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성귀 대전
알콜 감별사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내 몸은 알콜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언젠가는 사이다를 맥주잔에 가득 따르고 거기에 소주를 서너방울 넣어서 마셔봤는데 그마저도 얼굴과 몸이 빨개져 놀란 적도 있다.
아니, 평생을 민감한 쪽보다는 둔감한 쪽을 정체성으로 알고 살았는데 이렇게 나오기야?
지금은 딱히 술을 마시고 싶다거나, 술을 마시지 못해 서럽다거나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그러나 스무살 무렵에는 친구들이 마셔라 부어라하는 모습이 못내 부러웠다. 오고가는 술잔 속에 점차 들뜬 사람들의 표정과 평소라면 절대 나오지 않을 텐션으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아, 나도 저렇게 취해서 놀고 싶다!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취한 사람들 사이에서 말짱한 정신으로 물만 마시며 술자리를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친하게 어울려다니는 학과 친구들이 술을 잘 마시고 좋아하는지라 더 아쉬운 마음이 컸던 것 같다. 한때 술은 마시면 마실수록 는다는 속설을 어디선가 주워듣고는 친한 친구들과 모여 맥주 한캔 먹기 수련을 가하기도 했다. 결국 반캔만에 KO를 선언하긴 했지만..
술을 잘 마시지 못해 서러운 신입생의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건은 어느날 과 단톡에 올라온 풀떼기 사진 한장으로 시작되었다.
국교13이OO님이 [사진]을 보냈습니다.
푸성귀ㅋㅋ 먹이사슬 가장 아래 위치한 존재ㅋㅋ 이거 완전 강동동, 김보보 아님?
강동동이는 우리과 얼마 없는 남학생들 중에서 가장 성격이 좋고 젠틀한 친구다. 그는 범접할 수 없는 외모와 아우라를 지녔는데 어느정도인가하면 나는 입학한 첫날 그가 조교 선생님인줄 알고 90도로 인사를 박았다. 그는 허허 웃으며 그래, 안녕이라고 받아주었다. (사실 갓 부임한 교수님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더라도 열에 아홉은 속아넘어갔을 것이다.)
아무튼지간에 성격 좋은 그 강동동이는 외모만 보면 막걸리를 궤짝으로 마실 것 같지만 의외로 간이 순수하여 소량의 알콜에도 얼굴이 빨개지는 알쓰족이었다.
ㅋㅋㅋㅋ 근데 둘이 다이다이뜨면 누가 이김?
허! 다이다이? 알쓰족한테 그런 불경스런 단어를 쓰다니! 대작이라는 뜻으로 통용되던 그 단어를 나와 강동동이에게 쓰는 것은 마치 거북이랑 자라가 마라톤 경주하면 누가 이기냐 급으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 조합이었다. 그냥 웃고 넘기려던 찰나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강동동이 [보보는 내가 이기지^^]라는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럼 우리과 최약체는 김보보네?
이 한마디가 나의 심금을 울렸다. 최약체라니..
나의 이 젊은 나이를 최약체로 보낼 거냐 나두야 간다!
그리하야 발작버튼 눌린 보보로 인해 학과 술찌 최약체를 고르는 푸성귀 대전이 시작되었다.
푸성귀 대전은 학과 동기모임 자리에서 그 성대한 막을 올렸다. 우리 학번 동기들은 테이블마다 자신들이 먹을 맥주와 소주를 주문했다. 그리고 가운데 한 테이블에 동동이와 내가 마주 앉았다. 우리 둘 사이에는 겉 유리에 이슬이 송골송골 맺힌 시원한 맥주 한명이 놓여 있었다.
“먼저 패배 선언하면 지는 거야."
심판을 자처한 학번 과대의 말을 기점으로 둘은 각자의 맥주 잔에 3분의 1가량 맥주를 따랐다.
꿀꺽 꿀꺽 꿀꺽
한번에 많은 양에 맥주가 들어오니 벌써 취기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정신력의 싸움. 나는 절대 먼저 패배를 선언하지 않으리라.
한잔, 두잔 친구들의 맥주와 소주가 비워질 무렵 우리 테이블에 놓인 한 개의 맥주병도 거의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둘이 합쳐 맥주 반병을 마신 셈이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한 여 동기가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동동이와 나는 이미 맥주 한잔을 마실 때부터 얼굴이 빨개진 채였다.
"한병 더 가?"
동동이가 물었다.
이것은 일생일대의 도전이요, 자존심을 건 승부였다.
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이에는 맥주 한병이 더 놓이게 되었다.
"얘 많이 마셨어?"
반쯤 눈이 감겨 헤롱헤롱한 상태의 나를 보고 남자친구가 물었다. 나와 내 남자친구는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성사된 동기CC였는데,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느라 푸성귀 대전을 직관하지는 못했다.
"쟤네 맥주 두병 마셨어. 나눠서."
난처한듯 동기 한 녀석이 말했다. 우리는 저들에게 절대 맥주를 강요한 적이 없으며, 그마저도 나눠마시면 고작 맥주 한병인데다가, 김보보 잔은 채워져있고 강동동이 잔은 비워있으니 따지고보면 김보보는 맥주를 채 한병 마시지는 않았다는 항변이 담겨 있었다.
"치사량이네."
남자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기숙사에 집어 넣어놓겠다며 나를 일으켜세웠다. 기숙사로 가는 내내 헤롱피롱대는 내게 술을 마시지도 못하는 게 무슨 다이다이냐며 핀잔을 주었다.
다음 날 아침, 불편한 속과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보니 카톡이 몇개 쌓여있었다. 단톡에는 동동이가 조금 풀린 눈과 빨개진 얼굴로 브이를 하고 있는 사진이 올라와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이겼지만 졌다]라는 메시지도 덧붙여있었다.
후에 강동동이가 회고하기를, 김보보와 보보의 남자친구 K가 그대로 사라진 후, 자신도 홀로 40분 거리의 집을 메로나 하나를 먹으며 걸어가는데 현타가 왔다한다. 커플만 살아남는 더러운 세상이라나 뭐라나.
결국 푸성귀 대전은 아무도 만족의 미소를 띠지 못한 채 그대로 쓸쓸하게 막을 내렸다. 과음의 쓰라림과 숙취의 지옥같음을 몸소 체감한 후 겸허한 자세로 푸성귀의 삶을 받아들였다는 후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