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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다운 갤러리

템플롱 TEMPLON

by 수카 Sukha Mar 03. 2025
생-라자르 거리의 TEMPLON, 사진: 수카생-라자르 거리의 TEMPLON, 사진: 수카


    템플롱(TEMPLON)은 근사하다. ‘파리의 갤러리는 이런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던 곳이라 그럴까? 내게 파리다운, 파리스러운 갤러리를 묻는다면 어쩐지 템플롱이 제일 먼저 떠오를 듯하다.


    2023년 2월, 처음 템플롱을 방문한 건 아직 파리가 낯설던 때였다. 무슨 객기였는지 파리의 갤러리를 가본 적도 없으면서 파리의 갤러리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선언한 후 본격적으로 탐방을 나섰던 첫날이었다. 구글 지도에 잔뜩 저장해 놓았던 갤러리 목록을 따라 정신없이 갤러리들을 돌아다녔다. 내가 있는 곳이 파리의 중심가인 마레 지구(Le Marais) 인지도 모르고, 여기가 어딘지 모른 채 오직 랜드마크 만을 보기 위해 버스에서 내린 패키지 투어 여행객처럼 갤러리들만을 향해 걸었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갤러리라는 걸 알 수 있는 모던하고 미니멀한 외관의 한국 갤러리들과 달리, 파리의 갤러리들은 도시에 녹아든 고전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편리함에 길이 들여진 내가 이 오래된 도시에서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 매 순간 실감하던 때라 그랬을까? 그 다름이 신기하고 좋기보다 어색하고 불편했다. 아무리 낯선 곳이라도 전시장 안만큼은 고요했는데, 작품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갤러리들마저도 이 도시에서 내가 얼마나 겉돌고 있는지 상기시켜주는 듯했다. 결국 진이 빠져 오늘은 그만 집으로 발을 돌리던 참이었다. 현대적이면서도 파리의 고전적인 풍경과 어우러지는 템플롱이 거기 있었다.


    파리를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드는 전형적인 오스만 양식(Haussmann style) 건물의 1, 2층에 자리한 이 모던한 갤러리는 딱 적당히 눈에 띈다. 진회색 프레임으로 리노베이션 한 모던한 외관이 주변의 검은 철제 발코니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통유리로 된 파사드는 요란하지 않게 안을 비춘다. 굵고 간결한 선체로 쓰인 간판 역시 감각적이다. 템플롱을 모르는 사람도 들어가 보고 싶게 만드는 은은한 힘이 있다. 그래서 가려던 발을 멈추고 갤러리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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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비세리알 《아머스》 전시 전경, 2023년 01월 07일 ~ 2023년 03월 11일, 템플롱, 사진: 수카


    당시 갤러리에서는 프랑스의 젊은 작가 쟌느 비세리알(Jeanne Vicerial, b.1991)의 개인전 《아머스 Armors》(2023.01.07.-03.11.)가 열리고 있었다. Armors, 영어로 갑옷을 뜻하는 전시의 제목에 사랑을 뜻하는 프랑스어 Amour가 떠올랐다. 단단한 갑옷과 부드러운 사랑. 상반된 두 단어의 이미지가 전시장 초입에 우뚝 선 실로 된 갑옷들 위에서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검고 광택이 나는 실을 엮고 겹쳐 만든 동양적인 갑옷과 얼굴, 바닥에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과도 같은 실들. 처음 보는 여성 전사들의 모습이었다. 기묘하고 강인했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니 천장이 트여 지붕까지 볼 수 있는 아트리움(Atrium)이 있었다. 새하얀 벽과 함께 보이는 2층의 검고 장식적인 난간과 지붕의 모습이 갤러리 외관의 고전적이면서도 모던한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그 안에는 새하얀 기계 팔이 움직이며 이 전통적 형상의 갑옷을 뜨고 있었다. 철이 아닌 실로 된 갑옷이라 그랬을까. 하나하나 실을 겹쳐가며 갑옷을 만드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보란 듯이 빗나갔다.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잔느 비세리알은 과학과 예술을 결합하여 박사 연구를 진행했고, 낭비 없이 맞춤형 의류를 제작할 수 있는 특허 로봇 공정을 개발했다. 패스트패션 시대에 더 극명하게 나누어지는 기성복과 맞춤복 사이의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시도라고 한다. 하지만 작가가 로봇으로만 작품을 제작하는 건 아니다. 전통과 수공예에 가치를 두는 비세리알은 오랜 시간을 두어 이 섬유 조각들을 제작한다.


