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학, 어둠을 껴안는 마음
─ 책방 아저詩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노래가 새벽의 적막을 깨뜨리지 않는 것이 우선 신기했다 새벽산의 수런수런 고요에 슬며시 끼어들어 풀이며 나무이다가 숲이 되고 산자락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여 노래의 주인이 젊은 성악도이거나 가수의 꿈을 분질렀던 사람인가 싶었다 아직 사람들은 잠자면서 사나운 하루에 미리 두근거릴 때 노래, 그것은…… 뒤돌아보면 갈 수 없는 길의 입구, 노래에는 어둠을 껴안는 마음이 먼저 보인다

한 사람이 한 소절 부르고 한 사람이 그 소절 뒤따르는 숲에는 머리카락 허연 할머니 몇 소나무를 껴안고 아니 소나무와 할머니들 몸섞으며, 무릎 아래는 벌써 뒤엉켜 희디흰 실뿌리로 땅속에 단단히 벋어가는데 몸의 모든 구멍마다, 썩은 곳마다 쏟아져나오는 노래는 노래를 떠밀며 아우성치며 나비떼 벌떼가 되어 홀아비꽃대를 찾는다

_송재학,詩 「노래는 왜 금방 꽃핀 홀아비꽃대를 찾아가는가」 전문


'적막을 깨지 않는 노래', 깃든 고요를 내몰지 않는 신명. 이 세계의 맥락을 분지르고자 애를 쓰는 바 없이 가만히 스민다?! 생각만으로도 뭔지 모르게 차분해지는 게 아, 이런 상태야말로 편안인가요. 이의 지속이면 평안이고? 좋군요. 절망에 뒤척이다 희망으로 두근거릴 때조차 '구석의 어둠을 껴안는' 마음. 이것이 마음의 일이라면.. 마음이 짓고 마음이 부르는 소절, 이를 따르는 마음이 다시 길을 내니 악보樂譜와 무보舞譜가 조성하니 계보係譜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습니다. '노래는 노래를 떠밀며 아우성치며', 정말이지 기신起信으로 물결치는 기신起身을 떠올리니 몸이 마주할 썩어질 시간이 두렵지 않습니다. 두렵긴커녕 외려 기대하게 됩니다(개신교 성경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확신도 이해가 됩니다. 그날에 속히 닿기를 열망했을 심리 상태랄까 뭐 그런 내면의 사정 말입니다). 끝내는 못다 이루어 심지어 시스템에 압살 되어 흔적 없이 갈지라도. 그렇게 짓눌린 나비떼 벌떼의 시신이야말로 저편에 이르는 '비밀한 통화구'의 증거 아나겠나 싶고요. 이렇게 소실消失을 자진自進함으로써 누구도 메우지 못할, 혈穴을 영원히 뚫어놓은 셈이니. 유한한 인간種의 운명을 불쏘시개로, 지리멸렬 윤회의 고리를 끊어놓은 것과 다르지 않겠다 싶고요. 그야말로 소신공양燒身供養이랄까요. 여기에 생각이 미치니 느긋해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풀이며 나무이다가 숲이 되고 산자락이 된다는' 그 '어려운 일'의 곡조에 비루한 몸뚱이 실어 계속해서 콧노래나 흥얼거려 보렵니다. 하면 가락이 '자락'되고 '자락'이 가락 되는 변화, 일구겠죠. 뒤집기에 화이부동하며 자유자재이겠지요. 벌써부터 살그머니 들뜨는 마음이라니, 이것 참. ^^;


남쪽 산에서 집으로 옮긴 춘란의 꽃대가 둘 올라왔다. 꽃을 피운 춘란의 느낌이나 향기는 사방으로 퍼지는 것이 아니라 헝클어지거나 보이지 않는 실처럼 한 줄로 이어진다. 감각을 스쳐가는 금선琴線에는 꽃대에서 꽃으로 옮긴 겨울 우레가 숨어 있다. 춘란의 꽃을 상처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가을에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춘란은 이듬해 봄에야 꽃을 피운다. 저 꽃대는 겨울을 견디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근심이 연갈색 꽃대에 깃들여야 한다. 춘란의 꽃을 나는 꽃의 긴장으로 읽는다.

긴장이란 내 글의 속셈이기도 하다. 가장 바람직한 시란 노래말이리라 믿는 나에게 긴장이란 노래말까지의 여정旅程이다. 아니 노래란 나에게 너무 무거워서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걸러내고 따지고 깎아내고 싶은 것은 노래 바로 전의 단순하고 소박함이다. 그러나 나는 단순함을 학습으로만 익혀왔다. 단순함을 삶으로 말할 수 있는 경지란 너무 아득하여 나는 겨우 미묘함과 팽팽함을 내 글의 화두로 남길 뿐이다. 꽃핀 춘란의 이유에 내 짧은 시를 비교하고 마는 이 어리석음!

_시집 『푸른빛과 싸우다』 표4에 실린 송재학 시인의 말



붙임. 1 : Head 삽입, 2010년 11월 인천아트플랫폼서 직접 찍음.

붙임. 2 : 인용 詩는, 시집 『푸른빛과 싸우다』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