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색깔> 제작기 (10)

포스트 프로덕션: 상영회

by 백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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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은 끝났지만, 어마무시한 후반 제작 과정이 남아 있었다. 어마무시하다는 표현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어쩌면 영화 촬영에 쏟은 에너지 그 이상을 쏟아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직접 경험 하면서 여러 번 절감했다. 약 2년 간의 후반 제작 기간 동안, 잊을만 하면 한 번씩 해야 할 일들이 발생했다.


조연출 친구를 통해 섭외한 편집 감독님께서 일단 내손퀴 상영회용으로 쓰일 영화 편집본을 완성해주셨다. 영화 촬영이 끝났을 때, 내손퀴 상영회는 고작 두 달이 채 안 남은 시점이었으므로, 모든 후반 제작 스케줄은 상영회에 무사히 작품을 올리는 것에 방점을 찍고 움직였다. 2~3주 후, 수많은 조각으로 나눠져 있던 장면들이 하나의 영상으로 모아진 편집본을 보니 참 기분이 이상했다. 바라고 바랐던 꿈이 현실이 된 듯 너무 신기하기도, 아쉬운 점들이 눈에 많이 들어와서 왠지 모르게 민망하기도 했다.


이 편집본 초안은 당장 상영회에 올릴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임시로 간단한 색보정 처리만 해둔 상태였고, 사운드는 틀만 잡힌 상태였다. 색보정은 추후 배급용으로 넘길 때 마무리한다고 쳐도, OST를 포함한 사운드 믹싱은 남은 2~3주 안에 모두 완성시켜야 상영회에 올릴 수 있었다. 게다가 편집 감독님께서 판단하셨을 때, 동시녹음본을 그대로 쓰는 것보다는 후시녹음을 꼭 진행하기를 권장하셨다. 또, 동민이 과제를 제출하는 엔딩 장면에서 그림 설명이 쓰인 종이가 잠깐 보여지는데, 이 글을 관객들이 읽기 어렵고 부자연스러울 것 같다며, 주인공의 내레이션을 통해 이 내용을 전달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해주셨다. 글을 보여주기만 하면 관객들에게 다 전달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지점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아이디어 주신대로 내레이션을 입힌 버전으로 엔딩 장면을 완성했는데, 이는 내가 가장 만족하는 장면 중 하나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들은 연출팀원, 배우님, 편집 감독님 등 다른 사람의 의견이 함께 섞여 시너지를 내는 장면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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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표는 OST 제작과 후시녹음을 포함함 사운드 믹싱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OST는 음악 감독님을 섭외해 영화에 맞는 곡들을 작곡해서 수록하고 싶었다. 편집본을 보면서 음악이 필요한 구간들을 선별하고, 어떤 느낌의 노래가 필요한지, 레퍼런스 삼을 곡들은 뭐가 있는지 상세히 적은 작업 요청서를 밤새워 작성했다. 영화 제작 관련 사이트를 열심히 검색한 끝에, 음악 감독님 한 분을 컨택할 수 있었고, 독립단편영화에 음악으로 참여해보고 싶으셨던 감독님은 흔쾌히 작업 의뢰를 승낙하셨다.


