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 프로덕션: 좋아하는 마음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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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월에 걸쳐 큰 틀의 워크숍 교육은 마무리되었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홀로서기만을 앞두고 있었다. 10월 말 상영회에 영화를 올리기 위해서는 8~10월 간 각자 자신의 영화를 완성해내야 했다. 그동안은 어영부영 커리큘럼을 따라오긴 했는데, 이제부터는 오롯이 내 주도하에 나만의 프로젝트를 끌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접해보는 복잡한 일들이 한 가득 도사리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로 발을 딛는 순간, 바로 그 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이곳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을 훗날의 나는 어떻게 생각할까 당최 종잡을 수 없었다. 영화 작업을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울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서 꼭 이 일을 해야 할지, 하고 싶은 게 맞는지 확신에 찬 대답을 내릴 수 없었다. 여정의 시작에서는 밝고 분명했던 원동력이 흐릿하게 꺼져 가고 있었다. 나는 왜 퀴어 단편 영화를 찍으려고 하는가. <좋아하는 색깔>이라는 이야기를 왜 세상에 내놓고 싶은가. 영화를 찍게 되든, 안 찍게 되든 난 꼭 답을 찾아야 했다.
고민의 기로에 서서 나는 여러 영화를 감상했다. <해피투게더>, <문라이트>, <콜미바이유어네임>, <모리스>, <윤희에게> 등 내가 인상 깊게 보았던 퀴어 영화를 다시 한 번 돌려보며 고민을 풀어보려고 노력했다. 영화마다 제각기 담긴 힘이 응원처럼 다가오긴 했지만, 오히려 명작들 앞에서 내 이야기가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그 무렵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가 개봉했다. 영화를 만드는 고등학생들의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 SNS를 내려보던 무심한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 영화가 내 고민을 조금은 나눠 들어줄 수 있을지 않을까 기대했다. 무거운 마음을 짊어지고 새벽 내내 뒤척이다가 이른 아침 영화를 보러 달려갔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홀가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 카페에 들러 영화 시나리오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썸머 필름이 나에게 전한 것은 좋아하는 마음의 힘이었다. ‘썸머 필름’을 타고서 나는 주인공 ‘맨발’의 벅찬 꿈과 그것을 밝히는 순수한 열정을 만났다. 사무라이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은 맨발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었다. 뮤지컬 <틱, 틱… 붐!>에 나오는 대사를 빌리자면, 사랑과 두려움 중 맨발을 움직이는 동력은 사랑이었음이 분명했다. 맨발의 영화는 단순한 영상물이 아니라, 맨발의 꿈을 응원하는 친구들과 함께 빚어낸 시간 그 자체였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도 새롭고 뜨거운 무언가가 움트기 시작했다. 영화를 만드는 것, 그 너머의 목표가 생겼다. 좋아하는 마음에만 이끌리고 움직여 나를 온전히 쏟아보고 싶어졌다. 나의 좋아하는 마음을 응원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순간을 남겨보고 싶었다. 그 순간들이 곧 나의 영화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영화 제작은 더 이상 나에게 무거운 과제가 아니었다. 그 순간부터 나를 움직이는 힘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었고, 좋아하는 마음에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료했다. 나는 뭘 하고 싶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두려움을 피해 쫓기듯이 움직이던 내가 이번만큼은 좋아하는 마음의 힘만으로 움직여볼 차례였다. 앞으로 나아갈 힘이 이번엔 분명히 내 안에 있었다, 애먼 바깥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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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친구들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한 친구는 <챌린져스>로 스스로의 소유욕을, 다른 친구는 <이터널 선샤인>으로 자신의 낭만주의적 관점과 운명론적 믿음을 이야기했다. 좋아하는 것과 그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덜컥 걸리는 내 마음의 어떤 지점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영화 <너와 나>의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 했고, 스스로 ‘사랑한다’는 말을 갈망하는 사람임을 또 한 번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랑하고 싶다, 사랑 받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마음껏 좋아하고 싶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마음껏 나를 좋아해주길 바란다. 이 ‘좋아하는 마음’은 나에게 너무 핵심적이고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하지만 이 마음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의 ‘좋아하는 마음’은 외부의 낡은 시선과 충돌해 스스로를 좀먹기만 했다. 내가 지닌 좋아하는 마음의 힘을 오롯이 지키고 싶다는 일념으로 <좋아하는 색깔>을 만들었다. 좋아하는 마음의 힘에 대해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남들과 다른 색을 보는 동민이가 정답과 오답의 세계에 갇히지 않기를, 자신의 좋아하는 색깔을 깨닫기를, 경준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동민이와 닮은 나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꼭 건네주고 싶은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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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좋아했고, 드라마를 좋아했고, 원더걸스를 좋아했고, 라면을 좋아했고, 너를 좋아했다. 이 모든 좋아하는 마음은 구비구비 내 삶 어느 귀퉁이마다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다. <좋아하는 색깔>도 그 반짝임 중 하나다. 맨발은 둘러앉은 친구들을 향해 자신의 소망을 이야기한다. “영화는 말야. 스크린을 통해 현재랑 과거를 이어준다고 생각해. 나도 내 영화를 통해 미래로 연결하고 싶어.” <좋아하는 색깔>이 만들어진지 3년 정도 지나고 나니 이 대사가 더 깊숙이 와 닿는다. 나에게 <좋아하는 색깔>은 미래에 전하는 나의 과거이자 현재의 이야기면서, 나를 언제든 가장 뜨거웠던 나의 여름으로 타임워프 시킬 수 있는 썸머 필름이 되었다, 오래도록 내 마음 속에 영사될 반짝임, 내가 좋아하는 썸머 필름.
무언가를 순진하게 사랑하는 마음은 어딘가 감동스러운 데가 있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감독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감정이 있다면 무엇인가.
= 좋아하는 마음, 그 자체의 힘이다. 학창 시절에 학교생활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 비디오 대여점에서 정신없이 빌려 본 영화 DVD, 헌책방에서 사 모은 만화책, 음악을 무척 사랑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나를 구원해주었다. 맨발에게는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에너지가 있고, 이것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다. 특별한 사람은 되지 못하더라도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빛난다고 생각한다.
출처: 김소미. (2022년 7월 21일). ‘썸머 필름을 타고!’ 마쓰모토 소우시 감독 “좋아하는 마음의 힘!”. 씨네21, (1365호). https://cine21.com/news/view/?mag_id=10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