 무지함에 짜증이 확 치솟았다.

“왜 제게 그런 말 한번 하신 적이 없죠? 제가 과학자가 꿈인걸 잘 아시면서?”

그러자 아버지는 뜻밖의 내 반응에 당황하시며 대답하셨다.

“아니, 뭐… 난 별 중요한 게 아니라 생각했다. 도시전설 같은 헛소리말이야.”

그 말을 들은 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보아하니 확실히 존재하는 거 같은데요?”

그러자 아버지는 내 기분을 감지하셨는지 또 특유의 화제 돌리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럼 일단 안에 든 게 뭔지 확인해보자. 이리 줘봐. 내가 뜯어주마.”

나는 무심코 박스커터를 든 아버지에게 봉투를 내밀다가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내빼었다.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본능적이었지만 나도 왜 그랬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아니, 왜 그러냐? 어디 아픈 거야?” 아버지는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아뇨…. 뭔가 수상하지 않아요? 야밤에 갑자기 의문의 검은 정장의 남자가 주고 간 물건이잖아요.”

동시에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마구 스쳐 지나갔다. 아직 국내에 잔존해 있는 북한 간첩들이 택배로 위장해 개봉 즉시 폭파하는 택배폭탄, 혹은 작은 우편에 탄저균 포자를 퍼뜨려 작은 마을을 말살해 버렸던 사건들. 전시에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었고 인터넷에서 기사로 접한 적이 있다.

물론 수년 전의 일들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사건들이었지만 폭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순간적으로 공포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명히 들린다.

그날의 굉음을. 아직도 보인다. 생생히 밝은 보름달빛을.


아버지는 내 반응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를 채셨는지 말하셨다.

“또 그 생각이 드는 거냐? 항상 말하지만 이 아비에겐 무엇이든 말해도 괜찮단다. 혼자 담아두기만 하면 더 안 좋아져. 이야기를 하면 기분이 더 나아질 거야.”

나는 애써 담담한 척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니오. 괜찮아요 저는. 봉투나 열어보죠.”

나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기피하고자 일부러 괜찮은 척하면서 봉투를 무심코 개봉했다.


그러자 명함하나가 툭 떨어지고 안에는 종이 뭉치가 가득했다.

“이게 뭐지?”

아버진 무심한 듯 툭 떨어진 명함카드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보면서 갸우뚱해하셨다.

“얘야. 너 이게 누가 보낸 건지 알아보겠어? 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한번 봐봐.”

그러자 나 또한 무심하게 건네받았다. 하지만 카드를 보는 순간 몸에 전기가 통하는 듯 짜릿한 느낌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몸은 얼음처럼 굳어져버렸고 머릿속은 뇌의 뉴런들이 요동치며 폭풍이 치는 듯 혼란으로 가득 찼다.

불쾌하지만 한편으론 기대감도 느껴지는 기이한 기분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느낌이라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기뻐야 할지 불안해야 할 지조차도 판단할 수 없었다.


아주 간결하게 검은 디자인에 하얀 볼드체 글씨. 상단엔 대한민국 정부 마크가 그려져 있고 옆엔 한국 과학 연구소, 아래에는 이름 대신 ‘찰스 4세’ 그리고 주소 없이 연락처만 적혀있었다. 뒷면엔 뭔가 요철감이 느껴지지만 얼핏 보면 아무런 글씨 없이 그저 검은색 바탕으로만 가득하다.

찰스 4세라…. 번뜩 머리를 스치듯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빈종이와 연필을 가져와 명함카드 뒷면을 살살 정성스럽지만 빠르게 사각사각 그림을 복사하듯 채워나갔다.

그러자 나타난 의문의 단어. ⌜샤L4⌟

이 글자를 보니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아버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하지만 난 무시하고 그 자리에서 나머지 서류더미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다시 전율감을 느꼈다.

그 서류더미는 바로 내 미완의 박사 졸업 논문이었다.


본능적으로 난 느꼈다. ‘이건 기회야!’라고 누군가 계속해서 내 귀에 속삭이듯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아버진 이런 비이성적인 나의 행동에 불안감을 느끼며 내게 물어보셨다.

