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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이강휘 Oct 15. 2020

연애상담 下

수록시: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그럼 편지는 어떻게 받았어요?”

“편지는 어제 받은 거구요. 그 전에 사실...보고서를 제출하고 나서도 계속 친하게 지냈어요. 따로 연락도 하고. 전에는 수업에 들어가는 게 힘들었는데, 승연이 때문에 좋았어요. 잘 보이려고 공부도 하는 척하고. 음…….”


거침없이 이야기하던 그가 살짝 망설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서 말해줘, 기다리고 있잖아.


“아, 이런 말 하기 좀 쑥스러운데…….” 


잠시 후, 내 바람을 읽었는지 이윽고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계속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고백하기로 했어요. 저번 주 주말에요. 운동을 마치고 전화를 했어요.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처음에는 장난치지 말라고 했어요. 무슨 소리냐고. 그런데 제가 좀 진지해지니까 아무 말 없었어요. 그냥 어영부영 끊었어요. 그리고 이번 주에 학교에 가니까 좀 서먹하달까? 그랬어요. 말도 안 걸고, 인사도 먼저 안 하구요. 그래서 거절한 걸로 알았거든요.”

“편지는 언제 받았어요?”

“오늘 아침이요. 오늘 학교에 가니까 저한테 오더니 이 문제집을 주더라구요. 풀어보라고.”


그는 편지가 끼워져 있던 문제집을 들어보였다.


“갑자기 다가와서 스윽 주고 갔어요. ‘이거 풀어봐.’하구요. 당황스러웠죠. 좋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게 뭐냐고 물었는데, 풀어보면 안대요. 그래서 책을 봤는데, 그 안에 그 편지가 들어 있었던 거죠. 근데 이게 무슨 말인지....”

“그래서 여길 찾아온 거고.”

“네, 맞아요.”

“그렇군요.”


나는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는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 다시 눈을 편지에 가져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다시 한 번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말이죠…….”


그는 머리를 긁적이던 손을 멈추고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핏줄이 선명하게 보이는 건강한  손으로 연한 파스텔 톤의 편지지를 조심스럽게 쥔 채.


“다행히도 내가 조금 공부했던 시네요. 현승 군 얘기도 들었으니 나름대로 시 추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의뢰비는 안 받을게요. 어떻게, 들어볼래요? 아니면 선생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도 되요.”

“괜찮으시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는 완전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그의 눈빛은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마운드에서 상대 타자에게는 절대 보여선 안 될 눈빛이겠지.


“1연에 한계령을 넘다가 폭설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고 있죠. 풍요를 알리는 뉴스와 자동차가 지나가는 세상에서 한계령에 묶이고 싶다는 것. 이게 뭘 말하는 걸까요?”

“폭설은 안 좋은 거 아닌가요? 눈이 많이 오는 거니까. 그럼 꼼짝하지 못할 테고. 아무튼 안 좋은 얘기 같아요.”

“대게는 그렇죠. 그런데 2연을 봐요. ‘눈부신 고립’이라고 말 한 부분을 봐야겠죠.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합니다. 눈 속에 계속 있고 싶다는 거지요. 마치 운명처럼 말이죠. 여기를 ‘동화의 나라’라고 할 만큼 화자는 여기, 그러니까 폭설이 내리는 한계령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요.”

“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왜 폭설 속에 묻히고 싶다는 거죠?”


의뢰인이 이렇게 적극적인 경우를 최근에는 본 적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대답을 빨리 듣고 싶어 하는 십대의 투박한 열정이 보기 좋았다.


“그건 조금 지켜봐야겠죠. 좀 더 볼까요? 3연에서는 어둠으로 변해버린 풍요, 두려운 현실이 펼쳐져요. 자, 이제 나를 구해 줄 헬리콥터가 옵니다. 만약 구출되면 어둠과 두려움이 가득한 현실로 가게 되겠죠. 만약 현승 군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런 현실이라면 그다지 반갑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폭설 속이나 어두운 현실이나 거기서 거긴 거 같은데.”

“그렇죠? 그럼 이건 어때요? 4연에서는 이렇게 말해요. 젊은 심장을 향해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이제는 산짐승을 위해 먹이를 뿌리죠. 이런 현실은 어때요? 아까보다는 좀 좋아진 거 같지 않나요?”

“뭔가 좋아진 느낌이네요. 정확하게 뭐라고 얘기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렇죠. 현실이 개선되었어요. 폭력적인 세계가 아니라 평화의 세계에서 온 헬리콥터에요. 그런데도 화자는 옷자락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요. 헬리콥터에 의해 발견되면 화자는 구해지고 말겠죠. 그럼 이 현실, 그러니까 폭설을 떠나야겠죠. 근데 화자가 아까 폭설은 ‘눈부신 고립’이라고 했단 말이죠. 화자는 벗어나고 싶지 않은 거죠. 여기에서.”

