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본 랑베르 Yvon Lambert
미술과 책은 서로를 떠날 수 없다. 작가들은 작품집을 출간하고, 전시는 도록으로 만들어진다. 길고 긴 미술의 역사나 예술의 철학을 다룬 책들은 넘쳐나며,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동시대 미술 현황을 싣는 미술 잡지들은 매주, 매달 새로이 발행된다. 예술가와 큐레이터는 아이디어를 기록하고, 많은 예술 애호가들은 책을 통해 그 생각과 만난다.
때로 책은 시간적ㆍ물리적ㆍ금전적 한계로 소장할 수 없었던 작품을 가지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파리의 미술이 궁금하다면 파리에서 직접 전시를 보아도 되지만 파리의 미술을 다루는 책을 읽어도 된다. 갤러리이자 예술 서점인 이본 랑베르에서는 둘 다 가능하다.
다니엘 템플롱과 함께 파리를 대표하는 갤러리스트로 손꼽히는 이본 랑베르는 1966년, 불과 30세의 나이로 생제르맹 데프레 지구에 갤러리를 열었다. 솔 르윗(Sol LeWitt), 리처드 롱(Richard Long), 데니스 오펜하임(Dennis Oppenheim), 브라이스 마든(Brice Marden),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 등 미국의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대지 미술 작가들은 그의 손을 거쳐 파리에 소개되었다. 굵직한 작가들을 소개하며 명성을 쌓은 랑베르는 1997년 마레 지구로 자리를 이전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자유구상(Figuration Libre)작가인 장 샤를 블레(Jean-Charles Blais), 실험적인 스페인 작가 미구엘 바르셀로(Miquel Barceló), 프랑스 현대미술의 거장 크리스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ltanski), 미국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낸 골딘(Nan Goldin)등 기념비적인 작가들의 전시를 열었다.
그렇게 갤러리를 성장시키고 확장한 랑베르는 2000년 아비뇽에 컬렉션 랑베르(Collection Lambert museé d’art contemporain)이라는 미술관을 설립하고 2012년 500점이 넘는 대규모의 개인 컬렉션을 정부에 기부하는 등 기록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그러다 돌연 2014년 기존 갤러리의 문을 닫고 2017년 서점과 출판업을 보다 중심으로 한 지금의 이본 랑베르를 열었다.
몇십 년간 성공적인 갤러리스트로 경력을 쌓아 온 이본 랑베르가 돌연 갤러리의 규모를 줄이고 미술 서점을 시작한 건 왜일까? 독특한 행보처럼 보이나 책과 미술은 떨어질 수 없고 출판 업무는 미술관과 갤러리 업무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기에, 그의 관심사가 책과 책이 있는 공간으로 옮겨간 건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른다.
갤러리에 서점과 출판사를 통합한 형태인 현재의 이본 랑베르는 마레 지구 북동쪽에 자리를 잡았다.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Musée National Picasso-Paris),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인 앙팡 루즈 시장(Marché Couvert des Enfants Rouges) 그리고 한국에서도 유명한 편집샵인 메르시(Merci) 등 마레의 매력적인 공간들을 도보 5분 거리에 두고 있다. 베이지색 석조 건물, 간결한 폰트의 은색 간판, 그리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세련된 내부. 미니멀하고 현대적인 이본 랑베르의 외관은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마레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주위와 어울리면서도 눈길을 붙잡는 이본 랑베르의 디자인은 이화여자대학교의 복합단지 캠퍼스 ECC를 디자인했고 2021년 제3 회 서울 도시건축 비엔날레의 총감독을 역임하며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프랑스 건축의 거장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가 맡았다.
파리의 문화적 중심지인 마레 지구를 거닐다 보면 이 고급스러운 외관에 무심코 발걸음이 멈추게 된다. 어느날 마레의 좁은 골목길을 걸어 다니다 이곳을 발견했다. 입구 앞 작은 표지판에 귀엽게 그려진 책 모양과 다른 쪽에 큼지막하게 쓰인 “ART→”. 단순한 글씨에 마음을 빼앗겼다. 표지판처럼 내부 공간은 크게 책과 예술,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입구부터 널찍하게 펼쳐진 공간은 책을 담당했다. 역시 도미니크 페로가 디자인한 내부는 벽면을 따라 흐르는 기다란 나무 책장과 중앙의 강철과 유리로 된 넓은 테이블로 이루어져 있어 포근하면서도 현대적이었다. 내부는 이본 랑베르에서 출판한 작품집, 도록, 비평서들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예술 서적들과 아티스트북, 일반 서점에서는 찾기 힘든 희귀한 예술 잡지들로 꽉꽉 채워져있었다. 사이사이에 있는 서점의 이름이 적힌 에코백이나 작은 크기의 작품들 그리고 플립형 스탠드에 보관된 아트 프린트들은 빼곡한 책들 사이에서 재밌는 변주를 주었다.
기다란 나무 책장을 따라 복도를 지나니 “ART→”를 담당하는 안쪽의 갤러리 공간을 만날 수 있었다. 책방과 출판을 중심으로 운영되지만, 이본 랑베르는 여전히 꾸준히 전시를 열고 소속 작가들도 있는 제대로 된 갤러리다. 작은 전시장 크기에 맞게 규모가 큰 작품들보다는 작고 감각적인 드로잉, 사진, 회화 작품 등이 주로 전시된다. 나는 아일랜드 출신의 건축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나이젤 피크(Nigel Peake)의 《이곳 또는 저곳 Here or There》(2024.06.20.-07.28.) 전시를 보았다. 전시의 제목처럼 다양한 장소에서 수집된 기억을 주제로 하는 전시였다. 작가는 일본 여행에서의 기억을 깔끔한 단색 드로잉들로 남겼고, 여행 장소에서 소리를 채집했다. 특정한 하루에서 색깔을 뽑아내 컬러칩들로도 만들었다. 서정적인 작품의 분위기가 서점의 분위기가 잘 어우러졌다.
전시를 본 후 서점 쪽으로 돌아오니, 진열장 위로 줄지어 놓여있는 책들의 표지가 예술 작품들처럼 보였다. 감각적인 책들의 표지를 구경하고, 이따금 내용을 훑어보기도 하다가 구석의 아트 프린트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시간이 퍽 즐거웠다. 한참을 머물다 프랑스의 미술ㆍ건축 잡지 『Frog』를 한 권 샀다. 집으로 돌아와 잡지를 넘기자 서점의 공기와 책 냄새가 다시 퍼지는 듯 했다. 예술의 이미지와 텍스트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될 공생관계지만 그렇기에 더욱 제법 다른 기쁨을 준다. 그런데 예술을 담은 책과 그 책을 품은 공간은 두가지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이본 랑베르를 종종 찾는다.
주 1)
자유구상: 1980년 이래 지배적이었던 프랑스의 구상회화를 일컫는 말. 그린다는 회화적 행위에 일차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이에 따라 주어지는 회화적 이미지와 그것이 회복시켜내는 서술적인 의미구조를 강조한다. 자유구상은 이탈리아의 트랜스 아방가르드나 독일의 신표현주의, 뉴욕의 낙서미술 등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 포함된다.
(월간미술, 세계미술용어사전, https://monthlyart.com/encyclopedia/자유구상/ , 2024년 8월 4일 접속.)
이본 랑베르 Yvon Lambert
14 Rue des Filles du Calvaire 75003 Paris
화-토 10:00-19:00 / 일 14:00-19:00
T +33 1 45 66 55 84
@librairieeyvonlam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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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rairie@yvon-lambert.com
인스타그램 @galleryinparis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파리 갤러리 안으로"는 매주 한 편씩 업로드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