 

    아트리움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서니 더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전시장 중앙에 놓인 긴 좌대 위에 누워있는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여성의 모습과 벽면에 걸린 둥근 곡선이 두드러지는 갑옷들과 그 위로 길게 늘어진 몇 가닥의 붉은 실들. 몸 안쪽에서 피를 흘리는 듯한 그 모습은 갤러리 지하로 향하자 더 두드러졌다. 1층과 다르게 검게 칠해진 벽면들 앞으로 새하얀 실로 만들어진 하얀 갑옷들이 있었다. 1층에서는 많지 않았던 붉은 실이 달린 조각들이 지하에서는 다수를 이루었다. 단단하게 직조되어 있던 갑옷들은 몸통이 텅 비어있고 구멍이 뚫려 그 안으로 붉은 포푸리가 채워져 있거나 붉은 실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내장기관이 보이고 피가 흐르는 듯한 모습이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실로 만든 갑옷들 위에서 오랜 시간 존재해 왔지만 말해지지 않았던,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여성들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갤러리에서의 좋은 전시는 단지 훌륭한 작가의 좋은 작품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작가를 발굴해 낼 수 있는 갤러리의 안목과 작업 활동에 대한 지원, 고유의 매력을 가진 갤러리 공간, 작품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배치까지. 이외에도 수많은 요소가 합쳐져서 갤러리에서의 좋은 전시가 만들어진다. 템플롱에서 기분 좋은 전시를 본 후 템플롱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어떤 곳이길래 이런 세련된 전시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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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비세리알 《아머스》 전시 전경, 2023년 01월 07일 ~ 2023년 03월 11일, 템플롱, 사진: 수카

 

    알고 보니 템플롱은 1966년에 시작되어 60주년을 바라보고 있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서 깊은 갤러리였다. 템플롱의 대표인 다니엘 템플롱(Daniel Templon)은 21살의 나이에 센 강에 있는 생 루이 섬(Île Saint-Louis)에 있는 골동품 가게 뒤편 지하실에서 갤러리를 시작했다. 물, 불, 흙, 공기와 같은 자연의 4요소들을 주제로 한 전시 시리즈를 열었고, 당시 파리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도널드 저드(Donald Judd), 솔 르윗(Sol Lewitt), 댄 플래빈(Dan Flavin), 칼 안드레(Carl Andre),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와 같은 미국의 미니멀리스트들과 개념 미술가들을 소개하며 명성을 쌓았다. 1972년, 6년 만에 템플롱은 마레의 보부르 거리(Rue Beaubourg)에 새로운 공간을 마련했고, 그곳에서도 프랑스 누보 레알리즘 작가인 벤(Ben; Benjamin Vautier), 미국의 개념미술가 조지 브레히트(George Brecht), 미국의 후기 미니멀리스트 작가인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프랑스의 추상미술가 마틴 바레(Martin Barré) 등 여러 역사적인 작가들의 전시를 개최해 왔다. 그리고 추상표현주의 작가인 윌렘 데 쿠닝(Willem de Kooning), 팝아트 작가인 앤디 워홀(Andy Warhol)과 같은 작가들도 소개하며 다루는 작품의 범위를 넓혀왔다. 이렇게 특정한 형식을 고집하기보다는 첨단의 예술을 소개해 왔던 템플롱은 현재도 그 폭넓은 범위를 유지하며 다양하고 국제적인 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번에는 1972년부터 현재까지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보부르에 위치한 템플롱 갤러리에 방문했다. 존재감에 발이 이끌려 가게 되었던 그리니에 생 라자르(Grenier Saint-Lazare)에 위치한 템플롱과 다르게 보부르 거리에 위치한 템플롱은 자칫 지나치기 쉽다. 큰 길가에서 바로 볼 수 있는 생 라자르 공간과 달리 보부르 거리에 줄지어진 상점과 식당들 사이로 조그맣게 튀어나온 간판 아래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이 공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 외벽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파사주 코셰르(passage cocher)라는 통로가 나오는데 이를 지나 건물들 사이의 안뜰(cours)에 도달해야 템플롱 보부르가 있다. 처음 보부르 전시장을 찾아갔을 때 건물 안쪽에 공간이 있는지 모르고 한참을 서성거렸다. 사람들이 사는 곳 같은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도 되는 건지, 여기가 아니라 다른 입구가 있는 건지 고민하다가 우연히 안쪽에서 문을 열고 나온 사람 덕분에 외벽 안에 또 다른 공간이 있다는 걸 알았다.


보부르 거리의 TEMPLON, 사진: 수카보부르 거리의 TEMPLON, 사진: 수카

    

    아는 사람만 갈 수 있을 것 같은 이런 숨겨진 위치는 파리 갤러리의 특징이다. 파리 오스만 양식의 건물들은 밖에서 볼 때는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건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슷한 모양의 좁은 건물들이 사각으로 이어져 커다란 블록을 만들고 있다. 이 블록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작은 통로나 마당, 안뜰과 같은 공간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지지만 구조를 알고 나면 바쁘고 복잡한 큰 길가 안쪽에 숨어있는 평화롭고 조용한 이 공간들이 파리의 매력을 더해준다.


