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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뚱이 Sep 29. 2021

지극히 개인적인 리더십 이야기 ①

- ‘SSKK’보다는 ‘KKSS’

오래전, 제가 직장생활 초기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발령받은 곳이 지점 인사과였죠. 인사과장은 30대 중반의 퉁퉁한 얼굴과 작고 매서운 눈초리를 가진 카리스마 맨이었어요. 게다가 수학과 출신... 그런데 전 숫자라면 질색하는 반 수포자 문돌이였으니, 앞으로 전개될 직장생활은 안 봐도 뻔했습니다.


"야, 이거 틀렸잖아! 다시 해와!" 


'아이씨... 틀렸으면 조용히 불러 고치라고 하면 되지, 여직원들 다 보는데 창피하게 소리를 지른담'


카리스마 맨은 시도 때도 없이 소리 질러댔고 저는 그의 살기에 놀라 움츠러들곤 했었죠. 그는 심지어 품의 올린 보고서를 짝짝 찢으며 던지기까지 했습니다.  


마침 사업계획 시즌이 다가와 인원 인건비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당시에는 엑셀이나 넘버스 같은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에 일일이 계산기와 수기로 장표를 채우고, 부서에 1대밖에 없는 PC(도스 환경에서 작동하는 구닥다리)를 활용하여 문서를 완결하여 본사로 보내는 프로세스를 거쳐야 했어요. 제대로 보고서를 완성하려면 무려 한 달 정도 걸리는 대공사였었죠.(지금은 그나마 행복한 거죠... 아, 이거 이야기하다 보니 '라떼는 말이야' 식이 되었네요ㅎㅎ)


저는 나름 밤을 새워 열심히 문서를 작성한 후 다음날 출근한 카리스마 과장에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수십 번이나 검토하고 만들었기에 자신이 있었죠. 그런데 이게 왠 일?

"야, 다시 해갖고 와!"


빠꾸였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다시 검토해봤지만 틀린 곳은 없었어요. 우물쭈물 또 갖다 주었더니 소리를 지르면 다시 빠꾸...

하... 이거 뭐가 틀렸다는 거야... 알려줘야 고치지.

저는 울상이 되어 그날 밤새도록 보고서를 다시 쳐다보고 또 쳐다봤지만 오류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다시 찾아가 힘겹게 말했다.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틀린 곳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야 인마, 누가 여기 박스 줄을 두 겹으로 그리라 했어? 그냥 한 겹으로 그리라고! 그리고 양쪽 여백을 봐!"

그는 줄자를 가지고 와서 보고서의 양쪽 여백이 서로 같은지 확인까지 해가며 소리를 질러댔어요. 박스 줄은 강조를 위해서 두 겹으로 그린 건데,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다시 고치라 했죠.


어? 틀린 게 내용이 아니라 겨우 이거였나? 아, 직장생활 고달프다... 어쨌건 그가 시킨 대로 수정하여 갖다 줬으나, 이미 저의 자존감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지요. 


요즘은 이런 상사분 없겠죠? 아니, 간혹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갑질 상사가 보이긴 하더군요.




당시 일을 돌이켜 볼 때, 저의 일 기본기 역량을 다지게 하려는 그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물론 억지로 긍정적인 면을 바라본다면 말이죠. 하지만 팔로워의 감정 상태나 개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윽박지르기 식 지시는 오히려 반감을 일으키는 역효과가 나지 않겠어요? 게다가 MBTI 유형으로 볼 때 저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ENFJ  남자입니다... 요즘 50 중반, 제2의 사춘기라서 그런지 여성 호르몬까지 철철 넘쳐 더욱 감성적으로 되어가네요. 


리더를 권위형, 민주형, 방임형 등 3가지로 분류한 고전적 리더십 이론으로 본다면 그는 권위형 리더였던 것 같아요. 권위형 리더의 특징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정답이고 반드시 직원들이 그것에 맞추도록 지도하는 것입니다. 소위 SSKK 이죠. 즉,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까라면 까라는 것입니다.


물론 산업화 시대처럼 효율을 중요시 여기는 때에는 그러한 리더십이 먹혀들기도 하였죠. 하지만, 지금처럼 아이디어로 먹고사는, 4차 산업혁명의 플랫폼 시대에 그러한 리더들이 많은 기업은 필망 한다고 단언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기업 고위층에는 당시 추억을 못 잊는 분들이 꽤 존재하는 것 같아요. 직원들에게는 수평적 조직문화와 창의성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구체적인 지시를 할 때는 SSKK 지시형이 많죠. 다른 의견을 제시해도 듣는 척만, 경청하는 척만 하는 것이 이분들의 행동 특징이죠. 


왜 그럴까요?


답은 '권력의 맛' 때문입니다. 권력이라는 것이 반드시 군대나 국가에서 주어지는 것만은 아니죠. 사기업에서도 직책을 부여받으면 비록 회사 내이긴 하지만 권력이 생깁니다. 이 조그마한 권력이라 하더라도 한 번 맛 들이면 헤어나지를 못해요. 우쭐해지죠. 자기 말 안 들으면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관철시킵니다. 아니면 없애버리든가... 어떤 이들은 회사 밖에서도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죠. 모그룹 라면 상무처럼 말에요. (이런 분들은 집에 가면 대개 마나님 앞에서는 꼼짝 못 하더라고요. 역시 실세는 집에 계시고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죠...)  


이제 SSKK가 아니라 거꾸로 KKSS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즉,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까라면 까라'는 것이 '까라고 까이지 말고, 시키면 생각해서 해! '라고요. 언어의 유희 같지만, 나름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캐치프레이즈 신조어 같아서 한 번 제안해봐요. 


다양한 의견이 나오도록 유도하고, 그것을 잘 조율하여 실천에 옮기도록 하는 것... 이것이 현대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리더십의 첫 번째 덕목이 아닐까...라고 지극히 개인적인 리더십 첫 번째 꼭지를 마무리해봅니다.


- 2021. 9월 용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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