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색깔> 제작기 (5)

프리 프로덕션: 너 내 동료가 돼라!

by 백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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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다음 할 일은 맨발처럼 동료들을 모으는 일이었다.


“모두 나의 영화를 위해 모여줘서 고마워. 이번 여름엔 너희들의 청춘을 내가 좀 쓸게.”


맨발의 대사처럼 나는 이번 여름, <좋아하는 색깔>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의 빛나는 시간을 한 데 모아야 했다. 하지만 이를 자각한 건 촬영이 코 앞에 닥쳤을 때였다. 그 전까지 나는 어리석게도 영화를 혼자 만들 작정이었다. 촬영 감독님만 어찌저찌 구해서 나 포함 세네 명 정도면 충분하겠지 귀여운 망상을 오래도록 품고 있었다. 촬영 감독님을 컨택해서 미팅하던 첫 날, 그 망상은 무참히 깨졌다.


“세네 명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촬영 감독님의 동공은 나의 어리숙함 앞에 크게 흔들리셨다. 그러면 큰 일 난다고 손사래치시며 현장에서 도와줄 손은 많을수록 좋다고 말씀하셨다. 이게 무슨 말일까 종잡을 수 없어 왜 그래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소품을 운반하고 정리해줄 사람, 책상과 의자를 치워줄 사람 등 생각보다 많은 손길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감독은 현장에서 여러가지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라, 다른 일을 병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덧붙이셨다. 아차 싶었다. 그런 모든 일은 그냥 내가 몸으로 때우려고 했는데, 나는 감독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짐을 정리하거나 무언가를 하기 위해 내가 움직이면 촬영은 멈춰 선다.


미팅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 머리가 아찔했다. 그 많은 인력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나의 가벼운 예산 규모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때 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바로 나는 학생이라는 점, 학생은 학교에 있는 여러 자원을 활용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학교 캠퍼스를 촬영 장소로 염두하고 있던 생각과 맞물려, 학교 커뮤니티를 이용해 영화 스태프를 채워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새내기 시절 동아리 부스를 구경하던 기억을 되짚었다. 분명 영화 제작 동아리가 하나 있었다. 그땐 학생이 영화를 왜 만드나 감흥 하나 없이 지나쳤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를 영화 워크숍으로 이끌었던 지인의 영화도 그 동아리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촬영 팀과 촬영 일은 잡아 놓은 상태였고, 촬영 일까지 당장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서둘러 영화 제작 동아리에 가입 신청을 넣어 놓고, 영화 촬영 계획을 밝히며 스태프 지원 공고를 올려도 될지 운영진에게 문의했다. 돌아온 답변은 다행히도 흔쾌한 수락이었다.


어떤 스태프들이 필요한지 인력 구성부터 난항이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게 하나도 없었던 나는, 워크숍에서 수업했던 자료, 다른 영화들의 엔딩 크레딧을 참조해 스태프 팀을 구성하고 공고를 작성했다. 다행히도 생각보다 많은 부원들의 스태프 신청 문의가 이어졌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제일 먼저 선발해야했던 역할이 조연출이었는데, 공고를 올리자마자 1분만에 지원 신청한 사람이 있었다. 동아리에서 단편영화를 한 번 제작해본 경험이 있는 친구였다. 그 친구는 자신이 만든 영화의 감상용 링크를 전달했다. 그 영화가 나는 너무 마음에 들었다. 전문적이고 완벽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장면 장면 고심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힘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열정이 뜨겁게 전해졌다. 이후 지원자들에게는 선착순 마감되었다고 안내하고, 그 친구를 조연출로 선발했다. 이후 신청자들의 희망 부서에 따라 연출팀, 제작팀, 미술팀, 촬영지원팀, 단역배우팀을 구성했다. 그렇게 열 명 남짓한 스태프 동료들이 모였다.


조연출 친구와의 첫 미팅 날, 약간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시나리오와 촬영 계획에 관한 논의를 마친 후, 나는 <썸머 필름을 타고!>를 봤냐고 질문을 건넸다. 영화를 봤다는 조연출 친구의 대답에 반가운 웃음이 절로 터져나왔다. 그 영화가 지금 이 영화를 만드는 데 큰 원동력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았다. 왠지 취한듯 기분이 상기된 나는 농담 반 진담 반, 맨발에 빙의해서 ‘이번 여름엔 너의 청춘을 내가 좀 쓰겠다’는 이야기를 던졌다. 조연출 친구는 기꺼이 ‘내가 킥보드, 블루 하와이가 되겠다’는 말로 화답했다. 소수자를 비롯한 여러 인권 운동에 진심이었던 이 친구는 나의 퀴어성에도 열렬한 지지와 응원을 보냈다. 영화 제작이라는 낯설고 두려운 전쟁터 한복판에서 정말 내 편을 만난 기분이었다. 촬영 감독님과의 미팅도 조연출 친구와 함께 동행했다. 나 혼자 미팅을 했을 때는 이 상황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압박감이 심했는데, 조연출 친구와 함께 하니 여러 고민과 문제들을 맞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든든하고 힘이 났다. 이 친구는 한 번 영화 제작을 경험했던 터라 나보다 촬영 현장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미팅에서 오가는 용어들을 설명해준다거나, 촬영 시 필요한 준비 목록, 촬영이 끝난 이후 어떤 후반 작업을 했었는지 등 자신이 경험해온 지식들을 흔쾌히 나누어주었다. 이렇다 할 보상을 주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작품처럼 열심히 작업에 참여해주었다. <좋아하는 색깔>은 이제부터는 결코 나만의 작품이 아니었다. 조연출 친구의 영화를 향한 열정, 나를 돕는 마음, 그 모든 애정 어린 관심과 노력이 영화에 진하게 녹아들고 있었다.


