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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Sep 07. 2021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하니까

어떤 시험 후, 새로운 이정표를 찾다


인생길.

열심히 달려가다 숨을 고르려 잠시 멈추었을 때, 갑자기 내가 달려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달리는 일이 힘들어 다른 것을 생각할 여력 없이 달리다 보니 처음의 목적이 희미해지는 거다. 그래서 문득 내가 왜 이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길이다 확신하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예상했던 것과 다른 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내가 기대한 것은 북한산 둘레길 정도의 트래킹이었는데 갑자기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는 가파른 길이 펼쳐지는 것이다. 문제는 내 기대를 접고 그 대청봉에 올랐을 때 과연 내가 원했던 그것을 얻을 수 있느냐다. 보상이 무조건 크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난 딱 케이크 한 조각을 원했는데 홀케이크를 주면 오히려 부담스럽고 처치도 곤란하다. 늘 적당한 만큼이 좋다.  

지난 94,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 1 필기시험을 치렀다. 12월에 2 면접이 남아 있지만 어차피 1 합격을 해야   있으므로 필기시험 결과가 나오는 10 20일까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시험날까지  자신조차 시험명이  외워지지 않았던  시험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교사가 되기 위한 자격증 취득 국가시험이다. 자격증이 없다고 한국어를 가르칠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한국어교사라는 직업을 생각하고 있다면 자격증이 필수라고 봐도 좋다.


그럼 내가 한국어교사가 되고 싶은 거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사실 조금 느닷없고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수그러들지 않는 코로나 때문에 다시 락다운되어 집에 갇혀 지내던 지난 3 어느날 미친 듯이 여행이 하고 싶어졌고,  전에 코로나 발발로 취소해야 했던 엄청난 여행계획들을 생각하며 가슴을 치고 있었다.  중에서도 그해 여름 떠나려던 '멕시코 여행' 대망의  여행 프로젝트의  관문으로 존과 내가 오랫동안 꿔온 일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멕시코의 뜨거운 태양과  많은 멕시코 사람들, 매콤한 타코와 상큼한 마가리타를 상상했다. 언젠가 코로나가 종식되면 바로 자고 존과 얘기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그게 언제가 지는 모르는 상황이 답답했다. 여행을  하는  못지 않게 나를 답답하게  것은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2019 12월에  책이 나온  1년이 훌쩍 지났지만  번째 책의 가닥도 제대로  잡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원래  번째로 쓰고 싶었던 책은 마드리드라는 도시와 마드리드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2020 4월부터 한달간 마드리드에 머물며 글을 쓰려던 계획을 취소해야 했고, 나는 길을 잃었다. 다른 책을 먼저 시작하고 싶었지만, 쓰고 싶은  가지 주제들은 구체적인 내용으로 모아지지 않고 머리속에서 흩어져 맴돌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글을  쓰고 있던 근본적인 이유는 첫책이 기대만큼  팔리지 않아서였다. 베스트셀러를 꿈꾼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2쇄는 찍기를 바랐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편집자에게 2쇄에 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가끔씩 서러움이 울컥 북받쳐오르기도 했다. 엄청난 시행착오를 눈물콧물  쏟아부은 첫책이라  그랬을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가슴에  상처가 남았고, 주변  쓰는 친구들의   출판 소식, 3, 4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나았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덧나곤 했다.


'다 필요 없어. 여행이나 하면서 살지 뭐. 그러다 보면 새로운 영감들이 찾아와 줄 테고, 나는 무엇이든 다시 쓰고 싶어질 거야. 그런데 지금은 언제 다시 여행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때까지 글이 안 써지만 뭐든 다른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자. 참, 최근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많다던데, 특히 한류의 영향으로 남미에서 그렇게 인기가 많다던데? 한국어교원 자격증 따놓으면 나중에 여행하면서 한국어도 가르치고, 그러면서 여행비도 조금 벌 수 있지 않을까? 요즘은 온라인으로 언어를 배우려는 사람들도 많잖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다가 한국어교원과정을 운영하면 몇 개의 평생교육원을 찾아냈고, 호기심에 카톡문의를 했다가 "이번주까지만 새로운 가입자 40% 할인"이라는 뻔한 문구와 "코로나 때문에 올해만 100% 온라인수업"이라는 말에 낚이고 말았다. '낚였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당시 내 마음은 꽤 확정적이었다. 외국에 있으니 100% 온라인 수강이 가능하다는 건 큰 메리트였고, 게다가 올해만 가능하다고 하니 일단 관심이 있는 이상 무시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시험이 9월 4일이니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딱 6개월. 꽤 어렵다고 알려진 이 시험을 준비하기에 결코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나마 바로 시작해야 시험에 도전해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시작했다. 쥐꼬리만큼 모아둔 돈을 등록비 내고 나니, 내가 결국 저질렀다는 것이 실감났다. 등록하자마자 교육원 온라인사이트에 내가 들어야 할 120시간 분량의 수업내용이 올라왔다. 만만한 양이 아니었다. 다음날부터 바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강의 내용이 막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는 재미는 있었고, 오늘은 뭐 하지를 고민할 필요 없이 하루가 후딱 지나갔다.

