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파인 Sep 15. 2023

1. 경복궁(1) 조각난 법궁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다.


  그러나 법궁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는가,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경복궁은 법궁이기는 했으되 500년 조선사의 절반이 넘는 기간 동안 그저 폐허였다. 많은 왕들이 창덕궁이나 창경궁, 혹은 경희궁에 기거하며 나랏일을 돌보았다. 임진왜란 때문이었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전 국토를 유린할 때, 법궁 역시 그 화란을 피하지 못하고 같이 불타버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법궁은 법궁이었다. 창덕궁이나 창경궁이 정치와 생활의 중심으로 기능하는 동안에도 경복궁은 단 한 번도 법궁의 지위를 잃은 적이 없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공식적으로는 문을 닫고 대한제국이 선포되는 1897년까지.




  일제는 경복궁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철저히 훼손했다. 일제는 훼손된 - 혹은 그들 식으로 표현하자면 '재정비된' - 경복궁을 마주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이씨 왕조의 시대가 스러지고, '문명화된' 일본인이 조선과 조선인을 통치하는 시대.

  그러한 바람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을 고르라면 단연 조선총독부 청사다. 지금의 경복궁을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이야기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 지어졌다. 청사 부지 앞뒤로 자리한 광화문과 흥례문은 당연히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총독부 청사가 완공된 것은 1926년이지만, 경복궁의 훼손은 그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1915년,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일제는 셀 수 없이 많은 전각을 철거했다. 궁궐 전역에 빼곡하던 전각들이 이 때 대부분 헐려 나갔다.

  흥례문이 철거된 것도 이 시기다. 광화문 또한 총독부 청사 건립 이후에 경복궁의 동쪽 문이었던 건춘문 부근으로 옮겨졌다.



복원된 현재의 흥례문.

 

  해방 이후에도 조선총독부 청사는 한동안 건재했다. 중앙청으로 사용되다가 광화문 정부청사가 지어진 이후로는 국립박물관으로 그 용도를 바꾸었다.

  오랫동안 경복궁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식민 통치의 상징은, 광복 50주년인 199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꼭 50번째를 맞은 광복절에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이 TV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었다.


  

  그 날로부터 경복궁은 다시 지어졌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경복궁은 모두 그 날 이후의 것이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지나간 시대의 유적이 조선의 법궁으로 다시 세워지게 된 것도 모두, 총독부 철거 이후의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총독부 철거는 거대한 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경복궁 복원의, 역사 바로세우기의, 그리고 해묵은 트라우마 치료의, 시발점.


  경복궁은 아직도 지어지고 있다. 적어도 2030년까지는 계속 지어질 예정이다. 복원사업이 끝나고 완성될 경복궁에는 시대의 풍파를 이기고 아직까지 건재한 것들과, 시대의 풍파를 겪었지만 다시 세워진 것들이 혼재되어 있다.

  하나씩 차근차근 뜯어볼 생각이다. 무엇이 복원이고, 무엇이 역사 바로세우기이며, 또 무엇이 트라우마의 치료인지.




____

*참고문헌) 토드 A. 헨리 지음, 『서울, 권력 도시』, 산처럼, 2021.

**별다른 출처 표기가 없는 사진은 모두 직접 촬영한 것임을 밝힙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0. 시간의 문을 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