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색깔> 제작기 (7)

프로덕션: S# 강의실

by 백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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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한 밤, 동민이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끝으로 동민의 방에서 계획된 모든 촬영이 끝났다. 이 때, 낮에 밤 장면을 촬영하는 작업은 또 색다른 경험을 안겼다. 아무리 날이 흐리긴 했어도 대낮이었다. 어두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커튼을 치고 모든 빛을 최대한 차단했지만 역부족일 수 밖에 없었다. 촬영 감독님이 마침 그 공간에 있던 간접등을 켜자는 의견을 내셨다. 자기 전 머리 맡에 켜두는 전등의 따뜻한 불빛을 이용하면 밤의 느낌을 낼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이셨다. 추후 편집 과정에서 이 장면에 따뜻한 색감을 불어넣기에도 딱 알맞은 선택이었다. 훗날, 내손퀴 동료분과 영화 촬영 후일담을 나눴을 때, 어떤 분은 밤의 느낌을 내려고 창문에 댈 수 있는 암막 판넬을 손수 다 만드셨다고 했다. 원하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촬영 소품, 조명 등 각종 아이디어와 방법을 총동원하는 게 또 영화의 묘미구나 깨달았다. 번뜩이는 재치, 유연성, 임기응변에 강한 특성도 영화 감독의 역량에 중요한 핵심 요소겠구나 싶었다. 주로 내게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이 좀 재밌기도 했다.


모든 스태프들은 동민의 방을 벗어나 학교로 향했다. 짐을 이고 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무리라서, 제작팀이 예약해준 택시를 타고 한 팀씩 학교로 이동했다. 촬영팀은 준비한 차에 장비를 싣고 따로 움직였다. 나는 장소를 이동하는 동안, 후련함과 걱정이 혼재된 한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익숙한 공간인 학교로 간다는 사실이 조금은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동민의 방은 동민이가 느끼는 감정만큼이나 내게도 차갑고 무거운 공간이었다. 낯설고 좁은 방에 십수 명의 스태프들이 모여있는 것 자체가 많이 답답했고, 그보다도 모든 게 낯선 첫 촬영이었던 만큼 그 분위기에 눌려 긴장감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없이 한바탕 촬영을 하고 나니 이제부터는 관성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약간 올라왔다. 사실 자신감이라기 보다도, 그냥 이렇게 하면 원하는 만큼 완벽하지는 않아도 얼레벌레 결과물이 나온다는 위안감에 가까웠다. 이렇게 생각하니 동민의 방을 벗어나면서 마음이 왠지 홀가분했다.