하지만 2개월쯤 지나면서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현타가 왔다. 전체 강의를 듣고 기출문제를 풀어보니 강의에 나왔던 내용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용어와 개념이 반 이상이었다. 점수가 합격점에서 한참 멀었다. 그때 왜 기출문제풀이 강좌가 따로 있는지 알게 되었다. 수십 시간 분량의 기출문제풀이 강좌를 들으며, 강의 때 들은 것과 거의 같은 분량의 새로운 지식을 다시 머리속에 집어 넣어야 했다. 공부의 양도 양이지만 문제가 나오는 방식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학력고사 시절 대입 공부를 하던 것과 비슷한 유형의 문제가 많았다. 내가 토 나올 정도로 질색했던 문제들. 사고하는 지식, 창의력을 요하기보다 토시 하나까지 암기해서 풀어야 하는 문제들이 훨씬 많았다. 게다가 4가지 영역에 걸친 내용의 범위는 2년의 학위 과정으로 자격증을 습득하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분량과 똑같았다. 그러니까 2년 동안 배울 양을 6개월 안에 구겨넣어야 하는데다, 학위 과정이라면 자동으로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을 나는 시험에 합격해야만 받을 수 있는(그것도 한등급 낮은) 것이다. 사실 나도 학위과정을 고민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학비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3개월쯤 지났을 때는 그만 둘까 싶은 생각도 많이 들었다. 이 자격증을 따서 꼭 한국어교사에 도전해 보겠다, 뭐 이런 각오쯤 있어야 동기부여가 될 것 같은데 나에게는 그만큼의 열정이 없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그냥 부업으로 해볼까 했던 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 공부 때문에 내 글을 한자도 못 쓰고 있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쓰려고 해도 안 써져서 못 썼지만 이제는 너무나 쓰고 싶은데도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아일랜드의  코로나 거리두기 규제도 많이 풀려 국내 여행도 할 수 있고 레스토랑도 갈 수 있었다. 날씨까지 너무 좋았다. 예년보다 조금 일찍 찾아온 아일랜드의 푸르고 빛나는 여름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매일 유혹했다.

어쨌든 나는 그만두지 않고 계속 시험 준비를 했다. 포기하기에는 이미 투자한 돈과 시간이 어깝고 또 사람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 나중에 진짜 쓸모 있어질지 모르는 일 아닌가.


결국 나는 시험을 보기 위해 시험 시기에 맞춰 한국에 왔고, 지난 토요일 대입고사 뺨치게 살벌하고 힘들었던 그 시험을 무사히 끝냈다. 이왕 끝까지 왔으니 꼭 붙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쏟은 지난 6개월의 시간이 부디 헛되지 않도록 언젠가 내가 공부한 것들을 나를 필요로 하는 곳, 나를 필요로 하는 시간에 유용하게 쓰였으면 좋겠다.

좀 많이 늦었지만 이제 새로운 책을 준비하려 한다. 어쩌면 지금 도착한 곳이 내가 생각했던 목적지가 아니더라도, 자금 서 있는 지점에서 새로운 목적지를 정하고 그 방향을 향해 턴하려고 한다. 당분간 보고 싶었던 사람들 실컷 만나고 그리웠던 한국음식도 많이 먹으며 긴 숨을 고른 후 말이다.

어차피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고 했으니, 중심만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 진짜 내 인생이 가야할 곳에 닿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리라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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