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멀리
달아나
내 고향은 한때 섬이었던 곳이다. 경상남도 마산 귀산동에 있는 조그만 섬마을이었는데, 지금은 진해로 향하는 다리가 놓이면서 섬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한 상태가 됐다. 게다가 마산, 창원, 진해 세 도시가 통합되면서 더 이상 마산이라고 부르지도 않게 되었으니 완전히 과거의 공간이 되어버린 셈이다. 지금 나는 나이 스물 셋에 서울권 대학 인근에서 삼년 째 거주하는 중인데,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놀라고는 한다. 귀산동과 서울의 차이를 새삼 체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그 섬과 다리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그곳에서의 기억이 몇 없기는 하지만, 그 짧은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귀산동은 다리가 놓이기 전엔 외지인이 많지 않았다. 간혹 배를 타고 들어오는 낚시꾼만 있을 뿐이었다. 어른들은 낮이면 섬 밖으로 나가 일을 했고, 저녁이 되면 돌아왔다. 일곱 살이었던 나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아침을 먹고 나면 놀이터로 달려 나갔다. 놀이터 뒤편에는 청소년 센터가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놀이시설을 주로 이용하는 건 센터의 고아들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그 놀이를 지켜보곤 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나에게는 놀이터 한복판에 모래집을 만들어내는 활동성도, 모래집을 뻥 차버려 박살내는 되바라진 구석도 없었기에 그저 구석 벤치에 앉아 바라볼 뿐이었다. 센터 아이들이 나를 따돌린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오히려 그 아이들은 언제나 손짓으로 나를 불러 세웠고 같이 놀자며 말을 걸어왔다. 그렇지만 나는 센터 아이들끼리만 공유하고 있는 어떤 유대감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또 그곳에 결코 섞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 모래성들. 지금 그것의 완성도를 평가한다면 결코 높은 점수를 주지 못할 테지만, 당시에 그 결과물은 내게 너무도 신비로운 것이었다. 그건 센터 아이들의 모래성 건축에 존재하는 룰 때문이었는데 바로 오직 손과 손에 의한 작업이라는 것이었다. 간혹 주변 아파트 단지 아이가 모종삽을 들고 와 모래판에 합류할 때면 센터 아이들은 살며시 다가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건 친구 손을 다치게 해.
대부분의 아파트 단지 아이들은 놀이터 변두리로 모종삽을 던져버리고 대열에 합류했다. 그렇지만 그 경고를 자신에 대한 경계심으로 받아들여 자기만의 모래성을 쌓는 아이도 있었다. 완성도가 높은 모래집은 언제나 맨손으로 협력한 아이들 쪽이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양쪽 다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쪽은 너무 많은 손길에 무너져 내렸고, 다른 한쪽은 물기를 품은 흙의 무게를 못 버티고 부서졌다. 모종삽이 너무 깊은 곳의 모래까지 퍼낸 탓이었다. 말하자면 그 모래판에는 완성도라는 게 없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모래를 부쉈고 다시 쌓아 올렸다. 그러다 저녁시간이 되거나 비가 오면 감쪽같이 내 시야에서 사라져 청소년 센터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그런 순간이 오면 언제나 가슴 한편이 저릿하게 아파왔으나, 완전히 홀로 남겨진 기분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놀이가 끝나면 버려지는 게 많았고 나도 나름 바빠졌다. 주인 잃은 양말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고 누군가 밟아버려 금이 간 안경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모종삽이다. 모래 속으로 파묻혀 들어가다 손잡이만 툭 튀어나와 있었다. 저녁이 되어 아이들이 놀이터를 빠져나가자 나는 변두리로 다가갔다. 흙에서 모종삽을 파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녁 늦은 시간, 집에는 막 일을 끝내고 돌아온 어머니가 계셨다.
오늘도 놀이터에서 놀았나 보네?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내 손에 들린 모종삽을 가져가 베란다에 두었다. 그리고 다음날 놀이터로 가기 위해 신발끈을 묶는 내게 그것을 다시 건넸다. 제자리에 돌려놓으라는 뜻이었다.
엄마, 우리를 아프게 하지 마요. 제발요.
나는 모종삽을 받아들며 말했다. 어머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머니는 조심스레 내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누가 아프게 하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누구도 나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 가정에 불화가 있지도 않았고 특별히 내 몸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래에 비해 몸집이 조금 작았을 뿐 건강한 편이었다. 번듯한 부모 밑에서 자랄법한 고만고만한 아이, 그게 나였다.
그날 나는 모종삽을 계단층계에 버려두고 놀이터로 나섰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벤치에 앉아 놀이의 모든 순간을 지켜봤다. 하늘은 금방 어두워졌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이후의 기억은, 신기할 정도로 전무하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입학식 혹은 중학교 때 겪었을 법한 친구와의 불화 같은 것들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은 눈에 훤한데도 그 사이 기간의 기억은 희미하다. 어쩌면 너무도 평범한 삶이어서 굳이 기억에 새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항상 적당한 수준에 머물렀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대학에 와 있었다. 입학금을 내는 날에는 이십대 초반의 신입생 누구나 으레 그러하듯, 대학에서는 전혀 다른 나를 만들어보리라 다짐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서울에 전혀 적응을 하지 못했다. 무리에 섞이기도 힘들었고 놀기 좋은 공간이라는 곳에서는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귀산동의 놀이터에서 느꼈던 소외감과는 또 다른 외로움이었다. 간혹 고향과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술자리에서는 항상 이런 말을 듣고는 했다.
어우야, 그건 너무 극단적이다.
