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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인 Jan 26. 2024

무협과 외과의사 - 스승

좋은 스승의 조건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부터 무협 만화나 소설을 좋아했는데

내 생각엔 수술을 배운다는 것은 마치 무협에서 무공을 익히는 것과 같다.


배우고자 하는 도장에 가서 훈련을 하고 어느 정도 수준이 오르면 무림의 고수들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 청한다. 스승님의 절세무공을 익히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리고 영겁의 시간이 흐른 뒤 홀로서기 위해 하산한다. 그리고 강호에서 자신의 역량을 펼친 뒤 새로운 제자를 받아들인다.


문파(병원)마다 무공(의술)의 스타일이 다르고 그것을 전수받아 후대에게 물려준다. 협의(의료윤리)는 무엇이고 배운 이 무공(의술)으로 남에게 도움을 주는 방법을 터득해 나간다.





우리 스승님은 정말 좋은 분이시다.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 중 하나는 우리 스승님의 제자라는 것이다.


외과의사에게 스승님은 마치 무협지의 사부님처럼 아버지와도 같다. 전공의와 전임의시절 외과의사로서의 가치관과 자아를 키우게 되는데 이때 잘못 배우면 평생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환자 치료를 하게 된다. 환자를 대하는 자세, 좋은 수술을 하기 위한 기본기, 생명의 소중함, 연구자로서의 윤리 등. 스승이 환자를 무시하고 질 나쁜 진료를 포장해서 돈만을 노리는 사람이라면 그런 모습을 보고 그게 당연하다고 잘못 배울 수 있다.


스승님께서 항상 말버릇처럼 하는 말씀들이 있다:


"수술장에서 너의 작은 실수가 환자에게는 평생의 장애로 남을 수 있다."

"한 겹 한 겹 조심해서 dissection(박리)하는 습관을 길러라."

"의사는 부지런해야 한다."


좋은 의학자를 양성하기 위해선 스승의 역할이 크다.



모두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여러 동기들과 다양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제자의 앞길을 막으려드는 교수들도 있다는 것을 들었다. 교수 자리가 없어 3년째 펠로우를 하는 친구에게 다른 병원에서 교수자리 줄 테니 오라는 오퍼가 들어왔다. 그동안 온갖 궂은일만 하고 세월을 보낸 친구는 다른 병원에 교수 자리가 났기 때문에 가고 싶다고 말했더니 "스승"은 그 병원에 전화해서 내 친구를 데려가면 보복이 있을 줄 알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렇게 본인이 편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제자의 기회를 날렸다.


좋은 스승이 되는 것은 정말 어렵다.


많은 교수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를 파다가 고수교수가 된 것일 뿐 교사들과 달리 가르치는 것에 서툴다. 다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고 그중에 후학을 키우고 양성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좋은 스승의 조건은 무엇일까?


1.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

당연히 배울 것이 있어야 한다. 그저 사람만 좋고 수술을 못 하거나 최신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은 좋은 스승이 될 수 없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게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수술은 잘하는 사람한테서 배워야 한다. 수술의 세부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수술에 대한 가치관이 올바른 사람한테 배워야 나도 좋은 수술 습관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위험하게 수술하는 사람한테서 배우면 안 좋은 습관이 생기고 환자에게 해를 끼치는 자격 없는 나쁜 의사가 되는 것이다.


2. 제자를 아끼는 마음

그런데 수술은 잘하는데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고 제자를 그저 일꾼으로만 쓰는 교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적당히 곁눈질로 몇 개월 견학정도만 하면 충분하고 스승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아무리 수술을 잘해도 그런 이기적인 사람은 스승이 될 자격이 없다. 제자의 업적을 자신의 것인 양 빼앗아가는 경우도 셀 수 없이 많이 들었다. 우리 스승님은 절대 그러지 않으셨다. 각자 노력한 만큼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하면 본인의 지분도 내려놓으셨던 분이다.


3. 통찰력, 사람의 본질을 보는 눈

스승님은 놀랍게도 사람 보는 눈이 좋으시다. 몇 번 인사만 나눈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그 사람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신다. 온갖 아부로 윗사람들에게만 잘하는 사람진심으로 모두를 대하는 사람을 구별하실 수 있다. 그리고 제자들의 각기 다른 능력을 보고 각자에게 맞는 역할을 주신다.


