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4 - 나에게 그림이란...
비는 오늘도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온 도시가 젖어 있었고, 물웅덩이가 구멍처럼 곳곳에 고여 있었다.
폐허가 된 골목을 따라, 프린터는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낡고 닳은 펜 하나가 들려 있었다. — 뢰브펜.
수많은 그림을 그려왔지만, 지금은 그 펜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젖은 종이를 꺼냈다.
종이 위에는 선들이 엉겨 붙어 있었지만, 빗물에 번져 이제는 알아볼 수 없는 얼룩뿐이었다.
그는 종이를 들여다보다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프린터(중얼이며):
“나는 창작조차 못 해.
내가 그린 건 전부 흉내일 뿐이잖아.
그림은 결국 빗물에 번져, 남는 게 없어.
…내 그림은… 아무 의미도 없어.”
그 순간, 오래된 기억이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어느 날, 아직 일행이 함께 움직이던 시절.
프린터는 폐허의 벽 앞에 앉아, 뢰브펜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손놀림은 빠르고 정밀했다. 눈앞에 있는 낡은 가로등을 거의 사진처럼 재현하고 있었다.
자비는 그 옆에서 공중에 떠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프린터:
“봐, 자비. 내 그림은 결국 모방이야.
난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어.
그냥 있는 걸 똑같이 따라 그리는 것뿐이지.
결국 낙서일 뿐이야. 사람들은 눈길도 안 주고, 비가 내리면 다 사라져버리잖아.”
자비는 잠시 고개를 숙이며 그를 바라봤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빗소리 위로 스며들었다.
자비:
“사라진다고 해서 의미 없는 건 아니야.
너는 지금 ‘있는 그대로’를 남기고 있어.
그건 누군가가 다시 기억할 수 있게 하는 힘이지.
흉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네 그림은 세상을 붙잡아 두는 거야.”
프린터는 씁쓸하게 웃었다.
프린터:
“붙잡아 두는 거라… 하지만 결국 내 그림은 금세 잊혀지잖아.
내가 가진 건, 흉내뿐이야. 세상을 바꾸긴커녕, 아무도 보지 않아.”
자비는 미소를 지으며, 공중에서 천천히 그의 손 위에 시선을 내렸다.
자비:
“프린터, 네가 그리는 건 단순한 복제가 아니야.
네 의지가 닿는 순간, 선은 살아남는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할 때, 흉내는 흉내가 아니게 돼.
그건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될 거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
하지만 지금, 빗속에서 홀로 남은 그의 가슴 속에 그 대화가 되살아났다.
“보라… 보라…”
낯익은 합창이 골목 저편에서 들려왔다.
프린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검은 눈동자들이 어둠 속에서 하나둘 빛을 반사하며 나타났다.
감염자 무리가 좁은 골목을 메우고,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프린터는 뢰브펜을 쥐고 종이를 펼쳤다.
하지만 종이는 이미 젖어 손끝에서 찢어졌다.
잉크는 흘러내리고, 선은 형체를 잃었다.
그는 뒷걸음질쳤지만, 곧 벽에 몰렸다.
감염자들의 팔이 뻗어와 그의 어깨와 팔을 움켜쥐었다.
차갑고 거친 손길이 얼굴을 거머쥐더니,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검은 눈동자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프린터: “안 돼…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그의 목소리는 비명처럼 갈라졌다.
뢰브펜을 휘두르며, 그는 종이를 찢어 던졌다.
프린터: “내 앞에서… 사라져라!!!”
순간, 뢰브펜 끝에서 튄 잉크가 벽에 흩뿌려졌다.
빗물에 번지던 먹물 선이 갑자기 빛을 머금었다.
쨍—!
눈부신 섬광과 함께, 벽 위의 선이 현실에서 솟구쳐나왔다.
번진 낙서가 거대한 검은 장막이 되었고, 거칠게 긁힌 짐승의 형상이 으르렁거리며 감염자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를 붙잡고 있던 손들이 돌처럼 굳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감염자들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그들의 합창은 찢어진 종이처럼 끊겼다.
프린터는 숨을 몰아쉬며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가 던진 잉크, 번진 낙서가 지금은 현실의 힘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무릎을 짚고 쓰러질 듯 몸을 굽혔다.
빗물과 눈물이 뒤섞여 뺨을 타고 흘렀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프린터:
“나에게 그림이란… 흉내도, 낙서도 아니야.
사라지는 게 아니야.
살아 남아서… 나는 세상을 구하겠어.”
그는 젖은 종이를 가슴에 안고, 뢰브펜을 다시 움켜쥐었다.
비에 젖은 벽 위에는 여전히 번진 선들이 빛을 머금으며, 그의 결심을 증명하듯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