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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이강휘 Oct 15. 2020

연애상담 上

수록시: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저기, 이런 것도 해독해주시나요?”     


출입문에는 짧은 머리의 소년이 쭈뼛쭈뼛하게 서있었다. ‘이런 것’이 어떤 건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선생님이 외출을 하셔서 곤란하다고 말하려던 차에 그가 말을 이었다.     


“편지를 받았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요. 제가 워낙 이쪽은 꽝이라서요.”     


이런 것? 이쪽? 대명사로만 얘기하는 그의 사연이 뭔지 궁금해진 나는 그를 사무소로 들이기로 했다. 사연을 들어보는 정도는 나쁠 것 없었고, 왠지 내가 처리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의뢰인이 소년이었기 때문에 생긴 자신감일 수도 있다.

소파에 앉은 소년에게 차를 대접했다. 그는 변성기가 갓 지난 굵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다부진 몸에 검게 탄 피부를 봐서 야외에서 하는 스포츠를 즐기는 친구 같았다.     


“저는 시 탐정사무소에서 일하는 성완승입니다. 탐정님은 지금 안 계세요.”

“아, 탐정님이 아니셨군요?”     

그의 표정에서 실망의 기색이 느껴졌다. 짜식, 솔직하기는.     

“하지만 의뢰인께서 가져오신 시를 탐정님께 전해드릴 수는 있어요.”

“아, 네”

“운동을 하는 것 같네요.”

“아, 저는...A고등학교 3학년 강현승이라고 합니다. 야구부에요.”     


간단한 대답 후에 방향을 잃어버린 그의 시선이 사방을 헤매고 있었다. 뭔가 말하기 곤란한 상황이라는 생각에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입구에서 ‘이런 것’이라고 했는데, 사연이 뭔지 들어볼까요?”

“아.”     

그는 매고 온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책을 펼치자 꽃이 피듯 파란 수국이 그려진 파스텔 톤의 편지봉투가 나타났다. 그는 편지봉투에서 조심스레 편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발신자 이승연. 특별한 메시지는 없고 이런 시가 쓰여 있었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 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이승연이라는 친구에게 받은 건가요?”

“예.”     


「한계령을 위한 연가(戀歌)」라니, 풋풋한 10대의 사랑인 건가?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으나 너무 진지한 그의 태도에 미소를 멈추고 진지하게 물었다.     


“이승연 양과는 어떤 관계에요?”

“그게……. 같은 반 친구에요.”

“같은 반 친구? 야구부도 수업을 듣나요?”

“네, 저희 학교는 대회가 없는 기간 동안에는 수업에 참여하거든요. 성적도 중요해서 평균 5등급이 안 되면 대회 출전권이 없어져요. 저희는 대회 성적이 없으면 프로팀 지명도 안 되고, 대학도 못 갈 수도 있으니까 출전권을 따기 위해서라도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군요.”

“1학년 때는 안 그랬는데 2학년 때 교장선생님이 바뀌면서 그런 규정이 생겼어요. 운동선수도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야구부 애들도 수업을 들어요. 3학년인 저까지도요.”     


처음에는 당연히 선수들이나 선수들 학부모들까지 반발을 심하게 했지만, 선수들도 학생이고 이 선수들 중에 프로 지명을 받는 일부와 대학에 진학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야구로 먹고 살기 힘들 텐데 그런 엘리트 체육은 이제 바뀌어야한다는 것이 학교장의 생각이었고 그에 따라 운동부도 정규수업과정을 이수하는 것으로 운영 방침이 세워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운영방침에 대한 반발로 전학을 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선수 몇몇이 생기긴 했었지만 까다로운 규정만큼 화끈한 재정지원으로 학교장의 교육관에 학부모들과 선수들이 조금씩 동조하기 시작했고 자신도 조금씩 적응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공부하랴, 운동하랴 힘들겠는데요?”

“솔직히 그래요. 아니, 그랬어요. 승연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진짜 힘들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공부는 한 번도 안 해 봤으니까.”

“승연 양이 현승 군을 도와줬나 보군요?”

“네, 많이요.”

“그래서 현승 군은 승연 양을 좋아하고?”     


현승 군은 다시 한 번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승연 양의 어떤 면이 야구선수 청년을 반하게 했을까요?”

“음, 예뻐요.”     


그래, 그렇겠지. 그거 말고 말이야.     


“그것뿐이에요?”

“공부도 잘해요. 착하고 똑똑해요.”

“또?”

“음...”

“좀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 줘야 도움을 줄 수 있을 거 같아요. 처음부터 친했던 건가요?”     


이 시는 「한계령을 위한 연가」라는 제목에서도 나와 있듯이 ‘연가(戀歌)’ 즉, 사랑의 노래다. 분명 사랑의 노래임은 분명한데 이 내용을 현승 군의 사정에 맞춰 추리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했다.(물론 10대의 연애사가 궁금하지 않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두 달 전인가, 조별 과제가 있었어요. 조별 과제라고 해도 사실 운동부는 빼거든요. 수업은 들어가도 조별 과제는 안 시켜요. 시간도 안 맞고, 사실 저희들이 잘 못해서 애들도 싫어하고요. 근데 저희 학교 국어 선생님이 조별 과제에 저를 넣었어요. 승연이랑 같은 조에요.”

“그때 친해진 거군요.”

“네.”

“승연 양이랑 어떻게 친해졌어요?”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어요. 시를 읽는 거였는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다른 아이들도 저랑 같은 조가 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더라구요. 근데 승연이가 옆에서 계속 같이 하자고 했어요. 이것저것 가르쳐주기도 하고 제 의견을 묻기도 하구요.”

“아, 승연 양이 조장이었나요?”

“네, 공부를 잘하거든요. 성격도 좋아요. 처음에는 물어도 대답도 안 하고 했었는데 계속 말을 거니까 같이 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 예쁘고 똑똑한 승연이 같은 애가 잘 대해주니까 좋았거든요. 근데 진짜 친해진 건 보고서를 작성할 때였어요.”

“보고서요?”

“네, 조별로 나눈 이야기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하는 수행평가였어요. 보고서를 작성하는 게 승연이 역할이었는데, 승연이가 저더러 도와달라는 거예요. 다른 아이들도 있는데 왜 저에게 도와달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주말에 만났어요.”     


왜겠니? 이 둔탱아.     


“주말? 운동하지 않나요?”

“아, 그때 마침 제가 부상이었어요. 훈련 하다가 어깨를 조금 다쳐서. 포지션이 투수거든요. 지금은 괜찮은데 그때는 잠시 운동을 쉬었어요. 재활운동만 조금 하고. 그래서 시간이 있었죠.”

“그렇군요. 그래서요?”

“카페에서 만나서 보고서를 썼어요. 저는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주고 승연이가 보고서를 쓰고요. 보고서를 읽으면서 이상한 점을 봐주라고 보여주기도 하고.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야구 얘기를 많이 했는데 승연이도 야구를 좋아해서 얘기가 잘 통했어요.”

“그게 결정구였군요.”     


현승 군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 下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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