“그렇다면...제가 헬리콥터인 건가요?”

“네?”


뜻밖의 해석이었다. 이 똑똑한 야구 소년은 이 화자가 헬리콥터가 나타나도 손을 흔들지 않은 것처럼 승연 양도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무시하겠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일면 타당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정황 상 그런 추리는 무리가 있다. 제목이 ‘연가(戀歌)’이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까지 찾아온 소년에게 ‘정황 상 그럴 리가 없어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적절한 답변을 생각해 내느라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현승 군은 끝내기 안타를 맞은 투수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편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조금씩 확신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아니야, 그런 거. 그가 더 깊은 절망의 나락에 빠지기 전에 나는 얼른 말을 걸어야했다. 추리야 대화를 하다보면 답이 보이기도 하는 거니까.


“지금 고3이다. 그죠?”

“네.”


그는 힘없이 대답했다.


“자, 처음부터 차근차근 생각해볼게요. ‘폭설’은 안 좋은 거죠. 보통. 한계령은 겨울에 매서운 추위로 유명하죠. 높기도 높고 험준하기도 하죠.”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냐는 표정으로 계속 듣고 있었다.


“지금 현승 군도 힘들죠? 고3이니까 경기에 들어서면 그 전하고는 좀 다르지 않나요?”

“아무래도 다르죠. 3학년이면 성적도 좀 내야하고. 그래야 프로 지명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도 가능성을 보여 줘야하니까 부담감이 있어요.”

“아마 승연 양도 그렇지 않을까요?”

“저번에 카페에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고3이라서 이것저것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 대학 걱정이랑 진로 걱정이었죠. 승연이는 방송국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데, 엄마는 교사를 하라고 한대요. 그것 때문에 엄마랑 싸우게 된다고도 얘기했어요. 친구들이랑도 조금 그렇고.”

“경쟁 때문에?”

“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시험점수가 걸리면 경쟁 상대가 되고 만다고. 그게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고 했어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요. 마치 한계령처럼. 그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박수를 딱 치고 말했다.


“선생님, 그럼 한계령이 고3시기라면 폭설은 이 어려운 상황을 말하는 걸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승연이는 여기에서 안 빠져나가고 싶고요.”

“네, 근데 왜 빠져나가고 싶지 않을까요? 이렇게 힘든데.”

“혹시…”


감출 수 없는 듯한 실없는 미소가 현승 군의 검게 그을린 얼굴 위로 번졌다. 나는 손을 펴 현승 군 쪽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내 앞에 앉아 있는 야구선수 때문인 거 같죠?”


연신 미소가 끊이지 않는 얼굴이 검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귀까지. 그는 팀의 연패를 끊은 투수처럼 손을 꽉 쥐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건넨 편지를 받아 들고는 머리를 테이블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 시가 이렇게 달콤한 시였는지 몰랐다며, 이제부터 야구만큼 시 공부 열심히 할 거라고 했다. 꼭 프로야구 선수가 되어 다시 사무실로 찾아오겠노라는 공언도 잊지 않았다. 10분 전만 해도 세상을 잃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던 그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부산스러웠다. 


현승 군이 나간 후 내리기 시작한 커피가 은은한 향을 풍기며 내려왔을 때쯤 선생님이 돌아오셨다. 나는 선생님께 현승 군과의 나눴던 대화를 이야기했다.


“처음 고백을 받은 상대가 괜찮은 아이라 다행이구만.”

“처음이요? 에이,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성숙한데요, 선생님.”

“성숙하다고 해서 모든 걸 다 빨리 경험하는 건 아니지. 게다가 ‘난생 처음 짦은 축복’이라고 하지 않았나? 짧은 만남이지만 강렬했나 보구만. 하긴 10대의 사랑만큼 순수한 것도 없지……. 아무튼 이제 완승 군도 탐정 다 됐구만 그래. 자주 자리를 비워도 되겠어.”


나는 ‘그래도 선생님이 계셔야지요.’라는 식의 겸손의 말도 잊은 채, 마운드와 가장 가까운 관중석에 앉아 공 하나하나에 마음을 졸이며 바라보고 있는 승연 양과 그녀의 응원을 등에 업고 공을 뿌리는 현승 군의 투구를 생각하며 블렌딩 하지 않은 커피 한 모금을 넘겼다.


- 연애상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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