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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에 숨은 당신

화요일의 시 읽기, 김윤이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

아저씨는 꽤 긴 시간 동안 여성 작가의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아저씨는 그저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시에 정확한 이해가 있을 수 없겠지만, 완전한 오해는 있다. 시에는 정답이 없겠지만, 시를 오해한다는 것은 늘 완전히 오해한다는 것이다. 아저씨는 늘 틀린 답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엔 정답이 없다고 말했다. 아저씨는 정답이 아니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놓친 정답을 아쉬워했지만 상대는 완전한 오답에 상처 받았다. 사랑은 시와 같다. 사랑에 정답이 어디에 있겠냐고 말하겠지만, 언제나 오답은 있다. 그것도 사랑의 반대편에 있다. 아저씨는 그것을 몰랐다. 


김윤이의 시집 <흑발 소녀의 누드 속에는>을 읽는다. 그의 시들은 다소, 다른 시집의 시들에 비해 처절해 보이고, 처연한 감정이 더 확연하게, 드러나 있다. 그래서 당혹스럽고 그만큼 더 아팠다. 시인은 아픈 말을 하고 있는데 독자인 아저씨는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있었다. 아저씨는 그러니까 그의 시집을 가능하게 한 ‘남자들’이면서 그의 시집을 읽지 못하는 ‘남자들’이고, 그러니까 그의 시집을 읽지 않는 ‘남자들’이면서, 그의 시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들’이다. 남자들은 비겁한 주어다. 아저씨는 그냥 그 남자이다. 아저씨는 시집 위를 걷는다. 고행하듯 걷는다. 이런 시들을 만날 땐 숨이 차고 힘겨운 마음이 든다. 




소나기밥



헹궈낼 수도

닦아낼 수도 없는 그릇, 

그냥 부리고 살았다

눌은밥에서 미소한 고기맛이 났다

쓰윽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숟가락은

언제부터인지 매일을 야금야금 앗아가고 있다

한사코 씹어 비우려 할 때 그때 알았어야 했다

날씨도, 배고픔도 식별할 수 없는 날이 있다

언제나 혼자 먹는 밥의 초라함으로

그릇보다 더 많은 양을 주는 그 식당

강판에 갈아낸 양파처럼 매운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다 신물이 끓어

끼니 때웠다 마른 입술 축이는 누군가의 거짓말

스테인리스 숟가락으로 

단 한번의 약속장소에서

다 그르친 노릇이라 혀 차는 물구덩이 퍼담고 있었다

서슴없이, 이제는 실컷, 되새김 따윈 지겹다고, 애저녁에, 가고팠다고……

먹어버리고 싶었다 부식되지 않는 숟가락째

지독한 사랑의 기근 속 굶주리지 않는 식욕을 찬밥덩이로 헐운 위장을

스펀지에 떨어진 물이 그것에 흡수되어 종적 감추듯

살이 불어채우고도 모자란 기다림

삽시간! 빗나간 삼십삼년의 시간 먹어 치웠다

남자가 비설거지로부터 벗겨질 때까지 

우산 거머쥐지 않는 여자는 

산성비를 눈동자에서 허여멀거니 게워내고 있었다

거무룩 부어오른 어둠속 위장(僞裝)이었다




식욕에 대해, 혼자서 밥을 먹는 행위에 대해, 매일매일 무엇인가를 밥그릇에 담아 빠르게 해치워야 한다는 일상에 대해 이 화자는 이다지도 처절한가. 나는 소나기밥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이 시를 읽으며 생각했다. 이 화자, 밥을 먹는 것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대체 왜. 이 여자는 밥을 먹는 자신을 변명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 밥을 먹는 행위가 ‘누군가의 거짓말’로 만들어진 날에 이루어지는 것이면서 또, ‘지독한 사랑의 기근’ 속에서 생긴 식욕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남자가 등장했다. 남자가 비설거지로부터, 벗겨질 때까지 그 부산함 속에서 여자는 우산을 거머쥐지 않는다. 여자는 산성비를 눈동자에서 허여멀거니 게워내고 있다. 여자의 식욕은 여기에서 왔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저씨는 이 설명되지 않는 상황 속에 드러난 존재로서의 해석할 수 없는 ‘남자’라는 단어에서 무참함을 느낀다. 무참한 슬픔이다. 여자는 한 번도 슬프다고 한 적 없다. 그것은 ‘거무룩 부어오른 어둠속의 위장’ 일지는 몰라도, 끝내 슬픔은 아니다. 남자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여자가 슬프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저씨는, 안도한다. 밥만 잘 먹더라, 하고 안도한다. 여자는 그 오해가 더 슬퍼진다. 

