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덕션: S# 매직 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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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차 촬영을 앞둔 밤, 야속하게도 일기예보는 강수 확률 80%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비가 내리면 잔디밭 장면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잔디밭 장면은 이야기의 시작점에서 내가 가장 처음 떠올린, <좋아하는 색깔>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내일 비가 오는 상황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닥뜨렸지만, 그 힘을 거스를 방법은 나에게 없었다. 무기력감이 밀려왔다. 신을 이래서 찾는 것인가 절감하며 이 세상의 모든 신께 ‘내일 비가 내리지 않게 해주세요’ 빌고 또 빌었다.
다행히도 비는 많이 내리지 않았다. 중간 중간, 분무기 뿌리듯 비가 내리는 순간이 있긴 했지만 금방 잦아들기를 반복했고 야외 촬영을 모두 잘 마칠 수 있었다. 날씨의 요정이 내 기도를 들은 것일까? 보이지 않는 그 어떤 힘들, 나의 편을 들어준 행운에 감사했다. 촬영 내내 나는 참 복이 많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스태프들은 예약해둔 장소로 점심을 먹으러 가고, 나는 입맛이 없어 점심을 거른 채 한 구석에 모아둔 촬영 장비를 지키려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때 스크립터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우리는 함께 남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외롭지 않게 짐을 지켰다. 그때 마저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슬레이터로 참여해준 연출팀원도 이런 촬영 경험을 통해 많이 배웠다며, 되려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왔다. 뭐든 돕겠다고 말해주는 친구들도 나와 함께였다. 강의실과 동아리방 대관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학과 사무실과 학과장님께서도 도움을 주셨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연고 없는 미술 동아리와 사진 동아리 운영진 분들도 촬영 소품들을 제공해주셨다.
여러 사람들이 합심하여 만들어지고 있는 이 촬영 현장이 그 자체로 너무 소중하고 감사한 행운이었다. 내 인생도 이런 촬영 현장 같은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혼자 고민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그래서 복작복작 명절 같은 순간들이 내 인생을 가득 수놓길 소망하는 마음이 가슴 한 켠에 선명히 새겨졌다. 나는 단지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기꺼이 나에게 많은 도움을 나눠주고, 기회를 열어주고, 함께 해주었다. 그동안 나도 동민처럼 지레 겁먹고 많은 이야기를 혼자 삼키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영화를 만든 경험은 동민의 고백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열어 보였을 때 비로소 보이는 수많은 얼굴들, 고백은 그 얼굴들을 만나는 첫 발걸음이었다. 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마치 집단 상담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영화도, 집단 상담도, 나를 관계 속에서 살고 싶게 이끌었다. 내 마음을 나누고 상대방의 마음을 함께할 수 있다면 나의 세상은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인생은 고통과 외로움 중 하나를 택하는 일이라는데 나는 차라리 고통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창을 연만큼 바람이 깃든다. 내가 처음으로 세상에 고백했던 나의 이야기, 학보사 기자 시절 썼던 칼럼은 내 인생의 방향키를 완전히 틀었다. 내 두 손은 인생의 방향키를 꼭 움켜쥐었다, 더 이상 두 손 놓고 떠밀리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좋아하는 색깔>은 창을 열고 선 나에게 깃든 첫 번째 바람, 영원히 잊지 못할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고립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적막한 외로움 속에 틀과 벽을 세우다 보면 자아에 갇힙니다. 당위는 자신과 남을 옥죄는 틀이 되고, 자신의 특별함에 얽매인 생각은 소통을 막는 벽이 되죠. 틀과 벽을 세우는 대신 창을 열고 주변의 얼굴을 둘러보세요. 창을 연 만큼 바람이 깃듭니다."
"창을 열면 바람이 속을 헤집기도 하고 벌레 떼가 덮쳐올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창을 여는 것은 분명 가치 있습니다. 인생은 외로움과 괴로움 중 하나를 택하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기자는 외로운 단절 대신 괴로운 갈등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꽁꽁 감추고 외롭게 앓기보단 굳이 하는 갈등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죠. 언젠가 또다시 고립으로 기우는 날, 기자가 건넸던 말과 마음을 따라 누군가 기자를 찾아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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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방의 촬영 장소는 사실 학과 학생회실이었다. 동아리방에서 나온 경준과 동민은 옥상으로 나가 하늘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실제로 학생회실이 옥상 문 앞에 있는 특이한 구조였기 때문에 촬영 동선이 학생회실-옥상 로케이션과 딱 맞아 떨어졌다. 건물 옥상에서 하늘을 배경으로 경준과 동민을 담아내야겠다는 계획 하에 여러 동아리와 컨택을 했지만 모두 불발되어 난감했는데,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답이 있었다. 학과 학생회실, 새내기 시절 동기들과 술을 마시며 밤을 새던 추억이 생생한 그 공간이었다.