스태프들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대관한 학교 강의실에 짐을 풀었다. 점심 식사를 목적으로 식당을 예약해뒀었는데 시간 상 이유로 햄버거를 포장해 점심을 다 같이 때웠다. 식사 시간 겸, 촬영 준비 시간으로 1시간 정도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촬영 장비가 하나 둘 올라오고, 콜타임에 맞춰 학생 역할의 엑스트라 배우들도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촬영 준비가 거의 마무리 될 때쯤, 교수 역할로 캐스팅한 배우님도 도착하셨다. 사전에 조율했던대로 깔끔한 셔츠를 입고오셔서 그런지, 강의실을 배경으로 만나봬서 그런지, 정말 자기만의 세계를 지닌 교수의 분위기가 풍겨서 만족스러웠다. 악역이기도 한 이 교수 역할은 동민이와 대척점에서 서 있는 인물로, 정상성이란 틀 위에서 색을 바라본다. 사실 교수 역할은 따로 모집 공고를 내지 않았었는데, 배우 모집 당시 들어온 수많은 프로필을 검토하던 중 이 배우님이 가진 강렬한 이미지에 이끌려 캐스팅을 했다. 시나리오 작업 단계에서 교수의 이미지는 빈칸이었는데, 배우님의 프로필을 보고나서부터 교수의 이미지 상이 잡히기 시작했다. 독특한 이미지의 소유자, 겉으로 보기에는 밝고 유쾌해보이지만 스산한 눈빛이 한 번씩 새어 나오는 그런 이미지를 빈칸에 채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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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과 의자를 카메라 앵글에 맞게 배열하고 사용하지 않는 집기는 구석에 몰았다. 모든 스태프들이 손을 모으니 금방 정리가 됐다. 어떻게 장면이 채워지는지 모니터와 실물을 견주며 엑스트라 배우들의 위치를 알맞기 지정해 앉혔다. 자리마다 필요한 노트북, 필통, 그림 등의 각종 소품도 세팅했다. 강의실 장면은 영화의 맨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중요한 포인트였다. 첫 장면에서 불안함으로 가득한 동민 표정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이윽고 편안한 미소로 뒤바뀌어 있다. 첫 장면에서 무채색이던 동민의 옷도 마지막 장면에서는 진한 원색의 옷으로 바뀌어 있다. 다른 날로 상정된 장면인만큼 엑스트라 배우들을 포함해 의상도 다르게 전환해야했다. 스태프들의 외투와 옷을 총동원해 적당히 의상을 교체했다. 준비를 한다고 했음에도 현장에서 급하게 조정이 필요한 부분이 많았다. 얼렁뚱땅 흘러가지만 서로가 서로의 허술한 부분을 메꾸며 어찌저찌 잘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상 얘기를 좀 하자면, 큰 규모의 영화에서는 배우와 연출 방식에 맞는 의상도 전부 구매하거나 대여해서 준비하겠지만, 궁핍한 예산 상의 이유로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각 장면에 인물들이 착용하면 좋을 의상을 리스트업해서 배우님들과 공유하고, 배우님이 실제로 가지고 계신 옷을 파악해주시면 그 중에 최선의 의상을 선택하여 촬영장에 준비해오도록 부탁을 드렸다. 또한, 연출팀은 의상을 장면의 시간 순서에 따라 잘 계산해서 옥의 티가 없게끔 조정해야했다. 동민이의 단독 촬영 장면 위주였던 첫 날 촬영에서는 크게 헷갈릴 부분이 없었지만, 경준과 동민 두 인물이 여러 장면에서 만나는 이틀차 촬영에서는 의상 계산이 꼬여버렸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연출팀원이 내게 질문했다. ‘이거 다른 날인데 같은 옷 입고 있어도 괜찮나요?’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또르륵 굴러갔다. 급하게 배우님을 찾았고 다행히 걸치고 온 여벌 의상이 있으셨다. 이 장면부터는 이 의상을 걸치도록 부탁드렸고 다행히도 상황을 잘 넘길 수 있었다. ‘진짜 얼렁뚱땅 장난 아니다.’ 조연출과 안도의 웃음을 나눴다.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오케스트라 동아리 연주회에 참가하기도 했고, 교생실습을 끝마치기도 했다. 그 인연으로 각각 만난 두 친구들을 어쩌다보니 영화에 끌어들였다.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는 무심코 건넨 도움 요청에 되려 반색했고 흔쾌히 제작팀의 보조 역할로 참여하며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교생 실습에서 만난 친구는 미술 전공생이었는데, 주인공 동민의 설정에 대한 자문과 여러 미술 소품을 지원해주었다. 미술 전공생들이 과제 검사를 받을 때는 과제를 제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수업 시간에 완성된 과제에 대하여 교수님과 학생들이 피드백을 나누는 합평회, 즉 크리틱 방식이라는 것도 그 친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보는 내가 시나리오를 수정하고 촬영 장면을 구상할 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이 친구는 자신이 만든 그림이나 공부할 때 썼던 미술 자료들도 기꺼이 빌려주었다. 이 소품들은 동민의 방, 강의실 장면에서 공간을 꾸미는 용도로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이 친구들에게 이렇게 다가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흘러가버리는 인연들 중 하나 정도로 지나쳐버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빌미로 용기를 낼 수 밖에 없었고, 우연히 마주친 인연들을 붙잡았다. 나의 용기에 대한 응답으로, 친구들에게서 돌아온 도움의 손길은 내 마음의 빗장을 열고 대화의 물꼬를 텄다. <좋아하는 색깔>은 이렇게 우리가 마음을 나누는 시작점이 될 수 있었다. 이 친구들 뿐만 아니라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여러 스태프들을 보면서도 참 귀하고 소중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내가 사람들 속으로 섞여 가도록 이끌었다. 혼자 남겨진 채 외로워할 틈이 없었다.


