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9
주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에너지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 일수 도 있다. 우리가 편의를 위하여 생산한 시뮬라크르들이 어느새 우리의 사고하는 힘을 빼앗아 갔다고 볼 수도 있다. 사고는 탐구를 하는 것에 가장 필요한 요소이다. 인간이 발전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현대사회는 그러한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죽음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위험에서 멀어졌기에 일어난 것이라 보인다. 본질 너머에 본질의 탐구는 생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누차 강조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생각해보면 이제 일차적인 욕구가 해결되지 않아 죽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일차적인 욕구는 의식주라고 얘기하고 싶다.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욕구이다. 이제 대한민국의 사람은 먹고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먹고 사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그것이 주체성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어떻게 먹고 사느냐라는 것도 사고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그 어떻게를 어떻게 사고하는지에 대한 사고방법을 잘 알지 못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좀 더 근사하게 살고 싶은데 그 근사함에 대한 기준을 스스로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체되는 것들이 시뮬라크르이다. 현대사회에서 넘쳐나는 시뮬라크르들이 삶을 근사하게 만들어 주는 것처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넘쳐나는 시뮬라크르를 얻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사고가 돈에 맞춰지기 된 것이다. 돈이라는 특정 본질에 사로잡힌 것이다. 돈에 본질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그 본질에 너머에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얘기해준다.
그럼 그렇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 채워지면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이지 않은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의식주가 필요하다. 앞서 얘기 한 바로는 대한민국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일차적인 욕구에서 벗어났다고 얘기하였다. 그럼 왜 돈이 필요한 것인가? 기본적으로 의식주의 유지를 얘기할 수 있겠다. 대 다수의 사람들은 의식주의 유지가 벅찬 것이 사실이다. 유지해야 된다는 것은 계속 채워줘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 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한데 소수이지만 그러한 돈이 넘치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채웠으며 유지하고도 남는 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돈을 계속 모으는가? 부족한 이들에게 나눠줘도 되지 않을까? 돈은 분명히 살아가는데 필요한 부분을 채워준다. 이 말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에너지가 많다는 것은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살아가는 힘이다. 즉 돈이 많으면 우리가 스스로 해결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힘이 생긴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럼 자연히 주체성은 없어지는 것이다. 돈이 다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그럼 왜 주체성이 필요한 것인가? 실질적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주체성이 뛰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체성은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을 얘기한다. 주체성이 있어야만 본질을 탐구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현실에 대입할 수 있는 것이다. 돈을 버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것을 생각한 사람들이지 돈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돈을 만드는 사람들은 돈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에 대한 특정 본질을 형성한 사람들이다.
물론 돈이 돈을 벌기도 한다. 애초에 돈을 벌고자 하는 것도 생존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큰돈을 버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특정 본질을 형성한 자들이다. 또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기까지 하다. 본질을 탐구하였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탐구하였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단순히 돈만을 탐구한다면 돈을 벌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으로 돈을 벌 것인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무엇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그것은 돈이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본질을 탐구해야지만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만을 하게 되다 보니 적당한 수준에 돈을 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시간을 돈 벌 준비만 하게 되는 것이다. 단순한 예로 대학을 가고 스펙을 쌓는 것을 생각해 보자. 그렇게 해서 취업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돈을 벌게 될 것이다. 아니 돈만 벌게 될 것이다. 대학을 가고 스펙을 쌓는 것은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다. 사회가 정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가 정한 정도의 돈을 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곳에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 사회가 요구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주체성은 필요가 없어진다. 수용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돈을 주는 사회에 맡기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생존을 다른 무엇인가에 맡긴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회에서 있어야지만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들어온 세계를 쉽게 벗어 날 수가 없다. 이미 그 세계에 나의 생존을 맡겼기 때문이다. 이제 주체성에 중요함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애초에 어느 지점에서 주체성에 있게 본질을 탐구하였다면 그렇게 자신의 생존을 나 이외의 것에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생존법은 자신이 찾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쉬운 과정이 아니다.
그리고 앞서 예를 든 취업에 경우도 쉽지가 않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다는 것은 쉬운 방법이 없다. 하지만 모든 해답은 원형 본질에 존재한다. 그러하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원형 본질의 탐구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탐구를 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우리의 생존을 나이 외의 것에 의존하게 됨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각자의 개체들에게 가장 크게 자리 잡은 것은 바로 ‘나’라는 본질 일 것이다. 그리고 분명 ‘나’라는 본질이 있을 것이다. 내가 나에 대한 탐구의 유무에 관계없이 ‘나’라는 것에 본질은 존재한다. 우리는 각자에게 가장 크게 자리 잡은 ‘나’라는 본질의 탐구를 해야만 한다. 그것이 본질 너머에 본질에 다가가게 하는 힘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