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약사 삼촌은 우리 집 안방까지 들어와서 당시 국민학교 3학년인 나를 짓밟고 뭉개며 장난치고 있었다. "야, 이 개구쟁이 녀석아, 이렇게 해봐라" 하면서 피우던 담배를 강제로 내 입에 끼워놓으며 낄낄대다가 우리 어머니한테 한 소리 듣고는 내게 눈을 찡긋거리며 물러갔다.
삼촌이라고는 불렀지만 사실 진짜 삼촌이 아니라 같이 달동네에 살다 보니 친하게 지내게 된 사이였다. 그는 당시 달동네에서 보기 드문 훈남 총각이었는데 혼자 조그마한 약방을 경영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의약분업이 안된 시기라 약사가 진단도 하고 약 제조도 하였는데, 내 여동생이 척추염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그는 우리 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약값도 싸게 해 주고 우리 아빠에게 주사 놓는 법을 알려주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우리는 각종 주사를 맞을 수 있었다.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는 성격도 쾌활했다. 늘 휘파람을 불어댔고 기분 좋게 산동네 환자들을 맞이했다. 요즘 마케팅 이론에 고객에 대해 무리로 서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대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당시 약국 삼촌이 실천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동네 주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뿐 아니라 자녀 수, 나이, 병력, 심지어 취향까지도 다 파악하고 있었다. 개구쟁이인 내가 푹 빠진 전자오락에 대해서도 "어 갤러그 몇 판까지 깼냐? 내일 삼촌하고 오락실 같이 가자"하는 식으로 이해해 주었고, 나는 그를 진짜 삼촌처럼, 어쩌면 선생님처럼 신뢰했다.
동네 사람들도 밤에 응급 환자가 발생하게 되면 병원에 가지 않고 약사 삼촌에게 먼저 달려가 진단을 받았다. 그는 형편에 따라 진료비나 약제비를 안 받기도 하였고, 비용이 너무 많이 나오면 깎아주기도 했다. 사실 약사 삼촌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았던 것은 그런 비용적 측면보다 좀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탁월한 진단 능력 때문이었다. 웬만한 병들은 그의 손을 거쳐 정확하게 판단되어 고쳐지거나 큰 병원으로 이송행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가히 명의 허준 급 약사였던 것이다. 그런 그의 인생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과 딱지 먹기하며 놀고 있었는데, 옆집 아저씨가 누군가에게 멱살을 잡히며 끌려가고 있었다. 그는 나도 잘 알고 있는, 약사 삼촌이 기거하고 있는 하숙집의 남자 주인이었다. 그는 연신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거 안 놔?" 하며 벌건 눈으로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고, 무지막지하게 생긴 상대방은 그에게 계속 거친 욕설을 내뿜어대며 목을 흔들어대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30여 분간 서로 폭행과 폭언을 하며 대치하다가 마침내 누군가 신고한 경찰에 둘 다 끌려가고 말았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가끔 김치도 같이 담그고 국수도 말아먹으며 수다를 떠는 일종의 사랑방 역할도 하고 있었다. 나는 집 안방에서 몰래 귀동냥하기도 하였는데, 당연히 그날 저녁의 기대되는 토픽은 대낮 멱살잡이에 관한 것이었다.
슬쩍 들어본 첫 번째 충격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약사 삼촌이 그만 하숙집 여주인과 바람이 나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약사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헛 참... 하며 아주머니들은 물속 열 길은 알아도 사람 속은 알길 없다고 수군거렸다.
그런데 다음에 들려온 놀라운 사실은 그 멱살잡이 한 사람이 바로 바람난 하숙집 여주인의 동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처남이 매형을 폭행했다는 이야기인데, 어찌 자기 매형에게 저럴 수가 있을까? 나중에 추가로 들은 이야기이지만, 자기 누나가 바람피우도록 놔두었다는 이유로 매형을 멱살잡이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멱살잡이 하려면 상간남을 찾아 멱살을 잡지, 피해자인 매형 멱살을 잡아... 어린 나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허준급 동네 명의가 바람이 났고, 상대 바람녀의 남편과 처남이 서로 싸움질을 한 그날의 사건은 동네 사람들에게는 꽤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어쨌건 그 후 약국은 문이 닫혔고, 썰렁한 회오리바람만이 가끔 약국 문가를 휘저을 뿐이었다. 한 달인가 지났을 무렵 동네에 추가 소문이 들렸다.
어느 여관집 앞에서 나오는 약사 삼촌과 바람녀가 목격되었는데, 약사 삼촌이 바람녀에게 큰 소리로 욕설을 하면서 손찌검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평소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진 모습과 많이 달랐다고 했다. 게다가 둘 다 옷차림도 꾀죄죄한 것으로 보아 사람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듯하다고 했다. 목격자가 약사 삼촌을 큰 소리로 부르자,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내뺐다고 하였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사랑방에 모여 앉아 약사 삼촌의 비극적 결말에 대해 남편들 들으라는 듯이 '세상은 사필귀정이여~바람피우면 저렇게 된다니까...'같은 이야기를 큰 목소리로 떠들어대었다.
하지만, 나는 슬프고 우울했다. 한 순간에 인생을 망친 약사 삼촌이 안타까웠고, 쾌활했던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어서 슬펐다. 사실 험담을 하던 동네 주민들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산동네 중간에 위치했던 약국이 문을 닫자, 두 정거장 너머에 있는 병원을 다녀야 했기 때문이었다. 거리도 거리려니와 정답게 환자들을 개인적으로 챙겨주던 동네 주치의가 사라졌기 때문에 더욱 불편하였다.
그 불편은 산동네가 재개발될 1986년이 되어서야 해결이 되었다. 주민들 대다수가 다른 곳으로 이주했기 때문이고, 남은 주민들은 재개발 이후 들어선 커다란 병원의 혜택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많은 주민들은 아직도 동네 명의였던 그를 종종 그리워한다. 환자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할머니는 어떠하시더냐 묻던 그의 목소리와, 눈 다래끼의 고름을 짜내며 이마에 맺힌 송골송골한 땀방울, 옆집 개구쟁이들과 딱지놀이하던 순박한 30대 약사 청년...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