전임의 1년차 후반, 스승님께서 나를 비롯한 모든 전임의들과 1대 1 면담을 가지셨다. 내 차례가 오면서 조용히 스승님이 계신 방의 문을 두드렸다. 스승님께서는 앉으라고 손짓하시며 간단한 인사로 얘기를 시작하셨다. 요즘 일은 어떤지, 어려운 부분은 있는지 등 다양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이제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하자는 듯 질문을 던지셨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니?"


이런 질문이 들어오면 나는 바로 대답을 잘하지 못 한다. 좋은 의사가 될래요, 어떤 연구를 하고 싶어요, 교수가 되고 싶어요 등 흔하고 쉬운 허울뿐인 대답이야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이런 질문이 들어오면 항상 내 근본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것을 찾게 된다. 흔한 대답을 할 바엔 모른다고 하는 게 낫다.


"솔직히...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결혼이요? 하하하."


사실 오히려 맨날 쓸데없이 깊게 생각해서 바로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 같다 mbti N. 이럴 때는 생각 없는 척 연기하는 게 제일 편해서 특기인 너스레를 떨면서 대답을 살짝 회피했다.


"그래 결혼 아주 좋은 생각이야. 암튼 결혼도 좋지만 내 뜻은 이제부터 너의 커리어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을 해야 한다. 10년 후 자기의 모습을 또렷하게 그릴 줄 알아야 해."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사실 속으로는 동의하지 않았다. 10년 후를 생각하는 사람이 사실 얼마나 있을까? 당장 다음 주도 벅찬데.


'선생님은 mbti J시고 전 P인걸요... 아니, 이것은 오히려 S와 N의 차이인가?'


그래도 일단 끄덕끄덕 동의한다는 표현을 했다. 스승님께서는 곰곰이 생각하시면서 다시 말을 이어가셨다.


"그냥 위장관이라는 세부전문의로 만족하면 안 돼. 너만의 특기, 너만의 특수 분야가 있어야 한다. 흠... A교수는 유전체학으로 많은 연구를 하고 있고, B교수는 의료기기와 축소포트, C교수는 비만... 그래. 너는 지금 암 관련 임상시험을 많이 맡고 있으니까 종양외과학(Surgical Oncologist)을 좀 더 전문적으로 해보는 것은 어떠니?"


이 말씀은 그 자리에서 갑자기 하신 것이 아니라 내 능력과 성향 그리고 나의 미래와 현재 상황을 보고 많은 고민 끝에 하신 말씀이셨다. 원래도 컸던 스승님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커지는 순간이었다. 이런 것이 바로 스승이구나. 제자를 어찌 보면 제자 본인보다 더 잘 알고 그의 삶에 길잡이가 되어준다는 것.


생각해 보면 위장관이라는 분과를 지원한 계기는 별거 없었다. 복강경 위장관 수술이 재밌었고 전공의 때부터 존경했던 좋은 선생님들을 모시며 그 빛나는 팀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스승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우며 마치 "충신"의 역할놀이를 하는 것이 재밌었고 그 자체로도 충분했다.


맞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이런 나를 딸처럼 아끼고 내 미래를 깊이 생각해 주신다는 것에 갚지 못할 정도의 큰 은혜를 느꼈다.


이 은혜를 갚는 방법은 더욱 정진해서 환자들에게 그리고 먼 미래에 생길 내 제자들에게 베푸는 것이겠지.




항상 함께 하실 것만 같았던 스승님은 은퇴를 앞두고 다른 병원으로 미리 거처를 옮기셨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중 하나는 나를 비롯한 젊은 제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굳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왜 영원한 것은 없을까?


그저 스승님께서 이끄시는 팀의 행동대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제일 마음 편했는데... 시간은 결국 순리대로 흐를 수밖에 없어서 그 시절의 영원은 추억 속에 간직하게 되었다. 남은 우리들은 태산과도 같았던 스승님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의 스승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제일 중요한 1번 자격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아직은 더 많은 "수련"을 해야 한다. 그리고 스승님께서는 물리적으로 우리 병원에서 떠나셨지만 여전히 지금도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


이렇게 하나의 "문파"안에서 스승에서 제자로 외과의사의 "무공""정신"이 이어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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