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가장은 누가 할래

by 정도비

결혼한 지 3년 된 부부인 우리는 서로 가장을 하라고 떠미는 장난을 친다. 주로 하기 싫은 일, 귀찮은 일을 해야 할 때 그렇다. 예를 들어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뭘 신고하러 가야 할 때 서로 네가 가장이니까 다녀오라고 하는 식이다. 열띤 양보가 오고 가다 보면 누가 가장을 할지 가위바위보로 정하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하지만 아직 해본 적은 없다. 그래서 아직 우리 집 가장이 누구인지는 미지수이다. 나는 주로 오빠가 나보다 나이가 더 많으니까 가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남편은 내가 중요한 결정들을 더 많이 하기 때문에 내가 가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결정을 내가 더 많이 한다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사람이 두 명 있는데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성질 급한 사람 그리고 자기주장 강한 사람이 그 일을 끌고 나가게 다. 우리 둘 사이에서는 내가 더 성질이 급하고 자기주장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 사이의 일 그리고 양가의 크고 작은 일들까지 내가 고민하고 결정하는 경우가 더 많다. 대신 남편은 내가 큰 틀을 결정한 후 세부적인 여러 가지를 부탁하면 누구보다 충실하게 실행을 해 준다.

친구들을 만났는데 한 친구가 나에게 남편이 자상해서 좋겠다고 하길래, 자상하고 부드러운 대신 크고 작은 일들을 내가 추진해야 할 때가 많다고 했더니 다른 친구가 자기 남편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친다. 그 친구 집은 뭔가 중요한 가정 내 이슈를 해결해야 할 때 친구가 고심을 하고 있으면 남편이 “여보는 그동안 항상 잘해왔어! 이번에도 잘할 거야! 여보 파이팅!”하고 마치 친구 개인의 일인 양 응원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그제야 우리 집의 변화가 실감이 되었다.

결혼 초에는 왜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중요한 일을 결국 내가 결정하고 챙기게 만드는지에 대해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집에 뭔가 중요한 일이 있어 내가 고민을 하고 있으면 남편이 스르륵 옆에 와서 “여보 스트레스받지 마! 천천히 생각해! 다 잘될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스트레스받지 마.”하고 응원을 해준다. 그럼 나는 감동을 받아 응원해 줘서 고맙다, 역시 오빠 밖에 없다고 감사를 표하고 남편은 훗, 뭐 이 정도야, 하는 미소를 띠고서 다시 스르륵 사라진다. 이럴 수가, 같이 사는 3년 동안 이렇게나 가스라이팅을 당했다니!


친구 이야기를 듣고서 이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더 이상 남편에게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해 본다. 앞으로 중요한 일은 무조건 남편이 결정한다, 우리 집 가장자리는 반드시 남편의 것이다 하고 생각해 보지만 성질 급한 내가 또 이리저리 먼저 팔딱거리고 있을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다. 그 옆에서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남편의 모습까지도.

난 정말 가장하기 싫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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