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ce Ancilla Domini: 겁나는 건 당연하잖아
그렇게 기대하고 고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 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확인했을 때, 내가 처음 맞이한 감정은 의심이었다. ‘부모가 된다’라는 말의 거대한 무거움이 겨우 손톱만 한 시약선 두 줄로 고지되었다. 지금 내 뱃속에 다른 생명이 싹텄다고? 세균이나 회충 아니고, 진짜 사람이라고? 당황스러웠다. 내가 부모가 된다고? 내가, 누군가의 어머니가 된다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뭐부터 해야 하지. 병원을 가 봐야 하나? 인터넷 게시글과 온갖 댓글을 뒤져 봤지만, 하나같이 6주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 정도 되어야 초음파에 잡힐 만한 무언가가 생기기 시작한다고. 일찍 가 봐야 피검사로 임신 확인 정도밖에 하는 게 없다고. 맙소사, 보름을 어떻게 기다리란 말인가. 하루 종일 머릿속이 야단법석이었다.
이제 나는 한 사람의 생을 책임지고 짊어져야 한다. 나도 그림 속의 성모 마리아처럼 우아하게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개고는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일생일대의 중대사를 우아하고 담담하게 수용하기에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임신 호르몬인 수치가 급격하게 증가함에 따라 나의 기분도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평온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을 감상할 수 없었다. 작품 속 고요하게 반짝이는 신비함이 모두 가식과 기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리아의 굳은 입매와 치켜뜬 눈에서 불신이 읽혔고, 목과 관자놀이 부분에 갈라진 석회벽은 화를 참느라 힘줄이 불거져 나온 것처럼 보였다.
해당 사건이 일어났을 시점에 마리아는 이미 요셉과 약혼하여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유대교의 조혼 풍습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마리아는 겨우 12~13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으로 치면 기껏해야 초등학교 고학년 여자아이다. 방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데 날개 달린 성인 남자가 불쑥 들어와서는, ‘놀라지 마, 너 임신했어. 기뻐하렴. 이름도 정해 줄게. 예수 어때’ 같은 소리를 하는데 차분하게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같은 말을 하는 초등학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서른넷 먹은 나도 미쳐버릴 것 같은데.
사실 성경에 따르면, 마리아가 내내 침착하고 태연했던 것은 아니었다. 천사가 나타나 말을 거는 순간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는 언급이 있으며, 천사 또한‘두려워하지 마라,’며 마리아를 안심시켰다고 했다. 그러나 수태고지를 묘사한 전통적인 미술에서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들은 독서 중이던 마리아, 자수를 두던 마리아, 혹은 순종하고 상황을 받아들이는 마리아를 묘사하는 것을 좋아했고, 놀랐다고 하더라도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답게 우아하고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어처구니없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처녀의 몸을 통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크리스트 교의 핵심 교리였으며, 근대 이전 기독교 세계관에서 <수태고지>는 그리스도의 육화, 마리아의 순종과 처녀성이라는 교리를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당연히 정색하거나 기겁하거나 겁먹은 소녀의 모습이 인기 있을 리가 없다. 한 여자, 한 사람, 한 개인으로서의 마리아가 아니라, 원죄 없이 잉태한 하늘의 모후 동정녀 성모 마리아가 그려져야 했으니까.
수태고지에서 소녀 마리아의 인간적인 면모가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부터다. 19세기 유럽은 격변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과 산업화로 인해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급진적으로 변화하였으며, 이는 사회 문화와 인식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예술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도 유망한 젊은 예술가들이 전통적인 제도권 예술에 개혁을 일으키겠다며 저마다의 예술 철학 아래 유파를 형성했다.
1848년 영국 런던에서 만들어진 '라파엘 전파' 또한 그러한 그룹 중 하나였다. 그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들은 ‘라파엘로 전’의 미술, 그러니까 16세기 르네상스 이전의 회화를 추구했다. 이들은 라파엘로 이후부터 유럽 회화의 구도나 인체를 묘사하는 방식이 정형화되어 제도권 미술을 형성했다고 생각했고, 이 매너리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르네상스 거장의 작품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과 자연을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앞서 보았듯 16세기 이전 유럽 회화가 ‘성모’ 뒤의 인간 마리아를 묘사하는데 딱히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 또한 인간 여성으로서의 마리아에 크게 골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들은 '전통을 답습하지 말고 자연을 관찰하라'는 신념에 충실했다. 그 결과 라파엘 전파의 창립 멤버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수태고지'에 성모님이 아니라 그 너머의 소녀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로제티는 이 작품에 ‘Ecce Ancilla Domini,’ 직역하면 ‘주님의 종을 보라’라는 라틴어 제목을 붙였다.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수태고지가 묘사된 루카 복음서 1장 38절의 한 구절이다. 수태고지에 대한 마리아의 답변이며, 이어지는 마리아의 대사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한국 천주교회 공용 번역본에는 해당 구절이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라틴어 성경을 인용한 것 치고 로제티는 ‘수태고지’를 꽤나 급진적으로 재해석했다. 이 작품의의 마리아는 거실에서 책을 읽거나 자수를 놓고 있지 않다. 성모의 시그니쳐 룩인 푸른 가운 대신 무늬 없는 얇은 민소매 잠옷을 입은 마리아는 누가 봐도 자다 깬 모습으로 침대 위에 앉아 있다. 풀어헤친 붉은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게 헝클어졌고, 커다란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하다. 느닷없이 나타난 이의 선고에, 마리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한 채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 있다.
