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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이강휘 Oct 15. 2020

셋째 형은 어디로 갔을까 下

수록시: <감자먹는 사람들>, 정진규/<고향길>, 신경림


형제의 의뢰를 완전히 잊고 있을 무렵,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유성한’ 


봉투 겉면에 적힌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해내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편지의 첫째 줄을 읽고 서야 겨우 유성한 씨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몇 달 전에 셋째 형을 찾아달라고 의뢰를 했던 사람입니다. 

선생님의 시 추리 덕분에 집안 분위기가 좋아졌습니다. 큰형님은 그 이후로 셋째 형을 욕하지 않습니다. 둘째 형님도 셋째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안쓰러워하고 있습니다만 형을 걱정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한 달 전, 셋째 형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짧은 편지와 함께 시를 한 편 보내왔어요. 그런데 주변에 시 추리를 부탁할 수 있는 분이 탐정님밖에는 안 계시네요. 그냥 말로 해주면 좋았을 텐데…….


고향길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

내 살던 집 툇마루에 앉으면

벽에는 아직도 쥐오줌 얼룩져 있으리

담 너머로 늙은 수유나뭇잎 날리거든

두레박으로 우물물 한 모금 떠 마시고

가위 소리 요란한 엿장수 되어

고추잠자리 새빨간 노을길 서성이려네

감석 깔린 장길은 피하려네

내 좋아하던 고무신 집 딸아이가

수틀 끼고 앉았던 가겟방도 피하려네

두엄 더미 수북한 쇠전 마당을

금 줄기 찾는 허망한 금전꾼 되어

초저녁 하얀 달 보며 거닐려네

장국밥으로 깊은 허기 채우고

읍내로 가는 버스에 오르려네

쫓기듯 도망치듯 살아온 이에게만

삶은 때로 애닯기도 하리

긴 능선 검은 하늘에 박힌 별 보며

길 잘못 든 나그네 되어 떠나려네


계속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만 해독해주시면 저희 형제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참, 많지는 않았지만 돈도 보내왔습니다. 적은 돈이지만 이 돈을 의뢰비로 보내드리려 합니다. 그게 형이 처음 보낸 돈을 값지게 쓰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번에는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유성한 올림.


편지를 보신 선생님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완승 군. 이번엔 자네가 추리해 보겠나?”

“제가요?”

“저번 그들 사건 때 자네는 쏙 빠져 있지 않았나. 무례를 참지 못하는 자네의 그 정의로운 기질 때문에 무슨 일이 날 것 같아 조마조마했었네.”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이런 말씀에는 늘 헷갈려왔지만 이번만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비난이었다. 아무튼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수업이 시작되었다.


“일단, 고향집을 떠나려하는 화자의 결연한 의지가 보입니다.”

“증거는 어디 있나?”

“1행의 ‘아무도 찾지 않으려네.’가 근거입니다. 고향을 떠나는 길에 화자는 아무도 찾지 않고 떠나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왜 그런 마음을 가졌을까?”

“음, 아마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8연의 ‘장길’이나 9연의 ‘가겟방’도 피하려고 하는데 이 둘의 공통점은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만날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는 점이죠.”

“장길은 사람이 많으니까, 가겟방은 ‘고무신 집 딸아이’가 지키고 있으니까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떠나고 싶었는데 그쪽으로 가면 누군가에게 틀릴 수 있었겠죠.”

“그럼 그는 무슨 길로 떠난 건가?”

“아무도 없는 길이겠죠. 구체적으로는 ‘쇠전 마당’일 겁니다. 두엄 더미가 수북하게 쌓여 있으면 아무도 자신을 못 보리라 생각했겠죠.”

“고향을 떠나는 그 길이 희망이 있어 보이나?”

“안타깝게도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도 그걸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이구요. 12행에서 그는 자신을 ‘허망한 금전꾼’이라고, 19행에서는 ‘길 잘못 든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허망한’과 ‘길 잘못 든’을 단서로 해독해본다면 희망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야하는 화자의 상황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잘했네, 완승 군. 자네의 화끈한 성격을 닮은 깔끔한 추리였네.”


비난의 의도가 다분한 칭찬이었으나 이번에는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왜 직접 얘기하지 않고 굳이 시를 보냈을까요?”

“음…. 식구들을 떠나는 건 웬만한 용기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그러니 인사도 없이 떠날 수밖에 없는 거야. 유계한 씨의 경우는 이제야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용기가 생긴 걸로 보이네. 다만 차마 말로는 직접 전할 만큼은 아니었을 거 같군. 아직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보네.

“그렇군요.”

“내 판단에 그는 식구들이 모르는 사이, 먼발치에서 그들을 보고 갔을 거야. 하지만 더 가까이 가지는 못했겠지. ‘살던 집 툇마루’를, 벽에 얼룩진 ‘쥐오줌’을 상상했을 뿐인 걸 보면 말이지. 더군다나 ‘새빨간 노을길’을 ‘서성’거렸다는 것이 그가 집 근거에는 가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네. 결국 아직은 용기가 부족한 거야. 그래서 자기 마음을 직접 말하는 것도, 식구들을 만나는 것도 못하는 거지.”

“하지만 언젠가는 용기가 생길 날이 있겠죠?”

“진심으로 그럴 수 있기를 바라네.”


선생님과 나눈 대화 내용을 정리하여 유성한 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받은 의뢰비를 편지와 함께 봉투에 넣어 돌려보내려 했지만 선생님은 이번에는 의뢰비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문득 지금껏 응접실 테이블 옆에 세워져 있는 그림을 어디에 걸지 고민했다. 다섯 명의 식구가 모여 감자를 나눠먹고 있다. 왼쪽의 남성과 여성, 부부인 듯 보이는 그들의 굵은 손가락이 보인다. 포크로 감자를 먹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보인다. 가운데 여성이 차를 따르는 여성에게 감자를 건넨다. 그 모습이 무척 다정하다. 그림의 정중앙에는 그림자처럼 어두운 뒷모습을 가진 여인이 있다. 그녀는 어떤 표정일까? 그녀의 뒷모습에 배성한 씨의 셋째 형의 모습이 겹쳐진다. 

어쩌면 그는 그림 속 사람들처럼 다정하게 식구들끼리 음식을 나눠먹었던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지 않을까. 혹은 오순도순 모여 있는 식구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까. 그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가 과거 자신의 성공을 위해 헌신해 왔던 가족들을 위해 현재의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나는 출입문에 그림을 걸기로 했다. 그러면 그가 고독한 그림자를 떨쳐내고 소란스러운 형제들이 모인 집의 문고리를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셋째 형은 어디로 갔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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