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편에서 흠결 없이 살자고 애를 쓴들.. 사정 봐주지 않는 세상에 짓밟히기도 하는 게 사람의 삶, 인생이지요
_영화 《앙 あん, 인생 이야기》'할머니' 대사 의역
한하운 시인도 앓았던 한센병.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 소록도에 시설 세워졌더랬지요.
전염되지 않는 경우까지 싸잡아 배제와 혐오로 쌓아올린 벽 안쪽, 시설에 수용. 이렇게 격리를 강제 당한 상태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우리나라는 강제 노역까지 감당해야 했답니다. 참..). 작중 할머니 또한 한센병 환자로서, 일생이라 해도 과언 아닌 시간을 강제로 격리된 채 보냈답니다. 하면 세상 향한 원망을, 자신을 가둔 그 배제/혐오의 벽 만큼 쌓아올렸을 법도 하건만. 속에 인 울분에 자신을 앗겨도 벌써 앗기어 아예 잃어버렸을 법 하지만.. 할머니가 보이는 모습은 정반대. 체념인가 하면, 아예 대척이지 싶습니다.
어쩌면 할머니는 당장 저 자신을 둘러싼 주변, 무관심의 울타리 안쪽 자그마한 세상에서 만나는 자연 그리고 같은 처지의 사람에게 관심 보이지 않았을까요. 그저 오래 바라보고 살폈지 싶어요.
자신을 먼저 열어젖힘으로 해서 할머니는, 자신은 물론 이 세계라는 타자를 지켜낸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받아들여지기까지 가만히 기다림. 그이에게 기다림은 다름 아닌 견딤이었겠죠. 마음에 이는 갖가지 의구심, 때로는 원망으로 돌변하는 걸 붙들어 멈추지 못한 경우도 있었겠고요. 그를 다시 삭이기까지 또 오랜 시간 들였을 테죠. 마치 팥을 쑤듯.
팥 한 알 이루는 데에도 소근거리는 햇살과 속삭이는 바람이 필요함을, 그야말로 온 우주가 도와야만 가능함을 체득하신 듯. 보잘것없다 여기기 쉬운 씨알 하나에도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알아서, 이를 놓치지 않고 들을 귀[耳] 열어준 세월에 절로 감사하게 되기까지. 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처지 비관 않고 다시금 세상으로 걸음 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체득한 '운명愛'로 본이 되니, 황무지와 다를 바 없는 내면에 괴로워하던 이들 또한 스스로 갈아엎어 잿빛 걷고 사랑 피워내는 '레벨 업' 가능케 됨.
상처, 입었지만 무엇에 아팠고 어떻게 아팠는지를 (되)새겨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심리 상태의 동병同病 앓는 처지, 고통 중에 거한 처지를 살뜰히 보살피는 치유자로 거듭난 것. 이런 모습이 진정 '상처입은 치유자'이겠다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세음世音을 '보'고[觀] '살'피니 그야말로 '보살'. 영그는 데 따르는 고통을 이해하니 좋은 것만 취하려고 서두르는 바 없이, 아픔까지 포괄하는 내력이 그대로 건너오기까지 마음 열고 그저 가만히 기다려주는. 상처傷處, 상傷의 처소處所에 거하길 멈추고 스스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이. 작중 할머니 마주하니 절로 겹치는 생각.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듣기 위해서 태어났노라고 그러니 별 다른, 특별한 무엇 되지 못하였어도 그 나름 우리는, 저마다 (태어나) 살아가는 의미가 있노라고 이를 잊지 말라고
_같은 영화
이르던 할머니. 오래 남을 듯.
영화 《앙 あん, 인생 이야기》
기다림은 괴롭지요. 기간 오래이면 고통은 더하여 깊을 겁니다. 그 자체를 즐겁다 비약하며 즐기라 이를 수는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건 '즐거운 시간'으로 바뀌는, 변곡점이 존재한다는 것. 이건 틀림없지 싶습니다. 고해苦海를 건너지 않을 수 없는 인간種의 운명은 어쩌면, 저마다 자기 손으로 소조塑造 곧 좌정관천坐井觀天의 울타리를 넘어설 기회로 뒤바꾸는 주체로 거듭날 기회일지 모르겠습니다.
하면 '눈물'이야말로 인생의 팥소[앙꼬/あんこ] 아니겠어요?!
레알, 트루!! '_'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