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색깔> 제작기 (6)

프로덕션: S# 동민의 방

by 백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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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손퀴 멘토님이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나에게는 익숙한 풍경도 누군가에게는 새롭고 아름다운 풍경이 될 수 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풍경은 내 청춘이 잔뜩 스민 우리 학교 교정이었다. 나는 수년 간 누볐던 학교를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써내려 갔다. 학교 강의실, 동아리 방, 잔디밭, 벤치 등 제각기 장소마다 어떤 날, 어떤 사람들과 나눴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반가운 추억들이 서린 풍경 위에 동민과 경준을 데려와 새로운 이야기를 입히는 작업에는 지난 날을 돌아보는 애틋함도, 다가올 날을 떠올려보는 설렘도 있었다. 더군다나 모든 촬영 예산은 가벼운 내 주머니 사정 안에서 감당해야했기에 무료로 이용이 가능한 학교 캠퍼스를 촬영 로케이션으로 적극 물색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는 설정은 당초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부터 염두에 둔 사항이었다.


이렇게 촬영 로케이션(*장소)을 대부분 학교 캠퍼스로 해결한다지만, 그럴 수 없는 장면이 있었다. 바로, 동민이의 방이자 작업실 공간이었다. 동민의 방은 꼭 필요한 설정이었기에 걷어낸다거나 교내 시설로 변경하는 식의 타협이 불가능했다. 유료로라도 꼭 적합한 공간을 찾아 대관해야 했다. 전색맹을 가진 주인공 동민이는 색깔 즉, 채도를 감지할 수 없고, 오로지 명도로만 색감을 구분한다. 이런 동민이가 미술을 전공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동민이는 꼭 미술을 전공해야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자신이 전색맹인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강박적으로 색감을 공부해왔다. 이러한 설정 상 동민이는 색감 자체에 굉장히 민감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동민이만의 공간은 강박적으로 차갑하고 정제된 톤을 살리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 <중경삼림>, <해피투게더> 등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방 주인의 마음을 상징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는데, 엔딩 장면에서 동민이 방이 흐트러지고 색감이 따뜻해지는 것으로 대비를 주고 싶다는 연출적인 목표가 있었다.


유료 공간 대관은 예산 범위와 강력히 결부되는 문제였고, 예산 이외에도 정말 많은 부분을 고려해야 했기에 프리-프로덕션 과정(*촬영 준비)에서 가장 골머리를 앓았다. 촬영 공간을 대관할 때는 연출적인 고려 사항 뿐만 아니라, 촬영 장비들이 들어갈 수 있는지, 화장실 및 주차장 유무, 스태프들의 콜타임, 다음 촬영 장소 동선 등을 전반적으로 다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머리가 아팠다. 게다가 나는 전문 촬영팀을 섭외해서 촬영팀의 규모가 독립 단편 영화치고는 꽤 큰 편이라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장소를 고르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장소 대관 플랫폼을 사용해 여러 장소를 둘러보고 괜찮은 곳을 몇 곳 지정해 제작팀원들과 방문했다. 사진 상으로 예상했던 분위기와 직접 가서 경험해보는 환경은 정말 달랐다. 애당초 1순위로 지정했던 장소는 너무 비좁았고, 사진에서 느껴진 화이트 톤도 확실히 살지가 않았다. 2순위였던 혜화의 한 장소는 높은 곳에 좁다란 창이 나있는 어두운 방이었는데, 직접 가보니 생각보다도 너무 실험적인 분위기라 방의 느낌이 안 나고 무거웠다. 동민의 방은 차가운 분위기와 함께 동시에 안락한 방의 느낌이 나는,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하는 공간이어야 했다.