이 친구는 자신이 여러 인권 활동에 열을 올렸던 후일담을 자주 나누어 주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불나방처럼 자신을 쏟아붓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이 영화를 만드는 마음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늘 깊은 속 한 켠 주름져있던 내 지난 날에 헌사하는 한 판 굿과도 같은 의미였고, 나의 좋아하는 마음을 영원히 새겨 넣어 지키고 싶은 마음 그 자체였다. 우리의 마음은 스스로에게 소중한 것들을 향해 뜨겁게 움직이고 있었다. 언젠가 스태프들과의 미팅을 마치고 조연출 친구와 두런두런 같이 걷던 길목에서 주고 받았던 대화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가 성 소수자 인권 운동의 일환이라고도 생각한다는 장난스러운 너스레에 밝게 웃으며 ‘내가 그래서 이 영화에 참여하고 있다’며 크게 박수쳐 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을 다시 꺼내 볼 때면, 이 조연출 친구와 함께 나눈 마음들이 영화와 함께 재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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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오디션은 나와 조연출 친구를 비롯해 스태프로 참여해준 대학 동기 친구까지 함께 세 명이 참여했다. 항상 혼자 걸어오던 영화 제작의 여정에 같이 걸어주는 이들이 있어 불안감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혼자 걷는 길이 아니란 사실은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된다. 삼수생 시절에 독학재수학원을 다녔다. 그 때 점심 시간 또는 쉬는 시간만 되면 정처없이 학원을 나가 동네 골목 골목을 걸어다녔다. 슬픈 감정과 복잡한 생각을 잔뜩 안고 그냥 무작정 걸어댔다. 그런데 알고보니 ‘쟤가 어디를 가나’ 궁금해서 따라 걷곤 했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나중에 그 친구가 함께 걷자며 말을 걸어왔다. 정처 없이 헤매던 그길 위에 나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제서야 알게 된 반전이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던 중학교 동창이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뻔질나게 같이 걸었고, 이야기했고, 그 불안한 시절을 같이 견뎠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영화 제작 여정에 함께 해주는 스태프 친구들이 나에게는 그 시절 그 친구와 다를 바 없었다.


배우 선발 과정에서는 생각보다 서류가 너무 많이 들어와 이를 걸러내는 작업에 손이 많이 갔다. 나 혼자만의 시각으로는 결단 내리기가 어려워서 서류들을 쳐내기 어려웠다. 주연 배우 자리는 두 명이 고작인데, 지원서는 수십장이 우습게 쏟아졌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던 날, 대학 동기 친구와 배우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며 면접에 부를 대상자들을 정리해나갈 수 있었다. 나 혼자 배우들을 골라낼 때는 내가 선호하는 개인적 느낌이 우세하게 작용하는 면이 있었는데, 친구의 시각까지 더해지니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배우들을 선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손퀴 멘토님들의 도움으로 오디션장을 섭외하고 시간표를 짜 면접을 진행했다. 나와 조연출 친구, 대학 동기 친구, 이렇게 세 명이 면접관으로 앉아있었고, 시나리오 속의 대사 일부를 현장에서 즉흥 연기하는 것과 사전에 준비해온 연기를 하나 보는 구성으로 면접이 치러졌다.


덧붙여 면접이 마무리될 즈음, 퀴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했고 이 질문에 어떤 답변을 했는지가 배우들을 선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했다. 배우마다 대답은 다양했다. 주변에 존재하는 자신의 퀴어 친구들을 이야기 한다거나, 퀴어에게 고백받은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인상 깊게 본 퀴어 작품을 이야기하는 배우들도 있었다. 퀴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퀴어 콘텐츠를 찍을 때 상대가 여성이라고 최면을 건다는 등 퀴어에 대한 고민이 깊지 않은 답변들도 존재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답변은 동민 역할로 캐스팅 된 배우님의 답변이었는데, 대뜸 ‘퀴어는 자신에게 그냥 공기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항상 자신의 주변에 존재해온 퀴어들의 이야기를 풀어주셨다. 퀴어는 그냥 당연하게 존재하는 것이 맞고, 그것이 어떤지 질문하는 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이다. 퀴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 가진 맹점을 찌른 우문현답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뭐 어떡할 것인가, 어떻게 생각할 필요가 사실은 없다. 퀴어는 우리 주변에 공기처럼 실존하는 존재들이다.


