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생명에서 물건으로
─ 책방 아저詩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복날 버스 안
노선은 길고 배차 수는 적고
"이 똥차 왜 안 가?"
무심코 한 손님의 말에
"똥이 차야 가죠."
─『脫2』에서
(『脫2』: 신입 사원들이 쓴─脫고정관념 사례집
쌍용그룹 창업 55주년 기념 사보 『쌍용』 별책 부록)

그룹은 나에게
고정관념을 깨뜨리라고
발상의 전환을 꾀하라고
요청한다
승진하고 싶으면
살아 남고 싶으면

펜에서 만년필로 가는 데에
발상의 전환이
그럼, 발상의 전환으로
생활이 혁신되고
만년필에서 볼펜으로 가는 데에
발상의 전환이
그럼, 발상의 전환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볼펜에서 컴퓨터 키보드로 가는 데에
발상의 전환이
그럼, 발상의 전환으로
세계가 달라졌지

세계가 달라져
詩가
컴퓨터 화면에 떠오른다
詩를
팩시밀리로 보낸다
詩도
음성 정보로 들을 수 있다

발상의 전환으로 세계가 달라져
컴퓨터가 말을 한다
나를 잘 사귀어야 한다고
물건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암, 물건에서 생명이 나오지
물건…… 성난 만년필 같은……

나는 그룹에서 쫓겨나
'내'가 될 모양이다
의료보험카드를 반납하란다.

_이승하,詩 「물건에서 생명이」 전문


초판으로 묶여 세상 빛을 본 것이 1995년. 詩는 그 이전 쓰였겠고, 착상된 현실은 또 그 전 일일 테니 최소 사반세기는 묵은 얘깁니다. 지금에 비추면 '고정관념 탈피'니 '발상의 전환'이니 자체가 낡은 표현이지요. 저조차(무려 94학번;) 고루하다 싶게 느껴집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는 국내외 가릴 것 없이, 저마다 분열과 혼란 가운데서 새로운 개인/자아가 태동하던 시기였던 것도 같습니다. 비자발적 급변에 몸서리치는 동시에 자발적 급변을 주도하는 몸부림 또한 함께 인[起] 카오스 국면이었달까. 이를 보편적으로 겪지 않았나 싶고..


당시를 떠올리면 뭐랄까요. 그 분열 자아상을 양면으로 하여 사람은, 동전으로 化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도 합니다. 자본제 유통에 걸맞게 균일한 형태로 물화物化를 거쳤달까요. post-modern 기에 진화 이룬 인간種이란 실상 이 동動-물화物化 아닌가 싶어요. 살아 숨쉬는 존재이긴 한데 인면人面을 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자심資心이랄까. 자본 admin-에 접속된 낱낱의 guest 계정이랄지, 얼핏 클라우딩 같지만 자본system에 종속된 하위-클라이언트랄지..

어쩌면 '인격화된 자본'을 자본가에 국한된 표현이라 여기는 건 절반만 이해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 심장을 공유하며 같은 심박으로 움직이는 무산자 역시 매일반. 당장의 (건)물주나 미래 (건)물주를 꿈꾸나 피차 same same 아니냔 말이지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 멎지 못하는 바이면(인면人面-자심資心인 판에 인면수심人面獸心 출현? 극단이긴 해도 불가피지 싶고요) 시계열 썰어낸 단면으로 드러난 현재, 모습은 달라(보여)도 본질, 다르지 않다 여김이 마땅하잖나 싶은 것. 출현하였다는 新인류의 면면에서 어딘지 인간미가 점점 소거되는 듯한 느낌 또한 그저 기분 탓 만은 아니지 싶군요;;

동전으로 하나 된 듯싶지만 분열 자아상은 여전. 단지 자본 함량 따라 절로 갈리어 군집 형태로 드러나니 곧 '양극화'.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손' 뒤로 숨는 한편에서 다른 누군가는 그 '손'에 의해 배제. 굳이 新자유주의 언급하지 않아도 '광장'을 누비는 자본의 자유와 유폐된 '밀실'에서 추구하는 개인의 자유로, 양분兩分 역사는 오래이나 이처럼 극단 양상으로 치닫는 건 불과 몇 십년? 확실히 요 근래이지 싶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발상 전환'의 격변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착된 현실의 참 상 아닌가 싶어요(사실 이 모두가 자본이 제 꼴에 값을 다하려 들면 들수록 마주할 수 밖에 없으리란 예견 또한 제법 길고 오랜 역사. 포유류인 인류 역시 동물動物이긴 해도, 사고思考를 하잖아요. 그럼 그 '자본'에 접속, 그 맥박을 따를 필요 있나 자문과 자답은 거듭할 수 있겠죠. 발전 거듭한 만큼 나름의 당위에 입각, 정말이지 각을 세워 부딪는 형편이 51:49와 같은 균형을 이룰 법도 한데 어째서 자본 운동장에서 뛰놀지 못해 안달인 형편으로만 기우는지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긴 합니다;;




詩 본문 자체는 특별할 게 없어보이기도 합니다. 담담한 전개, 저마다 겪은 바이니 이해 못할 일도 아니고 말이지요. 그런데 '동-물화 하는 포스트 모던',' 물건'(자본제 자체라 일러도 좋을)의 '명命'에 복무하는 '생生'으로 '전환'된 '발상' 그리고 이로써 '달라진 세계'는 곱씹어 볼수록 기이하지 않은가요?


'버닝-아웃'의 '피로사회'에서의 탈주 행렬, '퇴사'. 그러나 자본 함량 달리는 낱낱의 무산無産-자아들은 곧 '재영토화' 됩니다. 'ready-made' 자체가 비자발적인데 '산업예비군'이 자발적일 수 있을까요. 그러니 요는 실업/노동유연화의 대척에서 고민해야 할 텐데 이거 참;; 그러니까 분열 자아상을 양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이 자본제를 면밀히 고찰 통해 계속해서 다른 시도를 해야 하잖나 싶어요. 다른 시도 자체를 지속 가능케 하는 조건 생성도 끊이지 않아야 하고.

생존 위협의 불안에 잠식당한 영혼으로서는, 영원히 서로를 마주할 수 없는 양면으로 갈린 상태여도 유통되는 동전으로 복무하는 편이 낫다 여길 테니. 녹여서 아예 새로운 주물鑄物, 하나의 구球로 부활을 상상하기란 매우 어려우니까.


'그룹에서 쫓겨나 내가 되'는 '모양'을 반길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표辭表를 출사표出師表로 '발상 전환', 무수한 나'가 이루는 새로운 '그룹' 생성 도모할 법도 하고요.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이에 알맞춤인 적기適期 아닐까요?!

(일러놓고 다시 보니 소~오~름. 가슴 뛰는 거 봐, 왐마. 이거 자본 심박과는 완전 다른 듯 '_')


붙임. 1 : Head 삽입, Photo by Tim Marshall on Unsplash

붙임. 2 : 인용 詩는, 시집 『생명에서 물건으로』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