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덕션: S# 잔디밭
#1
색채학 수업, 좋아하는 색깔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과제 앞에 동민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다. 동민은 교수에게 쭈뼛대며 질문한다. 좋아하는 색깔을 모르겠다는 동민의 질문에 교수는 역으로 질문한다.
“학생은 뭘 좋아하죠?”
동민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본다. ‘내가 좋아하는?’ 동민의 내레이션이 울려 퍼지며 하늘 인서트샷으로 장면이 전환되고, 타이틀이 올라온다. 차분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잔디밭 위에 누운 동민과 경준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경준은 잔디밭에 털썩 누워 카메라를 든다. 그런 경준을 동민은 바라본다. 경준이 좋아하는 하늘의 색깔에 대해서 과제로 제출하면 어떨까 동민은 생각한다. 동민은 경준의 카메라를 빌려 하늘의 모습을 찍는다. 하늘 한 가운데 경준의 뒷모습이 걸려있다.
#2
동민은 텅 빈 방에 앉아 하늘 사진을, 경준의 뒷모습을 본다. 동민은 색깔 노트를 꺼내든다. 색상환표가 덕지덕지 붙은 이젤은 무기력하게 서있고 동민은 팔레트를 펼쳐 색깔을 하나씩 헤아려본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과제에 답답해하며 동민이 망연자실 누워버린다. 동민은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고, 이어지는 하늘 인서트샷, 그 다음 비춰지는 건 잔디밭에 혼자 누워있는 동민의 모습이다. 고독의 끝으로 침잠하던 동민은 경준과 함께 누웠던 잔디밭을 떠올린다. 동민의 마음은 잔디밭 주변을 하염없이 맴돈다. 배터리가 닳은 카메라가 힘 없이 꺼져버린다. 좋은 구실 삼아 동민은 경준에게 전화를 건다. 통화연결음 너머 이윽고 들려오는 경준의 목소리, 동민은 경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3
동민과 경준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한다. 두 사람의 뒤로 잔디밭이 보인다. 생기 가득한 초록빛은 두 사람을 집어삼킬 듯 눈부시다. 동민은 경준에게 카메라를 돌려 주며, 기어이 완성해낸 그림도 슬며시 꺼내 보인다. 홀로 간직해온 자신의 세상을 경준에게 열어 보이는 순간이다. 동민은 사실 겁이 난다. 나는 전색맹이라고, 나도 너와 같다고, 내가 좋아하는 게 사실은 너라고 말하면 경준의 표정은 어떨까? 두렵지만 동민은 경준의 말을 붙잡고 용기를 낸다.
“동민아, 지금 이 하늘의 모양과 색깔은 지금 이 순간, 딱 한 번 뿐이다?”
“오직 이 순간, 단 한 번, 그래서 맞나 틀리나 생각할 틈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그 순간을 찍어야 해. 멋있지!”
“그래서 난 하늘 사진 찍는 게 좋아.”
경준이 하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경준이 하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처럼,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감정이 지나가기 전에 꼭 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동민은 단순해지기로 한다. 이게 내 색깔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동민의 눈에는 왠지 모를 벅참이 고여있다.
“이게 내 색깔이야. 내 노을색, 예쁘지?”
경준은 아무 말없이 동민을 감싸 안는다.
*
잔디밭은 동민이 경준을 바라보고 담는 곳이다. 그래서 잔디밭은 동민이 경준을 좋아하는 감정이 끓는 공간이다. 하지만 동민은 이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민은 이 감정이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외면한다. 알록달록한 풍경은 동민에게 시커먼 잿빛 풍경일 뿐이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만끽하기도 전에 동민은 옳고 그름의 문제에 단단히 사로잡힌다. 남다른 색깔로 물들어있는 자신의 세상을 원망하고 비관한다. 동민은 자신이 남들과 같아지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동민은 색깔 노트를 꺼내 든다. 남들이 보는 색깔을 조금이라도 흉내 내고자 색깔을 구분하는 일에 지독하게 매달려온 동민이다. 동민은 자신을 숨기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동민이 보는 세상의 색깔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 동민은 평생 옳은 색깔을 찾는 일에 골몰해왔지만, 이번에는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을 찾기 위해서 떠올려야 하는 것은 더 이상 색깔 노트 같은 것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 복잡한 고민에 대한 해답은 경준에게 있다. 경준은 적록색맹을 가졌지만, 빨간색이든, 초록색이든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경준은 잔디밭 장면에서 처음엔 빨간색 옷을 입고 마지막엔 초록색 옷을 입는다. 동민이라면 절대 기피했을 색상 선택이지만, 경준은 자신이 구분하지 못하는 색깔의 옷을 집히는 대로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닌다. 오히려, 경준은 그 색깔을 좋아하는 듯하다. 남들은 빨간색 혹은 초록색이라고 보지만, 경준에게는 다르게 보이는 그 색깔의 느낌을 경준은 좋아한다. 경준에게는 이 색깔이 좋으면 좋은 것이다, 남들 눈에 그 색깔이 빨간색이든 초록색이든 중요치 않다.
잔디밭은 영화에서 총 세 번 등장한다. 동민이 경준을 바라보는 마음이 담긴 첫 번째 장면, 홀로 남겨진 동민을 비추는 두 번째 장면, 동민과 경준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세 번째 장면까지, 잔디밭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이야기의 핵심적인 맥과 함께 흘러간다. 잔디밭은 두 사람의 사랑을 매개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연출한 퀴어 영화 <모리스>와 <콜미 바이 유어 네임>에는 잔디밭을 뒹구는 연인이 등장한다. 원초적인 향기와 싱그럽고 순박한 생기를 머금은 사랑을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나는 <좋아하는 색깔>에도 이런 사랑을 데려오고 싶었다. 서로를 좋아하는 동민과 경준의 마음이 풀 내음처럼 흐르고 있는 잔디밭 장면은 두 명작에 대한 존경을 담은 오마주이면서, 어떤 시절 내가 좋아했던 수많은 것들에게 헌사하는 선물 같은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