“아들. 대체 그게 뭐길래 그렇게 흥분하는 거니? 괜찮으냐?”

나는 벅차오르는 기분에 이성적 사고를 하기 힘들었다. 나름 두뇌파 엘리트였지만 마을 폭격으로 어머니를 잃고, 난민으로 떠돌며 전쟁기간과 휴전 이후까지 오랜 기간 폐인으로 살아온 나에게 온 '두 번째 기회'같았기 때문이다.

“괜찮으냐고요? 아버지. 이건 기횝니다. 두 번째 기회라고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죠!”

나는 흥분하여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얘야. 진정하고 설명해 보거라. 찰스 4세? 너무 수상한 거 아니니? 누가 장난친 거 아니야?”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찬찬히 설명해 드렸다.

“아버지. 찰스 4세는 제가 서울대에서 친구들하고 지도교수님을 부르던 별명이에요. 명함 뒷면에 ⌜샤L4⌟라고 숨겨진 글자가 있죠? ‘샤’는 서울대 입구모양에서 따온 거고 ‘L’은 연구실을 뜻하는 랩(Lab)에서, 그리고 숫자 4는 교수님 사무실 번호였어요. 저 특이한 사인은 절대 잊을 수 없죠. 우리는 부르기 편하면서 재밌게 하려고 를 이어지게 읽어서 '샤를 4세' 즉 영어식으로 ‘찰스 4세’라고 불러왔던 거예요. 이 시그니처는 친구들 몇몇과 교수님 본인을 제외하곤 아무도 못 알아보는 별명이에요. 게다가 완성하지 못한 내 졸업 논문까지 첨부하여 보냈다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겠죠? 제 생각엔 이건 신호입니다. 제게 무엇을 요구할지, 어떤 것을 제공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제가 필요하다는 거 아니겠어요? 보아하니 당시 지도교수님도 서울대에서 한과연으로 이직하셨나 본데 인재개발 같은 명목으로 저를 추천하신 게 분명해요!”

분명 아버지께 말을 하는 거였지만 사실상 혼자서 한껏 들떠서 떠들고 있었다.

“얘야 진정하고 아비 말 좀 들어보렴. 저게 신종 사기인지 어떻게 알아? 세상도 흉흉한데 이상한데 괜히 따라가지 말아. 내가 가게 열면 넌 간간히 일만 도와주면 둘이 먹고살기 충분할 거야.”

분명 남이 보기엔 매우 수상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나에게는 일종의 비밀코드와도 같은 것이라 아버지가 이해할 것이라곤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버지. 저만 아는 기호코드에, 제가 쓰다만 논문까지 첨부되어 있는데 이게 우연일까요? 이런 걸로 사기 치려야 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저를 영원히 보호하실 순 없어요. 저도 나이가 몇인데 드디어 과학자가 될 기회가 온 거라고요. 평생 기다려왔던 기회인데 이대로 저버리라고요? 절대 그럴 순 없죠!”

아버지도 성화에 못 이기셨는지 일단 나를 진정시키려 하셨다.

“아 그래그래 니 뜻이 정 그렇다면 전화라도 해보거라. 대신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한숨 자고 내일 전화를 해봐, 그리고 내용도 알려주고. 우리 둘 뿐인 가족인데 함께 결정하자꾸나.”

“알겠어요 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그렇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침대에 누워 수면등을 껐다. 그러자 창밖에서 아주 환하고 또렷한 보름달에서 눈부시리만치 강한 빛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분명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나는 순간 역겨움을 느끼고 암막 커튼을 얼른 쳐서 가렸다.

“허억 허억….” 어느 새부터 보름달만 보면 반사적으로 구역질을 느낀다. 마치 뇌리에 각인된 장면이 순간적으로 나열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아씨 진짜…. 오늘 하필이면 보름달이 뜨는 날이냐고…. 기분 좋다 말았군. 일단 한숨 자야겠어.”