첫 로케이션 탐사 일정은 수포로 돌아가고, 다른 공간을 탐색하여 둘러보는 일정을 잡았다. 이 날은 다른 제작팀원들과 시간이 맞지 않아 혼자 방문해야했다. 사당역 근처의 방 한 곳과, 서울대입구역 근처의 한 아파트, 두 곳을 다 둘러봐야 하는데, 그날 따라 비가 억수 같이 쏟아졌다. 촬영 날 이렇게 비가 퍼부으면 어떡하나 덜컥 겁이 나는 한 편, 걱정도 순서대로 하자고 마음을 다독였다. 촬영 날 일기예보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 그 날씨 걱정은 뒷일로 미루고, 먼저 로케이션 걱정에 집중하기로 했다. 우산을 써도 보호받을 수 없었던 내 몸뚱이는 입수한 것 마냥 완벽히 비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통에, 둘러보기로 한 공간 내부로 들어가기도 민폐인 지경이었다. 그렇게 비를 뚫고 힘겹게 찾은 사당역의 방은 너무 비좁아서 촬영이 불가능했다. 쓸쓸히 발걸음을 옮겨 서울대입구역의 한 아파트로 향했다. 이곳 내부는 깔끔한 화이트톤으로 사진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방이 2~3개는 있어서 십여 명 되는 스태프들이 비좁긴 하지만 모두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인 점도 마음에 들었다. 흠이라면 엘레베이터가 없어 계단을 이용해 각종 짐과 장비를 옮겨야 한다는 점이었는데, 눈물을 머금고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촬영 장소인 학교로 이동하기에도 적절한 위치였기 때문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대신, 장비 나르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친구를 두 명 정도 더 불러야 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제일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에게 SOS를 쳤고 그들은 나를 구원해주었다. 한 줄기의 빛이 내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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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은 총 이틀 간 진행됐다. 첫째 날은 동민의 방과 학교 강의실에서 동민이만 나오는 단독 장면을 촬영하고, 둘째 날은 학교 캠퍼스 일원에서 동민과 경준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일정이었다. 동민의 방은 첫 촬영 날, 첫 촬영 장소였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간신히 일으켜 지하철을 타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잡은 콜타임이 왠지 모두에게 미안했지만 이제부터는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했다. 되돌아가기는 늦었다. 이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 것은 나였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당연하게도 모든 것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직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뒤돌아보고 미적지근하게 굴면 이도 저도 안 될 게 뻔했다. 모두 합심하여 모인 이 프로젝트를 엎어뜨리지 않고 완성 시키는 것이 나와 모두를 위한 나의 소임이었다.


학교 근처에 들려 아침 대용으로 먹을 김밥을 인원 수에 맞춰 사갔다. 그렇게 많은 김밥을 사보는 건 또 처음었다. 내 백팩은 수십 장의 우비를 비롯해 촬영 장소에서 먹을 수 있는 간단한 간식과 음료수 등 자잘하게 챙긴 짐들로 한가득 내 어깨를 짓눌렀다. 우비는 우천 상황을 대비한 것이었다. 이날은 모두 실내 촬영만 있는 날이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애석하게도 촬영일 이틀 모두 비 소식이 있어 며칠 간 밤잠을 설치며 마음을 졸였다. 우비를 사는 나의 마음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당장 내일은 야외에서 찍어야 할 장면이 너무 많았기에 비가 온다면 크나큰 낭패였다. 우천 시 변경할 플랜비 일정을 세우면서도 비가 제발 오지 않기를 모든 신들을 불러 모시고 절실히 기도했다. 연출팀 스태프에게 미술을 전공하는 친구를 소개받아 사전에 의뢰해두었던 동민의 그림도 전날 미리 받아 촬영장에 가져갔다. 꽤 큰 사이즈의 그림을 조심조심 가져가기 위해 또 진땀을 뺐다. 무거운 백팩을 짊어진 어깨, 한 손엔 김밥 한 뭉텅이, 다른 한 손엔 그림, 습하고 어두운 날씨까지, 촬영 시작도 전에 진이 다 빠져버렸다. 이 포화 상태로 미술팀 스태프 친구와 함께 동행하여 미술 동아리 방을 찾았다. 그곳에서 감사하게도 동민의 방을 채울 미술 관련 소품을 대여받을 수 있었고, 한 박스의 짐을 또 함께 이고 지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길을 헤쳐 촬영 장소로 간신히 나아갔다.


촬영장에 도착하니 이미 스태프들과 촬영팀이 도착해 바쁘게 장비며 소품을 세팅하고 있었다. 명절을 방불케하는 진풍경이었다. 좁은 집에 모인 수십 명의 사람들, 신발장을 어지럽게 꽉 채운 신발들, 어색한듯 익숙하게 서로 인사를 주고 받는 모습까지 말 그대로 명절을 맞은 큰 집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우선 동민의 방을 세팅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미술 동아리에서 간신히 공수한 각종 미술 용품과 미술 전공생인 친구에게 빌린 미술 관련 서적, 퀴어 관련 서적 등 동민의 방을 채울 수많은 소품이 어지럽게 모아져있었다. 미술팀원들이 모여 정성껏 제작했던 색깔 수첩과 색상환표 출력 코팅지를 보니 새삼 이 많은 것을 언제 다 준비했었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오늘 단 하루, 촬영일을 위해 심기일전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이 소품 중에는 다소 생뚱맞은 칭따오 맥주캔이 놓여있었는데, 아까 김밥을 살 때 편의점에 들러 내가 사온 소품이었다. 동민이가 좋아하는 색깔을 스스로 찾아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책상 위에 비치될 예정이었다. 적록색맹을 가지고 있는 경준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아 빨강, 초록색으로 패키징된 맥주를 골랐던 것인데 이런 소소한 디테일을 영화에 남겨놓는 것이 재밌게 느껴졌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자리에 타임캡슐을 묻어 놓는 두근거림이 있었다. 내가 영화를 연출한다는 것은 분명 많은 것을 챙기고 고심해야 하는 무거운 부담감도 따랐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나의 시점과 맥락을 부여할 수 있다는 흥미로운 구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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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남짓 준비가 끝나고 첫 촬영이 시작됐다. 배우님은 좁은 방 한 구석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쪼그려 앉아 대본을 읽고 계셨다. 세상에 대본과 자신만 남은 듯이 무아지경의 몰입 상태에 계신 듯 보였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역할에 집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 감탄스러웠다. 나도 내 역할에 더 진지하게 집중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역량 부족으로 나는 액션과 오케이를 외치는 일만으로도 버거웠고 배우님들이 감독으로부터 방치된 채 남겨지는 상황은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배우님과 이야기하며 여러 가이드도 드리고, 의견도 나누면서 챙겨봐 드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부족한 감독의 빈 틈을 배우님들이 홀로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채워주셨던 것 같아 죄송하고 씁쓸하다.