두 주연 동민과 경준은 내가 상상하고 있는 명확한 이미지적 목표가 존재했지만, 배우들을 통해 구체화해야하는 면들도 많았다. 주인공 동민은 색맹을 가진 미대생으로서 혼란스럽고 위축된 분위기와 함께 섬세한 감수성이 필요했다. 반면, 동민이 짝사랑하고 있는 친구 경준은 덤덤하고 유쾌한 모습이 주된 특징으로, 언뜻 보기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단순한 인물이어야 했다. 그래서 경준이는 특히 웃음 짓는 모습이 어떤 느낌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검토했다. 두 배우의 조화도 중요했기에 고려해야할 점이 정말 많았다. 결과적으로, 각 역할에 세 명 정도의 최종 캐스팅 라인업을 구성했고 배우 간의 조화를 고려하여 캐스팅을 마쳤다. 같이 하고 싶었던 배우님 몇 분이 눈에 밟혔다, 없던 역할을 새로 만들어서라도 작품에 참여시키는 상황들이 실제로 있을 법하구나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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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님들과는 대본 리딩을 하면서 시나리오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나눴다. 경준 역할의 배우님은 경준의 감정이 사랑이 맞는지 질문 하셨다. 시나리오는 두 인물 간의 사랑을 매우 간접적이고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경준의 입장에서 동민을 바라보고 있는 감정이 사랑인지, 우정인지 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동민이는 경준이를 짝사랑한다는 감정선이 명확한 반면, 경준이의 감정은 생략된 빈 틈이 있었다. 그 질문을 기점으로 돌이켜보니 두 인물이 직접적으로 붙는 장면이 적었고, 오가는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가 극히 제한적이고 간접적이었다. 사랑하는 대상을 대하는 나의 소극적인 마음은 시나리오에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동민이라는 인물에는 내 자신이 많이 투영되어 있었다는 걸 그 이후로 차츰 깨달아갔다. 반대로 경준이의 감정은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의 감정이었고, 난 그것을 마주하는 일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배우님의 질문을 계기로, 미뤄왔던 결정을 내려 빈 틈을 채우기로 했다. 난 경준이의 감정이 사랑으로 표현되길 바란다고 답변했고, 배우님의 연기로 그 빈 틈을 채울 수 있었다. 처음에 나는 시나리오가 영화와 일대일 대응된다고 생각했었다. 시시각각 모습을 변주하며 긴장의 칼날을 들이미는 영화 제작 업무에 잔뜩 경직된 채 당면한 일을 해결하기 바빴다. 그냥 시나리오를 그대로 촬영하고, 편집하면 영화가 완성 된다는 맹목적 목표에 매몰돼있었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시나리오로는 담아낼 수 없는 지점들, 부족한 표현들을 더 극적으로 채울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영화적 요소였다. 관객의 입장에서 배우는 영화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관객으로서는 명확히 느끼던 그 생각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감독은 배우들을 통해 이야기를 표현해야 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일은 시나리오를 만지작거리는 일 이상으로 더 중요했다.


대본 리딩 차 두 배우가 모였을 때, 촬영 날 필요한 야외 사진 소품 두 점을 미리 찍어놔야 했다. 다행히도 날씨는 푸르렀다. 엔딩씬을 장식할 동민과 경준의 커플샷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배우가 처음 만난 날, 우리가 촬영한 첫 장면이 되었다. 커플샷 촬영이 끝난 직후 동민 배우는 먼저 보내드리고, 경준 배우와 나머지 사진을 찍기 위해 영화사 근처 골목을 누볐다. 푸른 하늘만을 배경으로 잡힌 경준의 상반신 사진을 찍으려고 수십번 구도를 잡아봤지만 전깃줄 혹은 건물 일부가 하늘을 가렸다. 순수한 하늘만을 배경으로 찍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을 줄이야. 순간, 옥상 출입이 가능한 근방의 높은 건물이 머리에 번뜩였다. <썸머 필름을 타고!>를 봤던 독립 영화관이 마침 근처에 있었고, 근방에서 꽤 높은 건물이었다. 그 옥상에 테라스가 있다는 블로그 후기를 본 기억도 났다. 당장 그곳으로 행선지를 옮겼고 원하는 구도를 찾아냈다. 무더운 날씨 진땀을 뺀 스태프들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됐다. 이거야!”


영화 촬영은 매번 이런 통제 불능, 예상 불능의 선물을 안겼다. 그래서 더 치밀하고 강력하게 상황을 통제해야했고, 그럼에도 통제되지 않는 것은 여전히 남아 깜짝 선물들을 선사했다. 이 줄다리기 같은 감정의 오르내림을 버틸 수 있는 지독한 사람들이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모자란 독기를 박박 긁어모으고 쥐어 짰다.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어보려 고군분투하며 내가 입에 달고 산 말은 ‘다시 영화 찍는다고 하면 내가 미친놈이다. 때려서라도 제발 날 말려줘’였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깜짝 선물들이 영화 그 자체이며, 영화를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우연히 만난 영화관 옥상과 촬영 마지막 날 만난 매직아워처럼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수용해야하는 것, 인생에 불현듯 닥쳐오는 무수한 불행과 기쁨들처럼.


경준 카메라.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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