암막커튼을 친 어둠 그 자체뿐인 방 안에서 나는 더 평안한 느낌을 받고 더 잠들기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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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잠에 들었던 나는 문득 깨어났다. 시계는 아침 9시를 넘겨있었다. 암막커튼덕에 시간 흐름을 잘 따라가지 못했나 보다. 아무튼 나는 커튼을 열어젖혔다. 따스하면서도 눈부신 아침햇살이 나를 반겨준다. 왜인지는 몰라도 나는 별로 반갑지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랜만에 깊은 잠을 편안하게 잤던 것 같다.

“아…. 아버진 이미 출근하셨겠구먼….”

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편으론 무언가 달라진 느낌을 받았다. 꿈을 꾼 것 같지만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별것 아니겠지. 내 생각엔 어제의 그 명함을 받고 오랜만의 기회를 잡은 것 같아 기대에 부풀어서 그런 것 같다. 아침에 아버지와 상의 후 전화할지 말지 정하기로 했지만 이미 아버진 출근하셨고 난 늦잠을 잤다. 그리고 난 그 명함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폭풍이 치는 듯했던 어제의 그 혼란이 말끔히 사라진 듯 평화로웠다. 그대로 나는 지체 없이 연락처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 발신음이 울린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나는 긴장감을 애써 숨기는 듯 당당히 말을 건다.

“예 안녕하십니까? 어젯밤 이 번호로 전화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한다.

“그렇습니까? 솔직히 수상하게 여겨서 무시할 거라고 반반 의심했습니다만 역시 괜한 걱정이었군요. 물론 이 번호로 전화를 하게 마음먹은 이유가 분명하겠죠? 상세히 설명해 주시면 추가 연락을 드릴 겁니다. 제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라면 이 전화번호는 삭제되겠지요. 그러니 신중히 대답하세요.”

무슨 처음부터 퀴즈를 내고 있는 거지? 좋아. 한번 속아주도록 하지.

“물론 저도 처음엔 의심스러웠지만 이내 찰스 4세, 그리고 뒷면에 얼핏 색으론 보이지 않지만 양각으로 크게 ⌜샤L4⌟라고 적어두셨더군요. 이는 제 서울대 대학원 시절 동기 몇몇과 지도교수님 밖에 모르는 별명이자 은어였죠. 당연히 아버진 알아보실 리가 없었고요. 암호에 대해 길게 풀어서 설명해 드릴 순 있지만 시간을 아껴드리도록 하죠. 어차피 당신도 알고 있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교수님?”


물론 추측이긴 했다만 근거 있는 추측이었다. 그 별명과 로고를 안다는 점, 그리고 수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교수님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하하하하하! 역시 자네라면 날 실망시키지 않을 줄 알았어. 그래 요즘 사는 건 어떤가? 아 어머님의 명복을 비네. 나도 사고 소식을 늦게 접해서 말이지. 당시에 서울은 난리도 아니었어. 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었지. 전쟁통에 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전국 계엄령까지 겹쳐서 한동안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았어. 그런데 정부에서 지적자원 및 인재 발굴을 명목으로 한국 최초의 국가가 주도하는 거대과학연구시설에서 나에게 과학부 핵물리학 팀장직을 권하더군. 나는 평생의 연구도 이어갈 수 있는 데다가 급여도 상당히 괜찮았기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지. 그래서 그 기회를 잡기로 한 거야.”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했건만 혼자 들떠서 본인 얘기만 떠드는 게 좀 언짢았다.

“네 상당히 감동적인 스토리네요. 죄송하지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한동안 좋은 삶을 살았는지 여유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하!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자 이거지? 알겠네. 자네의 그런 점도 그리웠어. 다른 게 아니라 이 시설은 이미 2030년부터 착공하여 5년 만에 완공하였다는군. 자네도 30학번이지 않았나? 아무튼 현재 내가 이끄는 팀에서 아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 자넨 비록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직전이었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네. 자네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 눈을 보면 알 수 있지. 비과학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자넨 진정한 인재야. 그래서 내가 구태여 과장에게 자네가 반드시 우리 팀에 필요하다고 피력했지. 이제 그럼 자넨 선택만 하면 되는 거야. 지금처럼 계속 살지, 아니면 물리학 박사가 되어 과학자로서 연구를 마음껏 이어나갈지? 개인적으론 그리 어려운 선택은 아니라고 보네. 물론 못 마친 자네 대학원 졸업 논문 작성 과정 등의 학비는 모두 국가에서 부담할 것이야. 딱 1년만 지나면 자네도 어엿한 과학자로서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는 거지. 어떻게 하겠나?”