동민 역할의 배우님은 동아리방에서 동민이 경준에게로 기울어지는 장면을 클로즈업해서 찍어보자고 아이디어를 제안해주셨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 설레는 표정이 잘 담겨 너무도 예쁜 장면이 나왔다. 정작 촬영 현장에서는 이 장면의 중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나중에 편집을 하면서 이 장면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을 정도로 너무 마음에 드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이 없었다면, 두 사람의 애정이 너무 생략되어 영화가 많이 아쉬웠을 것 같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에 인색하다. 좋아도 안 좋아하는 척, 단 한 번도 고백해본 적 없는 소심쟁이로 한 평생 살아왔다. 부지불식 간에 이러한 내력은 시나리오에 고스란히 담겼고 경준과 동민의 스킨쉽 장면이나 애정이 담긴 감정 표현도 거의 생략되었다. 매우 은유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두 사람의 사랑을 표현하려 했다. 이러한 시나리오 상의 공백을 촬영 현장에서 연출적으로 채워 넣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기계처럼 얼어붙어 계획된 장면을 계획한 대로 빨리 촬영하는 데만 쫓기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배우님의 제안으로 얻은 이 장면처럼, 좀 더 유연한 태도로 연출에 집중했다면 사랑이 담긴 시선, 표정, 행동 등 디테일하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장면들이 많았을텐데 두고두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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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민의 색채학 수업 과제는 좋아하는 것을 찾는 과제로 바뀌어있었다. 경준은 ‘뭘 좋아하는지’ 묻고 동민은 엉겁결에 ‘하늘’을 좋아한다고 대답한다. 동민은 경준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싶다. 경준이 느끼는 하늘색을 느껴보고 싶다. 경준이 좋아하는 음악도 들어보고 싶다, 좋아하는 음식도 먹어보고 싶다. 이어폰을 한쪽 씩 나눠 꽂은 채,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경준이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 좋아하고 싶다.
“임자 만났네. 하늘 보러 가자.”
경준은 동민의 손을 잡아 옥상으로 이끈다. 두 사람은 함께 하늘을 향해 나아간다. 하늘 아래에 선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눈다. 경준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하늘 색깔이라며 붉은 노을이 펼쳐진 사진을 보여준다. 동민은 의문스레 묻는다.
“너 노을색 잘 모르잖아? 붉은색… 막 열정적이고 그런 느낌.”
경준은 어안이 벙벙하다. 이내 콧방귀를 뀌며 웃는다.
“아 근데 뭐 그게 중요하냐. 그냥 그 순간에 내가 느끼고 보는 게 좋을 뿐인데. 난 그게 중요해. 내가 보는 게 하늘색이지 뭐.”
동민의 가슴은 두근거린다. 경준이 좋아하는 하늘색은 답이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느껴지는대로 느끼고, 좋은대로 좋으면 되는 색깔이었다. 두 사람의 뒤로 펼쳐지는 매직 아워, 해가 기운 하늘이 두 사람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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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지 않은 행운으로도 족했는데, 더 큰 행운이 따랐는지 옥상 촬영 시간에 딱 맞게 매직 아워(*해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진 직후 남은 산란광이 퍼지는 시간대)를 만났다. 촬영팀원이 말했다. “운이 좋네요. 매직 아워는 금세 끝나니까 빨리 촬영해야 해요.” 모든 스태프들이 초비상 사태로 촬영에 돌입했다. 이번엔 ‘카메라 롤 사운드 스피드 레디 액션’ 같은 신호도 간략히 생략하고, ‘킵’인지 ‘오케이’인지도 판단을 유보한 채 여러 컷을 그냥 연달아 촬영했다. 몇 분 사이에도 빛이 확 바뀌기 때문에 매직 아워는 말 그대로 순식간에 지나가는 ‘단 한번의 기회’였다. 경준의 대사가 떠올랐다.
“오직 이 순간, 단 한 번. 그래서 맞나 틀리나 생각할 틈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그 순간을 찍어야 해.”
말 그대로, 그런 순간을 우리는 촬영했다. 너무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촬영하고서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클라이맥스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몽환적인 하늘빛 아래서 이런 순간을 만들어 내다니,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우리의 마지막 촬영 장면이 되었다.
동민이 스스로 좋아하는 색깔에 대한 답을 찾는 장면은 원래 총 두 가지로 계획됐다. 첫 번째는 경준과 대화하는 옥상 장면이었고, 두 번째는 동민이 혼자 어두운 밤 환하게 빛나는 별빛을 보는 장면이었다. 실제로 전색맹을 가진 사람들은 빛을 더욱 잘 감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원래는 이러한 전색맹의 강점을 통해 동민이 스스로 무언가 깨닫는 순간을 클라이맥스로 잡고 이야기 흐름을 구상했었다. 하지만, 영화 촬영을 하면서 마음이 조금씩 바뀌었다. 혼자서 생각해보고 성찰하고 깨닫는 종류의 일은 이미 동민이 혼자 색깔 노트를 쓰며 지겹도록 해온 일들이 아닐까 싶었다. 동민이 답을 찾는 순간은 꼭 경준과의 관계 안에서 비롯되길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경준의 말을 듣고, 경준과 눈을 마주하는 순간이 동민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기를 바랐다.
나는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동민에게도 그런 세상을 덧입혔고, 뒤늦게 그것들을 눈치챘다. 골목길에서 동민이 혼자 밤하늘을 보는 장면은 마지막으로 남은 촬영 일정이었다. 매직 아워로 물든 하늘 아래에서 나는 결심했다, 골목길 장면을 취소하고 옥상 장면을 끝으로 촬영을 종료하기로. 그렇게 나는 동민과 함께 혼자만의 세상에서 나왔다.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고, 가장 찍고 싶었던 장면이었지만 이상하게 이 장면을 아예 지워버리는 것이 하나도 두렵거나 망설여지지 않았다. 내 안에서 답을 찾는 주인공과 관계 안에서 답을 찾는 주인공, 나는 후자의 그림이 되기를 원했고 애당초 가장 중요했던 장면은 가장 불필요해졌다.
“촬영 끝!”
나는 옥상에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촬영 종료를 외쳤다. <좋아하는 색깔>을 촬영 했던 시간은 나에게 널따란 창을 냈다. 촬영 현장에서 만난 인연과 영화 작업 수첩은 살아갈 희로애락을 열어주었다. 삶은 어떤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즉 관계로 말미암아 이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그랬듯, 그 어떤 누군가도 마음속 창을 열고 불어오는 바람의 생기를 만끽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