기존에 절친했던 친구들과도 한층 더 깊은 유대감을 쌓을 수 있었다. 각자 바쁜 일정을 제치고 모여준 그 마음들에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 어떤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영화 촬영 현장이 마치 명절같다고 이야기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나를 위해 한 데 모여 정을 나누는 그 풍경은 비현실적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모두 친구지만 서로 접점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이들이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그 풍경은 제각기 조각들이 모여 빚어낸 콜라주 같기도 했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장면이었다. 눈을 돌리면 전부 나의 사람들, 그들이 나를 위한 마음을 간직한 채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 특별한 감동은 내가 영화를 찍는 내내 기분 좋은 원동력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영화를 만드려는 사람에게 ‘친구 많냐 아니면 돈이 많냐’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는데, 나는 돈은 없어도 친구가 있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행운아가 아닐까 싶다.


강의실 장면을 찍던 중, 한 친구가 내게 갑자기 새 옷 하나를 불쑥 건넸다. 내가 아침부터 초긴장 상태로 뛰어다니느라 땀범벅이된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다가 시장에 가서 옷을 사온 것이다. 땀에 절은 내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뽀송하니 기분이 상쾌했다. 그 어떤 백 마디 응원의 말보다 묵직한 응원의 마음 하나가 전해져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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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시절 즐겨 듣던 우효의 <A Good Day>가 떠올랐다. 어제 처음 본 이들과 오늘은 친구가 되는 시절, 풋풋한 설렘에 한껏 취해 지내는 나날들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그 시절 언젠가 친구들과 수영장에 갔다. 아주 화창한 날이었는데, 들뜬 군중들 사이에 덩그러니 앉아 <A Good Day>를 들었다. 문득 행복한 사람들 틈에 내 몸뚱이를 구겨넣은 기분이 들었다. 밝은 제목을 달고 어두운 우울을 간직한 이 노래가 딱 그런 내 마음을 퍼올린 듯 절묘하게 와닿았다. <A Good Day>를 듣고 있으면 그날의 내 모습이 생각난다.


얼마 뒤 우효 콘서트를 갔을 때, 우효는 이 노래가 반어법의 노래라고 소개했다. ‘Life is long everlasting, When it’s only about you.’ 이 가사를 곱씹어본다. 마치 우리는 삶이 영원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삶을 나에 대한 이야기로 메운다. 나의 욕심, 나의 완전함, 나의 희망, 나의 억울함으로 삶을 채운다. 마치 영원을 살 것처럼 그 무엇 하나 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 주저 앉아 울고 만다. 작은 흠집 하나에도 무너져 내리고 만다. 하지만 삶은 영원하지 않기에, 삶은 타인에 대한 이야기로 번져가야 하는 게 아닐까.


나의 이야기에 갇혀있는 시간이 길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향한 삶은 영원한 삶을 쫓는 일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위해 내가 살아야 하는 순간은 내 삶을 지탱해주기도 한다. 누군가 때문에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은 그 자체로 꽤 희망적이다. 내 삶이 오로지 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게 되는 순간, 살아갈 이유가 생기기도 한다. 죽지 못할 이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새내기 시절의 그 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어폰을 빼던질 것이다. 혼자만의 세계를 박차고 나와 그들의 이야기를 물어보고 싶다. 하하호호 신나게 웃고 떠들며 행복한 시간을 꼭꼭 씹어 삼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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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 장면은 영화의 맨 처음과 끝에 등장하며, ‘좋아하는 색깔 찾기’ 과제의 시작과 종결을 담아낸다. 동민은 경준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최종적인 과제 결과물로 완성해낸다. 이 그림은 빨간 노을빛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무채색의 톤으로 표현되어있다. 동민은 자신이 보고있는 세상을, 자신이 좋아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냈다. 이 그림을 바라보는 동민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동민의 불안했던 눈빛은 편안한 눈빛으로, 행여 틀리기라도 할까 무채색만을 고집하던 옷 스타일은 과감한 원색의 옷 스타일로 바뀌어있다.


동민의 과제 결과물로 등장하는 이 그림은 너무도 중요한 소품이었다. 연출팀원을 통해 소개받은 미술전공생 지인에게 작업물을 의뢰할 수 있었다. 다소 추상적인 가이드를 드렸는데도 경준의 모습 너머에 짙게 깔린 무채색 하늘을 너무 잘 표현해주셔서 깜짝 놀랐다. 전색맹은 무채색에 대한 인식력이 매우 발달해있는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더더욱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그림이 필요 했는데, 내 상상 이상으로 멋진 그림을 완성해주셔서 감사했다. 이렇게 귀한 인연들이 차곡 차곡 모여 영화를 완성해나가고 있었다. 나만의 좁은 세상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여러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복작복작 번져가고 있었다.


경준의 그림.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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