나는 머리가 새하얗게 백지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대답 없는 내게 교수님은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다시 대화를 시도하셨다.

“음…. 이보게. 나도 자네를 추천하느라 나름 내 커리어도 걸었다고. 갑작스럽겠지만 지금 대답해주었으면 하네.”

하지만 아직 대답하지 않고 머릿속의 하얀 도화지에 평화롭던 그 시절의 풍경이 번지듯 그려졌다. 어렴풋이 스쳐간 노스탤지어가 내 마음을 조용히 휘감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보게? 거기 아직 있나?”

감상에 젖어있던 나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예 교수님. 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제야 안도하는 듯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나가셨다.

“하!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럼 지금 집 밖으로 나가서 자네 집 우편함을 보게. 거기에 스마트폰이 하나 있을 거야. 이제부터 그 단말기로 모든 일정과 업무 및 연락을 하게 될 걸세. 거기에 자네 엄지손가락을 갖다 댄 후 눈 한쪽을 3초간 화면을 응시하면 사용자로 등록되어 잠금이 해제될 거라네. 그리고 자네가 사는 연립주택 앞을 보면 정부차량이 대기하고 있을 테니 단말기와 간단한 가방 하나만 가지고 차에 타도록 하게. 그러면 우리 연구소로 널 데려와 줄 거야. 얼른 만났으면 좋겠구먼. 하하!”

나는 흠칫 소름 돋았다. 어떻게 알고 그 스마트폰과 차량을 미리 대기시켜 놓은 거지?


스스로 의문을 던져가면서도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제가 안 하겠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까지 준비하셨죠? 그리고 어쨌든 아버지께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자 찰스 교수는 약간 짜증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지금 아니면 기회는 두 번 다시없어! 그러니 간단히 편지라도 적어놓고 오던지 알아서 하라고. 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리고 전화는 뚝 끊어졌다.

“여보세요? 끊은 거야? 참나….”.

어이가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옆에 보이는 미완성 논문 종이 중 아무 종이 한 장을 집히는 대로 골라 뒷면에 간단한 작별인사와 후일을 기하는 말을 적어 냉장고에 자석으로 고정시켜 두었다. 그리고 딱히 가져갈 것이 없던 나는 내가 애용하는 라이터와 담배를 주머니에 주섬주섬 쑤셔 넣고 급하게 먼지 쌓인 정장을 꺼내 입었다. 긴 세월 신지 않았던 단화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대충 탈취제를 뿌리고 그 구두를 신은 채 바삐 채비하여 먼 길을 나섰다.


현관문을 나서 우편함에서 정체 모를 스마트기기를 챙긴 후 건물 밖으로 나와 검은 고급차량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을 보니 어제의 그 정체 모를 남자였다. 그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나를 확인하듯 바라보더니 말없이 운전하기 시작했다. 나는 궁금증에 이것저것 물어보기 위해 말을 걸려고 하는 찰나 앞 좌석과 뒷좌석을 나누는 유리칸막이가 스윽 올라왔다. 보아하니 방탄, 방음 기능의 재질이라 나는 하는 수 없이 포기하고 많은 궁금증을 안은 채, 그저 차량 좌석 시트에 앉은 채로 무엇이 기다릴지를 모를 연구소까지의 여정을 묵묵히 침묵 속에서 기다렸다.

──────────────


그때만 하더라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 비참한 생활을 청산할 기대에 눈이 멀어 전날 밤에 느꼈던 폭풍 같던 머릿속과는 다르게 아침에 느낀 머릿속의 평화로움은 폭풍이 지나갔기 때문이 아니라 폭풍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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