로제티가 묘사한 마리아는, 그렇다. 소녀다. 진짜 10대 소녀. 아무리 적게 봐줘도 20대 중반 이상인 귀부인을 그려놓고 '동정녀 성모'라고 우기던 500년 유럽 회화 전통에서 벗어나, 로제티는 처음으로 진짜 소녀, 우리 곁에 있을 법한 여자애 같은 마리아를 묘사한 것이다. 옆집 소녀 같은 마리아를 그리는 데는 모델 선정도 한몫을 했다. 마리아의 모델은 당시 열아홉이었던 화가의 여동생 크리스티나 로제티. 여동생에게서 우아함이나 고귀함 같은 덕목을 찾을 수 있는 친오빠가 세상에 있을 리 만무하니, 실수로 성모의 미덕을 묘사해 버릴 일도 없다.
화면 구성 또한 기존의 회화 전통에서 벗어나 있다. 앞서 본 작품들처럼 가로로 긴 화면 양쪽에 천사와 마리아가 대칭 구도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나, 로제티는 세로로 긴 캔버스를 사용하여 공간을 좁힌다. 의도적으로 왜곡된 원근감은 그렇지 않아도 좁은 공간을 더욱 갑갑하게 만든다. 덕분에 소녀와 남자의 거리는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고, 겁에 질려 웅크린 소녀의 불안감은 화면 너머 관람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천사의 존재다. 이제까지 보아온 대천사 가브리엘이 중성적이고 우아하게 묘사된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의 가브리엘은 다소 고압적인 성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으며, 옆이 시원하게 트인 가운 안으로 속옷조차 걸치지 않은 맨살이 그대로 보인다. 날개조차 없는 탓에 이 작품이 '수태고지'임을 모르고 본다면 천사는커녕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소녀의 방에 침입한 무뢰한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사실 작가가 의도한 바는 그게 맞다. 1850년 국립 협회에 작품을 출품할 당시 로제티는 천사의 머리 뒤에 후광을 그리지 않았다. 물론 천사는 공중에 살짝 떠 있고 발치에 성령의 불꽃이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사실 작품 하단부는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천사를 그릴 때 날개도 없고 후광도 없는 남자로 그렸다는 건, 이걸 천사처럼 보이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다. 천사는 천사같이 보이지 않고, 성모도 성모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잠자던 소녀와 그 침실에 무단 침입한 반나체의 남성'으로 읽힌다. 요즘으로 치자면, '잠자던_여중생_침실에서_반나체_남자에게. jpg' 같은 제목이 연상될 수 있는 묘사라는 것.
그렇다. 텍스트만 읽어도 어떤 종류의 폭력이 연상되며 불쾌하고 불편하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로제티의 이 그림이 그런 것이 아니라 수태고지 자체가 사실 폭력적일 만큼 불편하다. 임신은 한 인간의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일이다. 시간과 환경, 경제적 조건이 마련된 상황에서도 망설여지는 것이 임신인데, 이제 겨우 열몇 살 된 여자아이를 (비록 성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사전 합의도 없이 임신시키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잔혹한 짓이란 말인가. 로제티가 이 특이한 화면 구성과 등장인물 묘사를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바로 이것일 것이다. 성경 밖의, 실제의 사람에게 일어난 수태고지는 다름 아닌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고.
라파엘 전파 형제회는 설립 5년 만에 해체하고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라파엘 전파의 정신과 화풍은 그 후에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형제회 설립 즈음 태어난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또한 라파엘 전파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은 화가였다. 그가 그린 <수태고지>에서 마리아는 겁에 질린 것을 넘어서 아예 절망적인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이들이 그린 다른 유미주의적 작품들에 여성이 묘사된 방식을 볼 때, 이 두 남성 화가들이 진심으로 임신을 통고받은 여자의 마음과 여성의 삶을 이해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관습을 탈피하기 위해서든 중세로 회기 하기 위해서든, 이들은 실존하는 인간을 관찰했고 고민했으며, 그 결과 임신이라는 상황 앞에 패닉 하는 인간 마리아가 그려지게 된 것이다.
덤으로, 여기 진짜 임신 후 패닉에 빠진 현대 여성들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낸 ‘수태고지’ 작품이 있다.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시에 있는 성 매튜 성공회 성당은 성당 앞의 광고판에 논란거리가 될 만한 그림을 걸어두는 것으로 유명한데, 2011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 성당은 임신 테스트기에 뜬 두 줄을 보고 경악하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을 광고판에 걸어 두었다. 당연히 이 작품은 전 세계적인 어그로를 끌었다. 신성모독이다, 불쾌하다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솔직해서 좋다는 의견도 있었다. 해당 성당의 사제는 말한다. 마리아는 미혼에, 어리고 가난한 소녀였다. 그러니 이것이 자연스러운 진짜 반응이었을 것이라고. 이 도발적인 작품으로 인해 사람들이 모두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좋겠다고. 맞는 말이다. 크리스마스는 산타가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는 날도,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모이는 날도, 연인이 잊을 수 없는 데이트를 하는 날도 맞지만, 중동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어느 10대 소녀가 원하지도 않은 아이를 낳았던 날이기도 하니까.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