    이렇게 조용한 보부르 거리 안쪽에 위치한 공간에서는 잔느 비세리알의 전시와는 사뭇 다른 템플롱의 폭넓은 작품 범위의 다른 측면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미국 작가 윌 코튼(Will Cotton)(b.1965)의 개인전 《트리거 Trigger》(2023.05.24.-07.22.)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윌 코튼은 팝 가수 케이티 페리(Ketty Perry)의 히트곡 ‘캘리포니아 걸스(California Gurls)’ 뮤직비디오 예술감독을 맡기도 할 정도로 대중문화와 가까운 작가다. 그는 솜사탕, 마시멜로우, 쿠키, 막대 사탕과 같은 달콤한 디저트들과 유니콘,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 카우걸 이미지를 조합하여 환상적인 이미지들 만들어낸다. 넓은 직사각형 모양의 간결하고 탁 트인 전시장 속에서 그의 파스텔톤 회화들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특히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그려진 하늘색 배경에 노출이 심한 반짝거리는 카우걸 의상을 입고 분홍색 유니콘과 함께 서 있는 카우걸 회화가 눈을 사로잡았다. 미국 서부 영화, 팝 가수들, 광고나 상업적 이미지에 사용되는 성적인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로 만들어진 초현실적인 이미지. 눈을 돌리자 유니콘과 키스하는 카우걸 회화와 그와 다르게 유니콘에서 떨어지는 카우보이의 장면도 볼 수 있었다. 가볍고 성적으로 느껴지는 이러한 회화 작품들은 여성과 남성에게 극단적으로 다르게 주어지는 미국의 젠더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풍자와 그로 인해 트리거가 발동하는 정신분열적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넓게 펼쳐진 유리 천장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에 빛나는 환상적인 회화들이 어딘가 다른 공간으로 나를 데려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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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 코튼 《트리거》 전시 전경, 2023년 05월 24년 ~ 2023년 07월 22일, 템플롱, 사진: 수카

  

  보부르 공간을 뒤로하고 그리니에 생 라자르에 위치한 템플롱을 다시 찾았다. 도보 3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두 공간이지만 역시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이번에는 일본 작가인 치하루 시오타(Chiharu Shiota, b.1972)의 개인전 《피부 아래의 기억 Memory Under the Skin》(2023.05.24. - 07.22.)이 열리고 있었다. 잔느 비세리알처럼 주로 실을 이용해서 작업하는 치하루 시오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작업으로 풀어내는 작가다. 2015년 제56회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대표작가로 선정되며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친 치하루 시오타는 2019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2020년과 2022년에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가지는 등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소개된 작가다. 나 또한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리뷰를 보다가 처음 작품을 알게 되었는데 작품을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 기대를 품고 전시장에 갔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피가 잔뜩 튄 것처럼 보이는 점점 붉어지는 하얀 옷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서자 지난번 갑옷을 짜던 기계가 있던 아트리움은 천장부터 길게 늘어진 붉은 실과 그 속의 붉은 종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인간의 혈관을 상징하는 붉은 실을 공간에 설치하는 시오타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아트리움 뒤편의 벽면에는 황금색 배와 사람들 속에서 뻗어 나오는 동그란 기억의 무리를 그린 드로잉들을 볼 수 있었다. 지하 공간으로 들어서자 길게 늘어진 검은 실과 그 아래 놓인 웅크린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시오타 치하루는 유년기에 겪은 가족의 죽음, 두 번의 암 투병과 같은 삶과 죽음에 대한 개인적 존재적 경험을 작업으로 풀어내는 작가다.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와 붉고 검은 실로 가득한 형상이 언뜻 무섭거나 고통스럽게 느껴질 법도 한데, 삶과 죽음은 모두의 일이라서 그런지 자연스레 공감이 가고 도리어 위로가 됐다. 내면의 불안을 담아 붉은 실을 다뤄도 엉킴을 통해 인연을 말하고 희망을 상징하는 배 조각을 같이 제시하는 작가의 따스함이 느껴져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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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루 시오타 《피부 아래의 기억》 전시 전경, 2023년 3월 24일 ~ 2023년 7월 22일, 템플롱, 사진: 수카


    이렇게 파리의 중심부에서 60년이 가까운 시간을 지켜오며 현대미술을 주도해 온 템플롱은 아직도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예술부터 화려한 이미지가 눈에 띄는 트렌디한 작품, 삶에 대한 성찰을 제시하는 작품까지 폭넓은 최신의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전시를 열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소개 영상을 제작하고, 자체 출판물을 발행하며 작가들을 지원한다. 현재 템플롱은 다니엘 템플롱과 그의 아들인 마티유 템플롱(Mathieu Templon)에 의해 공동 운영되고 있다. 템플롱의 브뤼셀과 뉴욕 지점에서 활동해 온 마티유 템플롱은 다양한 국제적인 작가들을 파리에 소개해 온 템플롱의 전통을 지키고,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파리의 작가들을 세계 시장에 알릴 계획이라고 한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작가들이 템플롱과 함께할지, 어떤 전시들이 열릴지는 아직 모르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증명해 온 템플롱의 수준 높은 안목이 보여줄 예술들이 사뭇 궁금해졌다.


생-라자르 거리의 TEMPLON, 사진: 수카생-라자르 거리의 TEMPLON, 사진: 수카



템플롱 TEMPLON 

30 Rue Beaubourg 75003 Paris
28 Rue du Grenier Saint-Lazare 75003 Paris
화-토 10:00-19:00
T+33 1 42 72 14 10 / T +33 1 85 76 55 55

@galerietemplon

https://www.templon.com

paris@templon.com





인스타그램 @galleryin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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