이 오해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그는 대답 대신 이런 시를 아저씨에게 들려준다. 




공(空)의 무게



당신의 입술은 반짝이지만

함께할 수 없는 날들처럼 무겁습니다 

그러니 약속을 정할까요

우리가 꽉 부여잡던 손이 이제 빛바랬다고

그때까지 나는 덩그러니 놓인 하늘을 보고

약돌같이 단단한 햇빛 그러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무심코 어둠을 튕겨내고 있었습니다

간헐적으로 깊어지는 물둠벙 때문에

나는 주름의 깊이가 보인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난번, 어두워지던

침묵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수면이

야트막한 돌바다에 누워

이미 죽은 꽃잎을 밀어올릴 때

당신은 지루해 발치로 고개 숙였습니다

쉬잇!

내가 펼친 손가락 끝으로

가만 숲의 구릉지가 매달려 갑니다

그을린 얼굴은 보이지 않고

일제히 호선으로 늘어선 나무 열매만 눈에 잡힙니다

그렇게 물속 깊이 드리우는 것은 별일이 아니라고

이내 나는 어둠을 옆에 앉히고

되뇌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미안한 거였네요 함께일 수 없는 

이미 훔쳐버린 여름은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여자일까. 남자일까. 아저씨는 여러 번 이 시를 읽는다. 아저씨는 직관적으로 당연히 이 시의 화자가 여자일 것으로 생각하고, 당연히 상대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 어디에도 화자의 성별을 일러주는 구절은 없었다. 이 시는 무엇에 관한 시일까. 다만 아저씨는 ‘당신은 무심코 어둠을 튕겨내고 있었다’라는 구절을 읽으며 마음이 어둠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이 무심코 튕겨내는 어둠... 은 주름의 깊이를 비추는 물둠벙을 만들어 낸다. 침묵은 수면이 얕은 바닷속에서도 이미 죽은 꽃잎을 밀어올릴 뿐이다...

그의 슬픔을 나는 읽는다. 


아저씨는 시를 읽으며 슬프고 싶지 않았다. 아저씨도 재밌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런데 시를 읽을 때마다 우중충해진다. 아저씨는 왜 자꾸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 우중충해지는 것일까. 이제 그만 슬퍼해야겠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우울한 세상을 만들어 놓고, 자기는 이제 그만 슬픔을 포기해야겠다고 말하는 아저씨의 뻔뻔함을 아저씨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쉬잇! 

‘내가 펼친 손가락 끝으로

가만 숲의 구릉지가 매달려 갑니다

그을린 얼굴은 보이지 않고

일제히 호선으로 늘어선 나무 열매만 눈에 잡힙니다

그렇게 물속 깊이 드리우는 것은 별일이 아니라고'


아저씨는 시의 말속에서 아저씨의 말을 감 잡는다. 아저씨는 다시 아저씨가 흘린 말들의 가벼움을 생각한다. 아저씨는 맑은 하늘을 보며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사실 어둠을 튕겨내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아저씨는 그렇게 물속 깊이 드리우는 것은 별일이 아니라면서 일제히 호선으로 늘어선 나무 열매만 보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저씨는 아저씨의 말속에 숨은 아저씨를 문득 깨닫기 시작했다. 서늘한 감각이 아저씨를 사로잡았다. 나를 속이는 것. 이 평화로운 오후에 숨은 거짓의 정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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