OST는 상영회용 편집본에 수록됐던 5곡과, 추후 최종 마스터링 편집본에 추가 수록된 2곡을 포함해 총 7곡이 제작되었다. 영화의 흐름 순으로 곡을 간단히 설명해보자면, ‘경준과 동민’은 타이틀과 함께 등장하는 곡이며 잔디밭에 누워있는 경준과 동민의 모습으로 부드럽게 장면을 이어준다. ‘동민의 방’은 외롭고 적막한 동민의 마음을 대변하는 쓸쓸한 곡인데, 이 곡의 테마는 뒤이어 나오는 ‘색맹’과 ‘고백2’의 테마로도 변주되어 이어진다. 특히, ‘고백2’는 동민이 경준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두 사람이 포옹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중요한 곡인데, 혼자만의 방에 갇힌 동민의 감정이 경준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맥락을 담았다. ‘색맹’은 동아리방에서 경준이 적록색맹인 것을 얼떨결에 고백하며, 동민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사용되었다. ‘고백1’은 동민이 경준에게 기울어지는 장면에 흘러나오는 곡으로 두 사람 사이의 설렘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곡은 이후 본격적인 고백 장면에서 등장하는 ‘고백2’으로 도약하는 전조곡이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나의 하늘색1’은 경준과 동민이 하늘을 배경으로 이야기나누는 옥상 장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해, 동민이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고백1’과 마찬가지로 엔딩곡인 ‘나의 하늘색2’의 전조곡으로서 기능한다. ‘나의 하늘색2’는 동민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 되는 엔딩 장면부터 엔딩 크레딧 끝까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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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T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사운드 믹싱 감독님을 섭외해 후시녹음을 진행했다. 믹싱 감독님은 친절하게 진행 과정을 꼼꼼히 챙겨봐주셨고, 나는 큰 스트레스 없이 작업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 매 순간이 모두 감사함의 연속이었지만 특히, 이 급박한 시기에 음악 감독님과 믹싱 감독님, 두 분의 귀인을 만난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후시녹음은 배우님들과 믹싱 감독님의 스케줄을 조율해서 녹음 스튜디오를 몇 시간 대관하여 진행했다. 후시녹음을 위해서는 촬영된 장면에서 배우님들의 정확히 시나리오와 일치하는 대사를 했는지, 다른 애드립이나 대사의 변형은 없었는지 체크하는 일이 필요했다. 영상을 돌려보며 대사를 정확히 청취하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하지만 이는 약과였고, 진짜 난관은 스튜디오에서 후시녹음을 진행할 때였다. 배우님들은 자신이 연기한 장면이 나오는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자신의 입모양에 맞춰서 대사를 다시 연기해야 했다. 나는 이 풍경이 너무 생소한데, 배우님들은 그래도 이런 녹음이 익숙하신 듯 금세 녹음에 몰입하셨다. 입 모양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서 속도, 목소리톤 등 고려해야 할 점이 너무 많았고 대사마다 여러 번 재녹음을 진행했다. 동민 역할의 배우님은 이 때 추가된 내레이션 작업도 함께 진행했다. 이 내레이션은 내가 연출자로서, 촬영장에서 아쉬웠던 여러 부분을 만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최선을 다했다. 내가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엔딩 장면의 밝고 희망찬 분위기, 배경 음악 '나의 하늘색2'의 리듬과 맞아 떨어지는 내레이션 호흡 등 여러 요소를 맞추기 위해 배우님께 이것저것 가이드를 드렸고, 배우님은 상상 이상의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 주셨다.


최종 완성된 OST를 포함하여 최종 사운드 믹싱본이 나오던 날,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이제 해방이구나’하는 상쾌함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편집 프로그램을 열고, 사운드 믹싱 파일을 합쳐 최종 편집본을 출력했을 때의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파일은 용량이 커서 외장하드에 담아 내손퀴 담당자님에게 직접 제출했다. 사무실에서 최종본을 확인하기 위해 담당자님과 함께 영화를 쭉 감상했는데, 보는 동안 너무 민망해서 쥐구멍에 숨고싶었다. 왜 이렇게 부족한 점들만 보이고, 대사는 오글거리는지 도저히 두 눈을 뜨고 내 영화를 볼 수가 없었다. 확인 결과 최종 편집본에 큰 문제는 없었고, 제출은 완료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고 보람찼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대장정이 일단락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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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회 당일, 반가운 얼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스태프들을 비롯해, 배우님, 영화에 도움을 준 여러 친구들을 상영회에서 다시 마주했다. 영화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상영회를 찾아준 친구들이 꽤나 많아서 너무 고마웠다. 상영회는 다른 워크숍 참여자들의 작품과 함께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되어 상영되었다.