내게는 아주 보편적이었던 가난의 흔적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학교를 가기 위해 세 번 갈아타야 하는 버스. 가난한 생활권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지리적 특성. 부족하다 못해 전무한 문화시설과 휴식 공간,비행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지역 네트워크의 부재. 수도권에서 살았던 친구일수록 반응이 더 컸다. 대한민국에 그런 지역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는 듯이. 처음에는 그 입장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런 순간이 오면 주변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나도 여기서 살았다면 믿을 수 없었을 거라고. 그러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이곳의 문화 경제적 시설. 그곳에 발 디디고 자란 사람들은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생각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스물 살, 나는 결국 한 학기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기차에 올랐고 마산으로 향했다. 지역 간 차이의 불공평함이나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것들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순전히 나에 대해서 고민했고 무엇이 나를 외롭게 만드는 지가 궁금했다. 답은 언제나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안다고 해서 해결되는 속성이 아닌 듯 했다.
두 사람을 만난 건 그런 무력감을 가지고 고향집 주변을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놀이터는 그대로 있었지만, 바닥이 모래가 아니라 고무타일로 이루어져 있었다. 뒤편에 있던 청소년 센터는 철거된 지 한참 지나 낚시꾼을 상대로 영업하는 잡화점이 되어 있었다. 놀이터 옆에 있는 벤치, 내가 항상 앉아 있던 그곳에서 내 또래의 남자와 여자가 맥주를 나눠 마시는 중이었다. 다가가보니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남자는 센터출신으로 나와는 어릴 때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이미 만취상태였던 둘은 나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고 우리 셋은 같이 술자리를 가졌다.
둘의 대화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맥락을 몰라서가 아니라, 단어 자체가 낯선 것이었다. ‘쓰리엠’과 ‘각반’ 같은 것들. 한참이 지나서야 그게 공사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할 때 쓰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센터는 지방 재정이 부족해서 없어졌다고 했다. 접근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이유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있으나 없으나 똑같았어.
센터출신 남자가 말했다. 다른 지방 센터는 열여덟 살에 정착 지원금을 주는데, 경남은 재정 문제로 한 푼도 안 준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방 값을 벌기 위해 여기저기서 일을 구하는 중이었다. 여자는 미용기술을 막 배운 터라 서울로 가서 미용실 자리를 알아볼 계획이라 했다.
달아날 거야.
여자는 진해로 향하는 다리 쪽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저기로. 머얼리. 서울로 떠날 거야. 이 더러운 동네 떠나서.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놀이터로 걸어갔다. 나와 남자도 술김에 같이 걸었다. 우리 셋은 번갈아 미끄럼틀을 타고, 그네와 시소를 가지고 놀았다. 애꿎은 고무타일을 발로 차고 다시 벤치로 가서 술을 들이켜고 놀이터를 바라봤다. 익숙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는데 전혀 감상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싶었는데 왜인지 그 대상이 나일 것만 같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가 잘못한 거야 이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는 없으나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누가 잘못한 거야 이건.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다녔다. 술기운이 가라앉자,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연스레 옛날이야기가 나왔고 다리가 놓이기 전, 내가 벤치에 앉아 놀이를 지켜보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당시 센터 아이들이 아파트 단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나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몰아낼 까봐. 언제나 사고를 치지 않기 위해서 서로를 단속하고 노력했다고. 사소한 싸움이나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지냈다고.
너는 그런 적 있어?
남자가 적의를 담아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자기가 안 당해 보면 절대 모르는 거야. 그래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거라고.
여자가 이어 말했다. 나는 언제나처럼 외로움을 느꼈지만, 그곳에 정말로 홀로 서 있는 건 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잠시 후에 자신들의 공격적인 언사를 사과하고 다시 잔을 들었다. 나는 술 한 모금을 들이켜고 고개를 돌렸다. 조명이 붙은 다리가 보였다. 섬을 빠져나가는 차 몇 대가 보였다. 달아나. 조그맣게 말해보았다. 어디든 멀리로.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놀이터 변두리에 있는 흙을 손에 담았다. 그러고는 고무타일 위에 그걸 올려놓았다.
나도 집 한 채만 주라 두껍아.
남자가 손으로 흙을 다듬으며 말했다. 기도를 하듯이 합장했다. 여자가 그 모습을 보며 소리 내서 웃었다. 나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이라도 다오. 우리는 그 노래를 반복해서 불렀고 목이 아프면 옛날이야기를 했다.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덕에 잊고 지냈던 과거의 몇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당시에는 기쁘거나 슬펐으나 지금에 와서는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일도 있었다. 나는 문득 내 유년시절에 대한 요약이 너무도 단순하지 않은가 하는 고민을 했다. 종이 몇 장에 담길 유년기라면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데 있어 과거의 기억은 불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에는 시시한 경험으로 과거를 가득 채운 사람도 있는 법이고, 또 그런 삶일지라도 결코 지워서는 안 될 기억 하나쯤은 품고 있는 것을 말이다.
엄마, 계속 부서지고 있어요. 앞으로는 더 많이 그럴 거예요. 우린 여길 떠나야 해요.
모종삽을 계단에 버려둔 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간 나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 당시 내가 어떤 뜻으로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내 머릿속에 그런 상황이 분명하게 담겨있는 것도 같고, 어느 시절에 내가 만들어낸 기억인 듯도 싶다. 그렇지만 나는 그날 어머니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다. 어머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이. 내가 버린 모종삽에 대해 더는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듯이.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이 너무도 미안하다는 듯이.