조연출과 나는 소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작은 방에 들어가 보조 모니터로 촬영 중인 내용을 함께 주시했다. 녹화가 돌아가고 있을 땐 그 어떤 소음도 용납되지 않았다. 동시녹음된 사운드를 편집에 바로 사용할 계획이었어서 더욱 조심했다. 결국 내손퀴 멘토님들의 예상과 조언대로 후시녹음을 진행해 전부 다시 녹음해야했지만… 촬영을 하면서는 제발 후시녹음까지 가지 않기를 강력히 희망했었다. 조연출과 함께 보조모니터로 배우님의 연기를 집중해서 보는데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모습이 눈앞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고개를 젖히고 누운 동민이 천장을 바라봤다. 머리카락이 쭈뼛섰다. 배우님의 용안은 빛났고 조연출과 나는 서로 휘둥그레진 눈을 마주봤다. ‘괜히 배우가 아니구나’, ‘대박이다’ 각자 입모양을 뻥긋대며 새삼 배우님의 아우라에 실소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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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현장에 들어가면 생소한 주문을 외운다. ‘카메라 롤 사운드 스피드 레디 액션’으로 시작하는 이 주문은 ‘컷’과 함께 끝나며, ‘오케이’, ’킵’, ’NG’ 중 하나의 외침으로 마무리된다. 촬영팀, 사운드팀, 배우팀, 연출팀 등 모든 인원이 각자 준비되었다는 구호를 모으는 일인데, 감독이 최종적으로 액션을 외치면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시작한다. 나는 이 ‘액션’을 외치는 순간이 가장 힘들었다. 두번째로 힘든 순간은 ‘컷'을 외치며 촬영 종료를 알리는 순간과, 촬영된 장면을 판단하여 다시 찍을지 말지 결정하고 팀 전체에 크게 외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주문들이 촬영 기간 내내 너무 어색했다. 이 주문의 선봉에 선 감독으로서 그러면 안 되지만, 조연출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며 액션과 오케이 등의 싸인을 맡길 때도 많았다. 이는 추후 큰 트러블이 되기도 했는데, 이런 점들에서 저 ‘카메라 롤 사운드 스피드 레디 액션’ 주문을 떠올릴 때마다 참 미안하고 뼈아프다.


이 주문들에는 특히 연출팀 스태프들이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연출팀은 감독과 조연출을 중심으로 각자의 역할이 분명히 나뉘었다. 우선, 슬레이트 담당은 클래퍼 보드에 촬영감독 이름, 날짜, 씬 넘버(Scene)(시나리오에서 부여된 장면 번호), 테이크 넘버(take)(*장면의 세부 순서)를 적고 액션 구호와 동시에 클랩스틱을 부딪혀 소리를 낸다. 이 슬레이트 소리는 기준점이 되어 이후 편집 단계에서 영상과 소리의 싱크를 맞추는 데 중요한 도움을 준다. 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이 스크립터다. 이 역할은 장면 사이의 연속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배우의 동작, 의상 상태, 소품의 위치, 촬영 각도 등 장면의 세부사항을 세밀하게 기록해야 한다. 더불어, 매 장면과 컷마다 촬영된 영상과 녹음된 음성의 현황, 감독의 멘트 등을 총괄하여 스크립트 자료에 메모해두는데, 그 스크립트 자료가 편집 시 길을 찾는 지도와도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한드. 연출팀뿐만 아니다. 한 테이크, 한 테이크마다 모두 저마다의 역할에 긴장감을 가지고 몰입했다. 제작팀은 촬영 스케줄을 시간 단위로 계획하고 동선, 식당 예약, 현장 통제 등 촬영 상황 관리에 필요한 모든 일을 도맡아주었다. 촬영팀은 촬영팀대로, 동시녹음기사님은 기사님대로, 미술팀은 미술팀대로, 디지털 매니저는 디지털 매니저대로, 배우들은 배우들대로 모든 이들이 자기 몫에 열중했다. 모든 스태프가 숨죽여 각자 맡은 역할을 소화했을 때 비로소 한 장면이 완성됐다. 허투루 얻어지는 장면이 단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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