각자의 개성으로 반짝이는 모든 작품들이 다 재밌고 감동적이었다. 함께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모든 과정을 함께 달려온 동료들이었기에 전우애가 느껴졌다. 모든 영화가 더 재밌게 느껴진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장면을 찍을 때는 저런 게 힘들었겠다, 저 장면에는 이런 고민이 있었겠다, 이런 공감들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또 재밌었던 점은 나를 포함하여, 감독님들 각자의 모습이 각자 작품의 주인공으로 투영돼있는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이는 실제로 영화를 처음 만드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한 가지라고 꼽히던데, 의도한 바가 아니었음에도 모두가 이런 자기 투영의 공식을 따라 갔다는 사실이 참 신기했다. 무의식의 힘이란 엄청난 것이구나 새삼 실감했다.


상영이 모두 종료된 후에는 GV가 진행되었다. 자신의 작품을 상영한 내손퀴 수료생들이 쭉 줄지어 자리에 앉았다. 큰 상영관이 제법 가득찰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너무 긴장되고 떨려서 입이 계속 말랐다. 관객들이 감독들에게 영화를 보며 궁금했던 점들을 질문하는 순서가 이어졌다. <좋아하는 색깔>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면, ‘큰일났다’ 외치는 내면의 소리 반, 관심을 주셔서 감사한 마음 반이었다. 영화의 엔딩에 관한 질문이 들어왔다. 이 영화의 엔딩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이었다. 나는 <좋아하는 색깔>의 엔딩은 해피 엔딩이며, 동민과 경준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덧붙여, 현실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좌절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슬프고 차가운 현실을 영화에서 만큼은 밝고 따뜻하게 표현하고 싶었던 바람이 담겼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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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색깔>은 분명 비현실적이다. 전색맹을 가진 미대생이라는 설정 자체, 그리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동성이며 적록색맹을 가질 확률은 극히 낮을 것이다. 또한, 은둔하고 있던 동성애자가 짝사랑하던 대상에게 용기내어 고백할 가능성과 상대방 또한 같은 마음이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연인이 되는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동민과 경준은 서로 사랑을 나누기 어려웠겠지만, 영화의 세상에서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마법이 존재한다. 나는 그 마법의 힘이 영화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훗날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는 내가 영화를 만든 경험을 돌아보는 데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거장 감독 존 포드는 신출내기 영화감독 새미에게 “영화는 지평선이 아래에 있거나 위에 있을 때만 흥미로운 거야"라는 간결하지만 심오한 조언을 건네고, 주인공 새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난다.


“영화에서 중요한 건 사건이 아니라 감독의 시선이 만드는 맥락 그 자체다.”


이동진 평론가는 <파벨만스>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정리했다. 즉, 영화는 인물과 사건을 그대로 옮겨 담은 바구니로서 존재하면 안되는 것이다. 영화는 감독의 시선을 통해 만들어진 맥락을 담아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 감독은 주체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관점을 작품 안에 견지해야 한다. 나는 감독의 시선이 만드는 맥락, 바로 이것이 영화의 마법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영화 속에 나의 시점과 맥락을 부여하는 힘은 많이 부족했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나도 모르게 느꼈던 흥미로운 구석들이 이런 지점에서 출발하는 중요한 영화적 요소들이었단 걸 깨닫는다. 동성애자로서 겪는 소외감, 고립감, 혼란감, 내 삶의 크나큰 비극이었던 이 수많은 감정과 사건들을 나는 나만의 시각으로 해석했고, 색맹이라는 맥락에서 풀어냈다. 나는 나만의 마법을 부려 동민과 경준을 내가 좋아하는 캠퍼스 잔디밭으로 데려왔고,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도록 만들었다. 운 좋게 촬영날 비가 오지 않았고, 타이밍 좋게 매직 아워가 열린 하늘을 만난 기적, 귀한 인연들을 만난 행운, 이 모든 것들이 마법의 일부였다.


이 마법은 나의 성소수자성을 색맹이라는 맥락 위에 두었으며, 경준과 동민이 하늘색이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플롯으로 담아냈다. 때로는 나의 비극이었던 성소수자성은 이 맥락 안에서 아름답기도, 아련하기도하다. 나의 비극은 이 맥락, 즉 영화라는 마법 안에서 더 이상 비참하기만한 절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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